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아내 몸 “끔찍하다”는 남편···어린 남자를 애인으로 삼았다? [사색(史色)]
[사색-76] 고급 호텔에 190cm의 장신의 사내가 들어섭니다. 단발머리를 하고 여성스러운 옷을 입은 그에게 모든 이의 시선이 꽂혔습니다. 그가 방으로 들어간 지 한 30분이 지났을 무렵. 미남 청년이 그의 방에 따라 들어갑니다. 마치 애인이라도 되는 듯이.
가쁜 호흡이 방을 가로질러 문에 닿았습니다. 밖에는 여러 사내가 귀를 대고 이들의 사랑을 하나하나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언어가 어땠는지, 방에서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성도덕을 지고의 가치로 삼은 빅토리아 시기 영국 사회를 뒤흔든 소송전은 역설적으로 문학사에는 길이 남을 명장면을 남겼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성적 지향이 그의 문학에 대한 후대의 관심을 증폭시켰기 때문입니다. 당대의 도덕을 비웃고, 예술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 문학사에 길이 남은 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문학을 좋아했던 어머니 제인이 읽어주는 그리스 고전을 들으면서 그는 ‘경계인’으로서의 슬픔을 달래곤 했었지요. 아일랜드의 명문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고전을 공부할 수 있게 된 배경입니다.
트리니티를 졸업한 후, 영국 옥스포드에 진학하면서 우리가 아는 오스카 와일드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합니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여성스러운 옷을 입으며 ‘당대의 관념’에 도전하기를 즐겼습니다.
어쩌면 ‘경계인’이라는 정체성이 그를 더욱 자유롭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구의 몸집에 여성성을 강조하는 스타일에 주변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기 일쑤였습니다. 19세기말 빅토리아 여왕 시기 영국은 성적 정체성에 대해 어느 때보다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나 하나 뿐인 ‘조국’의 개념마저도 그는 새롭게 정의하지요. “나는 심적으로는 프랑스인, 인종적으로는 아일랜드인, 언어로는 잉글랜드인이라네.”
오스카 피갈 오플러티 윌스 와일드라는 본명이 있음에도, 그는 아일랜드식(式) 이름인 중간의 세 이름을 모두 빼고 ‘오스카 와일드’로 불리기를 바랐습니다.
옥스포드 졸업 후 런던에 자리를 잡은 오스카 와일드. 그는 언제나 사교계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뛰어난 언변에, 이목을 사로잡는 외모, 고대 그리스 고전을 줄줄 읊는 지성까지. 귀족들이 원하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지요.
문학적으로 그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 놓은 건 1890년 3월 발매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었습니다. 완벽한 얼굴의 20세 청년 도리언 그레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초상화가 배질 홀워드를 만나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지요. 완성된 작품은 그의 실제 얼굴만큼이나 아름답기 그지없었습니다. 도리언은 초상화가 늙어가는 대신, 본인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얻기를 소망하고 그 꿈은 이뤄집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와 같은 삶을 꿈꿨습니다.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삶. 그에게 예술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사회적 메시지나, 종교적 교훈 따위는 예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지요.
그의 작품을 ‘예술을 위한 예술’을 뜻하는 ‘유미주의’로 부르는 배경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예술관’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술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목적이 있는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는 선언이었습니다.
1891년 운명적 만남이 시작됐습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잘생기고 톡톡 튀는 귀족 청년 알프레드 더글라스와 사랑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나이 37살. 알프레드는 고작 21살의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민들이 어린 소년과 사랑을 나눴듯, 오스카 와일드도 젊은 청년과 육체적 쾌락에 빠진 것이었지요. 그는 평소 고대 그리스를 찬미해 왔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에게 어느 날 쪽지가 도착합니다. 수신자는 ‘남색자 오스카 와일드’. 동성애자인 그를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문구였습니다. 발신자는 퀸즈베리 후작이었습니다. 와일드의 애인 알프레드 더글라스의 아버지였지요.
편지를 받은 와일드는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퀸즈베리 후작에게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었지요. 당시 대영제국 법상 ‘명예훼손’은 사실이 증명될 경우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성애’가 사실로 밝혀지면 감옥에 갇히는 건 와일드여야 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에는 동성애가 형법상 ‘죄’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법정에 선 퀸즈베리 후작이 사설탐정을 고용해 오스카 와일드의 ‘남색’ 증거를 샅샅이 찾아나선 배경입니다.
퀸즈베리 후작은 무혐의로 풀려납니다. 다음날 와일드의 집으로 경찰이 들이닥칩니다. ‘남색’, ‘심각한 외설혐의’가 이유였습니다. 영국의 법정은 오스카 와일드에게 2년의 노역형을 선고합니다.
1897년 복역을 마친 오스카 와일드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길로 프랑스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다시는 영국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혼에 상처입힌 조국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빅토리아 사회의 영국과 자유로운 오스카 와일드의 영혼은 결코 조화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의 수감 시스템이 얼마나 잔혹한지 글로써 비판하곤 했습니다. 수감 동료의 경험담을 담은 ‘레딩 감옥의 발라드’란 책도 발매합니다. 타고난 글쟁이들은 세상의 모든 경험을 ‘글감’으로 삼곤 하지요.
지근거리에서 그를 지켜 본 사람들은 얘기합니다. 자유로운 욕망은 예술의 원천일 수 있겠으나, 그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파멸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고. ‘유미주의’ 신봉자 오스카 와일드가 이에 동의했을까요. 젊은 시절의 그와 달리, 죽기 직전의 그는 어쩌면 자신의 삶을 후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ㅇ영국 문학사의 대표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으로 유명한 작가다.
ㅇ영국계 아일랜드인인 그는 자신의 정체성만큼이나 기존 질서에 대해 반감을 갖는 작가였다.
ㅇ‘아름다움’을 지고의 가치로 여겨서, 임신한 아내 대신 16살 동성애인을 만들기도 했다.
ㅇ결국 이 동성애가 파국을 불러 그는 노역을 치르고 가난 속에서 죽어갔다. 작품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주인공처럼.
<참고문헌>
ㅇ박지향, 슬픈 아일랜드, 기파랑, 2008년
ㅇ정이화·변영은, 토마스 만과 오스카 와일드:‘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드러난 동성애와 예술의 역할, 동서비교문학저널 55호,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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