130만의 대표자에서 4억5000만의 대변자로 [김태훈의 의미 또는 재미]

김태훈 2024. 7. 20. 1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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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는 인구가 약 130만명으로 우리나라 광주광역시보다 적다.

소녀 칼라스는 장차 에스토니아가 독립하면 서방의 손을 굳게 잡고 나라 운명을 그에 맡겨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에스토니아 국민들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인구 130만명의 작은 나라를 대표했던 이가 27개 회원국 총 4억5000만명을 거느린 EU의 대변자가 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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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토니아는 인구가 약 130만명으로 우리나라 광주광역시보다 적다. 스웨덴, 독일, 제정 러시아 등 강대국들 사이에 낀 탓에 순탄치 않은 역사를 겪었다. 특히 18세기 초부터 약 200년간 이어진 러시아의 지배가 가혹했다. 20세기 들어 제1차 세계대전으로 러시아 제국이 사라지며 겨우 독립의 기쁨을 누렸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독일과 소련(현 러시아)이 서로 싸우며 그 각축장으로 전락했다가 결국 소련에 강제로 편입되고 만다. 냉전 종식과 소련 해체가 이뤄진 1991년에야 조국 광복의 기회를 맞이했다. 지금은 공산주의 잔재를 완전히 털어내고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 유럽연합(EU) 회원국으로서 서방의 확고한 일원이 되었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로 사실상 내정된 카야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 AFP연합뉴스
카야 칼라스는 에스토니아가 아직 소련 치하에 있던 1977년 태어났다. 11살 소녀 시절 부모 손에 이끌려 동독 수도 동베를린을 여행한 경험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냉전의 상징인 베를린장벽에 가로막혀 갈 수 없는 도시 서쪽을 가리키며 그의 아버지는 “깊게 숨을 쉬어보아라. 이것이 자유의 냄새란다”라고 말했다. 이듬해인 1989년 장벽이 무너지고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에도 자유가 밀어닥쳤다. 소녀 칼라스는 장차 에스토니아가 독립하면 서방의 손을 굳게 잡고 나라 운명을 그에 맡겨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정계에 투신한 뒤로, 또 2021년부터는 총리로 일하는 내내 칼라스가 일관되게 실천한 노선이 바로 이것이었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에스토니아 국민들에겐 공포 그 자체였다. 광복 후 약 30년간 잊고 지낸 소련의 안보 위협이 다시 현실화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러시아를 옛 공산주의 소련과 같은 제국주의 국가로 규정한 칼라스는 우크라이나 군사원조에 적극 나서는 한편 국제사회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규탄에 앞장섰다. 작은 경제 규모이나마 에스토니아는 한때 국내총생산(GDP) 대비 우크라이나 지원금 비율에서 세계 1위를 기록했다. 푸틴이 칼라스를 얼마나 싫어하는가 하면 일국의 총리인 그를 지명수배자 명단에 올리기까지 했다. 러시아에서 천연가스와 석유를 수입해 온 몇몇 유럽 국가들이 대(對)러시아 경제제재에 소극적 태도를 취하자 “가스 값은 좀 비쌀 수 있지만 자유는 가격을 매길 수조차 없다”고 다그쳐 정책을 바꾸도록 했다. 세계 언론은 칼라스에게 ‘북유럽 철의 여인’이란 별명을 붙였다.

카야 칼라스 에스토니아 총리(오른쪽)가 19일(현지시간) 에스토니아 탈린을 방문한 호세프 보렐 EU 현 외교·안보 고위대표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칼라스는 곧 임기가 끝나는 보렐의 후임으로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를 맡을 예정이다. 칼라스 총리 SNS 캡처
총리로서 3년이면 그리 오랜 기간이 아닌데 칼라스는 최근 대통령에게 사표를 제출했다.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를 맡기 위해서다. 이는 집행위원장, 정상회의 상임의장과 더불어 EU의 최고위직, 이른바 ‘빅3’로 꼽힌다. 유럽의회의 인준 절차가 남아 있긴 하지만 18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현 집행위원장의 연임 동의안이 쉽게 의회를 통과한 점에서 보듯 칼라스도 임명이 확실시된다. 인구 130만명의 작은 나라를 대표했던 이가 27개 회원국 총 4억5000만명을 거느린 EU의 대변자가 되는 셈이다. 에스토니아 국민들로선 과거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탄생했을 때 한국인이 느낀 것과 비슷한 짜릿함을 맛봤을 것이다. 칼라스는 총리직 유지에 미련을 내비치면서도 “과거 에스토니아에 주어지지 않았던 직책에 오를 기회를 놓칠 수 없다”고 EU 외교·안보 고위대표로 옮기는 이유를 밝혔다. 지도자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한 나라의 국격이 올라갈 수도, 내려갈 수도 있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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