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신한 아내 몸 “끔찍하다”는 남편···어린 남자를 애인으로 삼았다? [사색(史色)]

강영운 기자(penkang@mk.co.kr) 2024. 7. 20. 1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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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색-76] 고급 호텔에 190cm의 장신의 사내가 들어섭니다. 단발머리를 하고 여성스러운 옷을 입은 그에게 모든 이의 시선이 꽂혔습니다. 그가 방으로 들어간 지 한 30분이 지났을 무렵. 미남 청년이 그의 방에 따라 들어갑니다. 마치 애인이라도 되는 듯이.

가쁜 호흡이 방을 가로질러 문에 닿았습니다. 밖에는 여러 사내가 귀를 대고 이들의 사랑을 하나하나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습니다. 사랑의 언어가 어땠는지, 방에서의 분위기는 어땠는지.

그리스 신화 속 동성애가 묘사된 아폴로와 히아신스.
이날의 기록은 19세기 말 영국 사회를 뒤흔들었습니다. ‘남색’ 혐의로 체포돼 법정에 선 이가 최고의 극작가 오스카 와일드였기 때문입니다. 문밖의 사내들은 탐정들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많은 남성과 잠자리를 가졌으며, 어떻게 국가의 윤리를 뭉갰는지를 증언하기 위해 그의 뒤를 밟은 것이었습니다. ‘와일드 대 퀸즈베리’ 사건입니다.

성도덕을 지고의 가치로 삼은 빅토리아 시기 영국 사회를 뒤흔든 소송전은 역설적으로 문학사에는 길이 남을 명장면을 남겼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성적 지향이 그의 문학에 대한 후대의 관심을 증폭시켰기 때문입니다. 당대의 도덕을 비웃고, 예술의 아름다움을 찬미했던 작가 오스카 와일드. 문학사에 길이 남은 그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예술가는 무엇보다 자유로워야 하네.” 1882년의 오스카 와일드.
아일랜드인도, 잉글랜드인도 아닌 오스카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 이 사내가 태어난 곳은 아일랜드 더블린이었습니다. 지금은 독립 국가의 수도지만, 그가 태어난 1854년의 더블린은 대영제국의 식민지였습니다. 와일드 가(家)는 잉글랜드 출신 집안으로 누대째 아일랜드에 거주하는 ‘영국계 신교도’. 식민지에 거주하는 지배계급과 같았지요. 외과의사로서 대영제국 기사작위까지 받은 아버지 덕분에 와일드는 유복함 속에서 자랄 수 있었습니다.
더블린의 오스카 와일드의 집. [사진출처=Pi3.124]
풍요 속에서 자란 화초는 아니었습니다. ‘잉글랜드계 아일랜드인’이라는 정체성은 언제나 그를 주변부로 밀어냈기 때문입니다. 조국 아일랜드에서 그는 너무 ‘영국적’이었고, 잉글랜드에서 그는 너무나 ‘아일랜드적’이었습니다.

문학을 좋아했던 어머니 제인이 읽어주는 그리스 고전을 들으면서 그는 ‘경계인’으로서의 슬픔을 달래곤 했었지요. 아일랜드의 명문 트리니티 대학교에서 장학금을 받으며 고전을 공부할 수 있게 된 배경입니다.

속해있지 않아 자유롭다
‘괴짜 오스카 와일드.’

트리니티를 졸업한 후, 영국 옥스포드에 진학하면서 우리가 아는 오스카 와일드의 정체성이 확립되기 시작합니다. 머리를 길게 기르고, 여성스러운 옷을 입으며 ‘당대의 관념’에 도전하기를 즐겼습니다.

어쩌면 ‘경계인’이라는 정체성이 그를 더욱 자유롭게 만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구의 몸집에 여성성을 강조하는 스타일에 주변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기 일쑤였습니다. 19세기말 빅토리아 여왕 시기 영국은 성적 정체성에 대해 어느 때보다 보수적인 입장을 취했기 때문입니다.

