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0억 원대 전세사기 피해 매물…‘깔세’ 활개
당신에게 집은 어떤 의미입니까?
바깥 환경으로부터 몸을 보호해주는 물리적인 공간. 가족과 함께 추억을 쌓는 장소. 고단한 몸을 뉠 아늑한 보금자리.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경제적 수단.
처음 떠오르는 이미지는 제각각이어도 많은 이들의 목표 가운데 하나가 바로 '내 집 마련'입니다.
그런데 꿈과 삶 자체를 송두리째 빼앗은 일이 있었습니다. '전세사기'입니다.
내 집 마련을 위한 사다리를 걷어찬 수준이 아니었습니다. 사회초년생과 신혼 부부의 전 재산이자 아늑하고 포근해야 할 공간을 지옥으로 바꾼 범죄였습니다.
■ 악성 임대인이 버짓이 또 임대사업…끝까지 털어먹는 '전세사기'
전세사기 피해자들은 지금도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데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한다던 임대인은 전세사기 물건으로 임대사업을 벌여 추가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 중 한 명이 강원도 원주에 사는 32살 손 모 씨입니다. 일명 '구리 빌라왕' 사건 가담자입니다. 정확히는 명의 대여자, 일명 '바지 임대인'이었습니다.
손 씨는 서울과 인천, 경기 등에 자신의 명의로 집 450여 채를 보유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손 씨는 동시에 주택도시보증공사(HUG)가 공개한 악성 임대인이기도 합니다.
손 씨의 채무보증액 707억 원으로 전국 최고였습니다. 보증보험에 가입 안 된 금액까지 하면 800억 원대에 이릅니다.
갚아야 할 돈만 800억 원대지만 손 씨는 부동산관리업체와 손잡고 집 370채로 단기 임대사업을 벌여 왔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 전세사기 연루 주택 가보니…신규 세입자 거주 중
서울시 성북구 정릉동의 한 빌라촌. 모두 11세대가 사는 한 빌라의 등기부등본을 떼 봤더니 7세대에 가압류가 걸려있었습니다.
임대인이 세입자에게 전세보증금을 돌려주지 못하자 HUG가 보증채무를 이행해주고 가압류를 걸었는데 이 가운데 2곳이 손 씨의 집이었습니다.
HUG를 통해 전세보증금을 받고 기존 세입자가 모두 이사 나간 집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새로운 사람이 살고 있었습니다.
이른바 '깔세' 로 거주 중인 세입자였습니다. 깔세란 보증금 없이 단기간 월세를 한 번에 내는 계약으로 부동산 업계의 은어입니다.
"투룸 신축에 좋은 입지인데 6개월에 400만 원, 서울에서 이런 집 구할 수 없어요."
- 전세사기 연루 매물 세입자
서울시 강서구 화곡동의 한 오피스텔 역시 60여 채 가운데 10채가 손 씨의 소유였습니다.
이곳에도 지난달(6월) 새로 이사 온 세입자 최 모 씨가 있었습니다. 최 씨는 보증금 1,000만 원에 월세 60만 원으로 1년 동안 사는 임대차 계약을 맺었다고 전했습니다.
■ 전세사기 매물 명단 공유…가압류 상태 노려
손 씨가 보증사고를 낸 매물들은 이런 식으로 단기 임대 매물로 변해 있었습니다. 또 다른 수익 창출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는 부동산 관리업체가 끼어 있었습니다.
해당 부동산 관리업체에서 일했다던 직원을 통해 받은 자료는 상세했습니다.
손 씨 이름으로 된 서울과 경기, 인천지역 주택 370여 채 정보가 모두 적혀 있었습니다. 주소와 전용면적, 계약일은 물론 임차인의 신상과 월세에 현관 비밀번호까지 빼곡히 정리돼 있었습니다.
이들은 1년 월세로 200만 원에서 많게는 800만 원씩 받아 챙겼습니다. 이렇게 모은 돈은 10억 원이 넘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가압류가 된 매물의 경우 경매 낙찰 전까지 기존 소유권자가 재산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점을 노렸습니다. 경매 절차에 들어간다해도 절차상 시간이 꽤 걸리고, 유찰까지 생각하면 단기간 안에 수익을 올리는 게 가능하다고 본 판단한 겁니다.
