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불'을 넘어서
[이슬기의 미다시]
[미디어오늘 이슬기 전 서울신문 기자]
지난해 10개월 간 라디오 패널로 출연했다. 여성의 시선으로 뉴스를 분석하고 전달하는 시사 프로그램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오전 11시, 라디오 또는 유튜브로 방송을 듣거나 볼 청취자를 상상하며 이슈를 브리핑했다. 신문사에 있을 때도, 독자를 상정하고 기사를 쓴 것은 매한가지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이동진 영화평론가의 말처럼 '말은 뜨겁고, 글은 차갑다'. 신문사 최초로 만들어진 '젠더연구소'라는 조직에 있던 나는 활자 매체의 성격을 빌려 보다 날카롭게 벼린 '최전선의 논의'를 하고 싶었다. 그러나 라디오에선 일단 내 눈 앞에 있는 진행자와 상대 패널을 이해시키는 것이 먼저였다. 신문 기자이던 때와 달리 나는 피부에 와닿는 예시와 비유를 들어가며, 설득하는 말하기를 위해 노력했다. 이에 앞서, '아이 콘택트'는 필수였다.
지난달 1일 서울을 시작으로 전국에서 퀴어 축제가 이어지고 있다. 대전에서는 지난 6일 처음으로 퀴어 축제가 열렸다. 2년 만에 열린 제주의 퀴어 축제는 그간 제주시에서만 열리다 처음으로 서귀포에서 개최됐다. 어디서나 반대 집회는 따라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올해도 퀴어 축제를 다루는 언론의 가장 흔한 '미다시'는 '맞불'이다. 첨예한 사회적 쟁점을 놓고 찬반 의견에 따라 '맞불 집회'가 열리는 것은 늘상 있는 일이다. 그러나 문화 축제에 따라붙는 이 특이한 '맞불 집회'는 수년째 같은 맥락으로 가시화되고 있다. 25회째를 맞는 서울퀴어문화축제나 새롭게 생겨난 지역의 퀴어 축제 할 것 없이 관성적인 '반반 보도'는 이어진다.
지난달 28일 첫 공개된 웨이브 오리지널 다큐멘터리 '모든 패밀리'는 '다른 가시화'의 여지를 보여주는 프로그램이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퀴어 축제만 반짝 비추는 것이 아닌, 한국의 미디어에서 비가시화된 퀴어의 일상을 적극적으로 가시화한다. '모든 패밀리'에는 벨기에서 정자를 기증 받아 출산한 레즈비언 커플 규진세연과 '망원댁TV'라는 유튜브로 잘 알려진 10년 차 게이 커플 기환종렬이 등장한다. 웨이브는 이전부터도 동거 퀴어 커플의 삶을 다룬 예능 '메리 퀴어', 국내 최초 남성 커플 매칭 리얼리티 쇼 '남의 연애' 등으로 한국형 퀴어 콘텐츠를 도모해왔다. 넷플릭스 등 여타 OTT 플랫폼의 해외 콘텐츠들에서 퀴어 서사는 익숙하지만, 한국에선 찾아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 웨이브의 행보는 독자적이다.
총 5부작, 카메라로 퀴어들의 삶을 오랜 시간 비춘 결과는 그들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라는 '평범한 결론'이다. 이들은 외국계 화장품 회사의 이커머스 매니저(규진), 마취과 의사(세연), 은행원(킴), 요식업 사업가(팩)로 살아가는 사회의 성원이면서, 누군가의 아들딸이자 친구이다. 퀴어도 퀴어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 이들을 오래 들여다보며 우리가 얻는 결론이다. 출산을 앞둔 규진은 산후조리원에 입소를 문의했다가 이런 말을 듣는다. “저희는 다양한 라이프 스타일을 존중합니다.” '문제적으로' 여겨지는 그들의 성적 지향도 결국은 삶의 방식 중 하나일 뿐이라는 깨달음의 소산이다. 규진이 와이프를 둔 레즈비언이라 한들, 조리원에서는 그저 '산모님'이고 세연 또한 '아빠 수업'이 필요한 또 한 명의 양육자일 뿐이다. 교회에서 킴과 팩이 평범한 성도 중 한 명인 것과 같은 이치다. 그들의 삶을 하나하나 톺아가다 보면, 어느덧 규진세연킴팩은 '그들'(they)이 아니라 '우리'(we)의 범주에 들어오게 된다.
다큐에는 퀴어의 삶을 쭉 지켜보는 패널 집단이 등장한다. 패널은 퀴어 당사자와 퀴어의 부모들, 부모아들딸로 구성된 4인 가족, 한국 거주 외국인, 성직자, 산부인과비뇨기과 의사로 구성돼 있다. 그들의 말은 퀴어 축제 반대 집회 참가자들의 발언보단 점잖지만, 내용은 날카롭다. “만약 자식 중에 동성애자 커플이 있으면 어떨 거 같애?”라는 아들의 말에 아빠는 “호적을 파야지”라며 불호령을 내리고, 목사는 “(동성애는) 못하게 막아야 할 일”이라고 일갈한다.
그러나 퀴어의 삶을 직접 마주하자 패널들의 태도는 미묘하게 바뀐다. 살아있는 존재가 보여주는 구체적인 삶 앞에서 호적을 파야 한다던 4인 가족 아버지와 “동성애는 죄”라는 성직자, “부부는 이성 간 결합”이라던 산부인과 의사의 말수는 점점 줄어든다. 방송 끄트머리에 등장하는 그들의 얼굴은 여전히 뭔가 석연치 않다는 표정이지만, 방송 초반의 완강하게 내려간 입꼬리와는 완연히 다르다. '삶을 반대할 수 있을까?'라는 근원적인 질문에 그들 역시 봉착했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혐오에 답하는 명료한 한 줄 문장 '존재를 반대할 수 없다'가 못하는 일을, 그네들의 삶이 해내는 모습이다.
지난 13일 보도된 JTBC 단독 기사 하나. 지난 2년 새 혼인신고장을 제출했다 불수리된 동성 부부가 33쌍이라는 내용이다. 3년 전, 불수리될 걸 알면서도 구청에 혼인신고장을 냈던 규진은 말한다. “기록이 중요하다”고. “기록에 남지 않으면 다들 잊어버리고 10년이 지나면 없던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 무섭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렇게 계속 문을 두드리게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기록이 업(業)인 미디어는 퀴어를 어떻게 기록할 것인가. '모든 패밀리'는 '맞불'과 '반반 보도'를 넘어서 퀴어 보도에 구체성을 더해야 한다는 방증이다. 같은 보도를 수년째 반복하는 것은 직업 윤리적으로도 태업이다. 자세히 들여다보고, 구체적으로 재현하자. 이를 위해 눈맞춤이 필수적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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