화려한 스타일로 사교계의 주목을 받은 오스카 와일드.
모든 예술가가 그렇겠지만, 오스카 와일드는 시대가 규정해 놓은 담벼락을 자유로이 넘나드는 사람이었습니다. 누군가가 손가락질할 때도, 더욱 여성성을 강조하는 행동을 보여줬지요. 마치 세상을 향해 조롱이라도 하는 듯이.

누구에게나 하나 뿐인 ‘조국’의 개념마저도 그는 새롭게 정의하지요. “나는 심적으로는 프랑스인, 인종적으로는 아일랜드인, 언어로는 잉글랜드인이라네.”

오스카 피갈 오플러티 윌스 와일드라는 본명이 있음에도, 그는 아일랜드식(式) 이름인 중간의 세 이름을 모두 빼고 ‘오스카 와일드’로 불리기를 바랐습니다.

“우리의 자치를 위해 싸우자.” 1798년 영국과 아일랜드의 베니거 힐 전투. 이 전투 이후로 아일랜드는 공식적으로 영국에 병합됐다.
“모든 사람의 입에 오르내릴 운명을 타고난 이름은 너무 길어선 안 된다, 광고에 돈이 들잖나”라는 익살스러운 말과 함께였습니다. 그는 잉글리시도 아니고 아이리시도 아니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잉글리시이자 아이리시였던 셈입니다.
사교계에서도, 문학계에서도 주목을 받은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를 한 번 만나볼 수 없겠나.”

옥스포드 졸업 후 런던에 자리를 잡은 오스카 와일드. 그는 언제나 사교계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뛰어난 언변에, 이목을 사로잡는 외모, 고대 그리스 고전을 줄줄 읊는 지성까지. 귀족들이 원하는 모든 요소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지요.

당대의 스타이자 인기남이었던 오스카 와일드.
희곡의 작가로서 첫 작품은 ‘베라 혹은 허무주의자들’이었습니다. 초판이 완판되고, 뉴욕에서 공연이 열릴 정도로 뜨거운 주목을 받았지요. 미국에 강연을 다닐 정도로 오스카 와일드는 유럽과 미국의 ‘스타’가 되었습니다.

문학적으로 그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 놓은 건 1890년 3월 발매된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었습니다. 완벽한 얼굴의 20세 청년 도리언 그레이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초상화가 배질 홀워드를 만나 도리언 그레이는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하지요. 완성된 작품은 그의 실제 얼굴만큼이나 아름답기 그지없었습니다. 도리언은 초상화가 늙어가는 대신, 본인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얻기를 소망하고 그 꿈은 이뤄집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그림이라니.”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삽화.
시간의 제약이 없는 곳에서 인간은 타락하기 마련입니다. 도리언은 영원한 젊음을 믿고, 방종한 삶을 이어가지요. 쉽게 잠자리를 갖고, 마약에 빠졌으며, 살인을 저지릅니다. 자신이 파멸에 이르렀다고 깨달은 도리언은, 추해진 초상화를 바라봅니다. 그리곤 초상화를 찢어버리며 자기 삶을 끝마칩니다.
도리언 그레이와 닮은 오스카 와일드
“도리언 그레이는 내가 되고 싶은 사람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와 같은 삶을 꿈꿨습니다. 아름다움을 찬미하는 삶. 그에게 예술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습니다. 사회적 메시지나, 종교적 교훈 따위는 예술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겼지요.

그의 작품을 ‘예술을 위한 예술’을 뜻하는 ‘유미주의’로 부르는 배경입니다. 오스카 와일드는 자신의 ‘예술관’에 대해 이렇게 얘기합니다. “예술은 쓸모가 없는 것이다.” 목적이 있는 예술은 더 이상 예술이 아니라는 선언이었습니다.