심지어 일부는 세금 체납으로 국세청으로부터 압류까지 된 것도 있었습니다. 이는 재산권 행사를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신규 세입자들에게는 전세사기 물건이어서 경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고지하며 '점유(입주) 확인증'으로 부동산계약서를 대체했습니다.
경매로 인한 퇴거조치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의 각서를 받기도 했습니다.
■ 손 씨 "건물 관리 수단용…임대 여부는 뒤늦게 알아"
이 과정이 어떻게 이뤄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손 씨를 직접 만났습니다.
손 씨는 지난해 구속 상태로 수사를 받아보니 건물의 보수나 공과금 납부 등을 할 수가 없게 됐다고 밝혔습니다.
재판 지연으로 구속 기간이 만료돼 지난해 11월 석방됐지만, 집이 수백 채에 달하다보니 건물 관리는 여전히 할 수 없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런 자신에게 부동산 관리업체가 먼저 접근해왔다는 겁니다. 고민 끝에 자신의 명의로 된 집 450여 채 가운데 일부를 부동산 관리업체에 맡겼다고 말했습니다.
부동산 관리업체는 건물 관리팀과 법무팀, 영업팀으로 꾸려져 조직적으로 움직였습니다.
영업사원들은 부동산 업체에 수천만 원에서 수억 원씩 주고 세 놓을 권리를 삽니다. 이후 부동산 거래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깔세' 세입자를 구합니다. 이들 가운데 공인중개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이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해당 부동산업체 대표는 손 씨 이전에도 전세사기 매물로 구속되거나 재판받는 사람들의 건물을 관리하고 있었다고 털어놨습니다.
다만 손 씨는 건물 관리만 한다고 생각을 했지 임대 사업을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습니다.
통상적으로 건물 관리를 맡기려면 집주인이 업체에 돈을 내는 방식인데 돈 한 푼 안 내고 관리해 준다는 업체의 말을 믿은 것이냐는 취재진의 질문엔 "잘 몰랐다"라고만 답했습니다.
손 씨와 부동산 관리업체는 현재 단기 임대 수익 배분을 두고 다툼을 벌이고 있습니다. 결국 임대 수익은 기존 전세사기 피해자 변제에는 쓰이지 않고 있는 겁니다.
"공과금 납부처럼 정말 건물 관리만 하는 줄 알았어요. 나중에 알게 돼서 수익 반을 요구했는데, 받지 못했어요. 수익은 피해자 변제에 쓰려고 했어요."
- '구리빌라왕' 사건 연루자 손 씨
■ HUG "강제 권한 없어"…제도 정비 시급
전세사기 매물이 한꺼번에 쏟아져나오면서 빈집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악용하는 사례가 심심치 않게 등장합니다.
국토교통부와 HUG도 이런 문제를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HUG는 보증사고 물건의 채권자 지위에 있을 뿐이기에 소유권자를 강제할 권한이 없다고 밝혔습니다.
현재 HUG가 채권을 회수하는 방법으로는 이른바 '셀프낙찰' 정도가 있습니다.
HUG는 보통 전세사기가 발생한 집에 대해 가압류를 걸어두고 세입자들의 전세자금을 집주인 대신 변제해 줍니다. 그런 다음 이 집이 경매에 넘어가면 직접 그 집을 낙찰을 받아 임대사업을 하며 집주인 대신 변제해 준 돈을 회수하는 겁니다.
하지만 이런 방식도 집이 경매에 들어간 이후에나 가능합니다. 경매 개시 전에는 전세사기 물건에 대한 관리는 여전히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전재범 강원대 교양교육원 부동산전공 교수는 "민형사상 전세 사기라고 확정되지 않더라도 수십 채, 수백 채씩 고의성을 띤 부분에 대해서는 엄격하기 관리해야 한다"라며 "그러기 위해선 전세사기로 보이는 건물을 강제성을 갖고 관리를 할 제도가 필요하다"라고 지적했습니다.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8014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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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청초 기자 (chocho@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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