“중요한 건 정말이지 아름다움 뿐이라네.” 미국을 방문할 당시 오스카 와일드를 묘사한 삽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쾌락에 빠진 도리언이 결국 죽음에 빠진다는 ‘교훈’ 섞인 메시지가 오스카 와일드의 평소 예술관과는 배치된다는 학자들의 지적도 있습니다.‘유미주의’ 문학에서는 권선징악이 배제돼야 하기 때문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광적 추구
소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은 작가의 삶을 그대로 투영한 듯 보였습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아름다움’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면서, 미적인 것에 대한 집착을 보여서였습니다. 그의 친구 로버트 세라드는 “와일드는 육체의 추함에 공포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을 정도지요.
“어떻게 당신의 아이를 가진 내 몸을 보고 그런 소리를 할 수가 있어요.” 오스카 와일드의 아내 콘스턴스 로이드는 그와 결혼한 뒤 비참한 삶을 견뎌야 했다.
결혼한 아내가 둘째를 임신한 이후로 그는 더 이상 여성이 아름답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친구 프랭크 해리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결혼했을 때 아내는 잔물결을 일으키는 음악같은 웃음을 지닌 소녀였지만, 1년쯤 지난 후에는 꽃과 같은 우아함은 사라지고 볼품없는 몸매로 변했지. 끔찍하기 그지없다네.”
“엄마, 아빠는 어디갔어요. ” 아내 콘스턴스와 아들 시릴.
미남 알프레드 더글라스와 만나다
“이쪽은 알프레드 더글라스네.”

1891년 운명적 만남이 시작됐습니다. 오스카 와일드가 잘생기고 톡톡 튀는 귀족 청년 알프레드 더글라스와 사랑에 빠진 것이었습니다. 오스카 와일드의 나이 37살. 알프레드는 고작 21살의 젊은 청년이었습니다. 고대 그리스 시민들이 어린 소년과 사랑을 나눴듯, 오스카 와일드도 젊은 청년과 육체적 쾌락에 빠진 것이었지요. 그는 평소 고대 그리스를 찬미해 왔습니다.

미남 청년 알프레드 더글라스는 단숨에 오스카 와일드를 사로잡았다.
더글라스는 건방지고 천방지축인 청년이었습니다. 관계를 맺은 후에는 당당하게 와일드에게 돈을 요구했지요. 파티와 술에 모든 돈을 쓰고도 다시 와일드와 사랑을 나누고 돈을 받아갔습니다. 와일드에게 게이 매춘을 알선한 것도 더글라스였습니다. 젊은 청년들에게 밥을 사주고, 호텔방으로 들어가 일시적 쾌락을 주고받는. 오스카는 지독한 덫에 걸려 있던 것이었지요.
와일드를 조롱한 남자의 정체
“남색자(Sodomite) 오스카 와일드에게.”

오스카 와일드에게 어느 날 쪽지가 도착합니다. 수신자는 ‘남색자 오스카 와일드’. 동성애자인 그를 노골적으로 조롱하는 문구였습니다. 발신자는 퀸즈베리 후작이었습니다. 와일드의 애인 알프레드 더글라스의 아버지였지요.

퀸즈베리 후작이 오스카 와일드에게 건넨 쪽지에는 ‘남색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아들이 유명작가와 동성연애를 한다는 사실에 화가 나 조롱성 편지를 보낸 것이었습니다. 퀸즈베리 후작의 큰아들인 프랜시스도 영국 수상인 아치볼드 필립 로즈베리와 동성애적 관계를 나누다 의문의 죽음을 맞았습니다. 다른 아들까지 남색에 빠지게 둘 수는 없는 상황이었지요.

편지를 받은 와일드는 분노를 참지 못합니다. 퀸즈베리 후작에게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었지요. 당시 대영제국 법상 ‘명예훼손’은 사실이 증명될 경우 처벌받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동성애’가 사실로 밝혀지면 감옥에 갇히는 건 와일드여야 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에는 동성애가 형법상 ‘죄’에 해당했기 때문입니다. 법정에 선 퀸즈베리 후작이 사설탐정을 고용해 오스카 와일드의 ‘남색’ 증거를 샅샅이 찾아나선 배경입니다.

“우리 연애 비밀로 해.” 오스카 와일드와 알프래드 더글라스.
시련을 맞은 오스카 와일드
“퀸즈베리 후작은 죄가 없다.”

퀸즈베리 후작은 무혐의로 풀려납니다. 다음날 와일드의 집으로 경찰이 들이닥칩니다. ‘남색’, ‘심각한 외설혐의’가 이유였습니다. 영국의 법정은 오스카 와일드에게 2년의 노역형을 선고합니다.

피고석에 선 오스카 와일드를 묘사한 삽화.
쳇바퀴 위 다람쥐처럼 주철 기계의 계단을 끊임없이 걷는 ‘중노동’이었습니다. 노역자들은 이를 ‘영원한 계단’이라고 불렀을 정도입니다. 먹을 것은 변변찮게 주어졌지요. 190cm에 평생 글만 써온 오스카 와일드가 감당할 수 없는 형벌이었습니다. 이 때를 기점으로 그의 몸은 급격히 쇠약해져 갑니다.
상처받은 영혼
“다시는 영국으로 가지 않겠네.”

1897년 복역을 마친 오스카 와일드가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는 그 길로 프랑스로 망명길에 올랐습니다. 다시는 영국에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의 영혼에 상처입힌 조국에 대한 원망 때문이었습니다.

빅토리아 사회의 영국과 자유로운 오스카 와일드의 영혼은 결코 조화할 수 없었습니다. 영국의 수감 시스템이 얼마나 잔혹한지 글로써 비판하곤 했습니다. 수감 동료의 경험담을 담은 ‘레딩 감옥의 발라드’란 책도 발매합니다. 타고난 글쟁이들은 세상의 모든 경험을 ‘글감’으로 삼곤 하지요.

1904년 레딩 감옥의 발라드. 동료 수감자의 살인 경험과 수감 생활을 녹여낸 작품이다.
자신의 삶을 망가뜨린 단초를 제공한 남자, 알프레드 더글라스. 오스카 와일드는 루앙에서 그를 다시 만났습니다. 잠시 같이 살면서 다시 사랑을 나누기 위해서였지요. 가족들의 반대로 이내 다시 헤어질 수 밖에 없었지만.
도리언 그레이와 같은 최후를 맞은 와일드
오스카 와일드에겐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돈도, 건강도, 연인도. 가난 속에서 마지막까지 술에만 의존합니다. 그가 그토록 염원하던 ‘아름다움’은 이제 그에게서 완전히 멀어져 갔습니다.
1900년 임종 직전의 오스카 와일드. 그의 죽음은 그의 꿈과는 달리 아름다움과 거리가 멀었다.
1900년 11월 30일 그가 눈을 감았습니다. 그는 참회라도 하는 듯이, 성직자의 미사를 조용히 읊조리며 따라하고 있었습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속 도리언의 종말을 오스카 와일드가 그대로 걷고 있었던 셈입니다. 그가 동성애라는 범죄 혐의를 벗어던진 건 사면법이 도입된 2017년이었습니다. 세상을 떠난 지 117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지근거리에서 그를 지켜 본 사람들은 얘기합니다. 자유로운 욕망은 예술의 원천일 수 있겠으나, 그 자신의 삶을 갉아먹는 파멸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고. ‘유미주의’ 신봉자 오스카 와일드가 이에 동의했을까요. 젊은 시절의 그와 달리, 죽기 직전의 그는 어쩌면 자신의 삶을 후회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이가 든다는 건,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말이기도 하니까요.

프랑스 파리에 자리한 오스카 와일드의 묘지. 그는 죽어서까지 영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사진출처=JHvW]
1898년의 오스카 와일드.
<네줄요약>

ㅇ영국 문학사의 대표 작가 오스카 와일드는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으로 유명한 작가다.

ㅇ영국계 아일랜드인인 그는 자신의 정체성만큼이나 기존 질서에 대해 반감을 갖는 작가였다.

ㅇ‘아름다움’을 지고의 가치로 여겨서, 임신한 아내 대신 16살 동성애인을 만들기도 했다.

ㅇ결국 이 동성애가 파국을 불러 그는 노역을 치르고 가난 속에서 죽어갔다. 작품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의 주인공처럼.

<참고문헌>

ㅇ박지향, 슬픈 아일랜드, 기파랑, 2008년

ㅇ정이화·변영은, 토마스 만과 오스카 와일드:‘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 드러난 동성애와 예술의 역할, 동서비교문학저널 55호,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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