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그럽고 무서워" 욕먹던 백수 男…수십년 뒤 '대반전' [성수영의 그때 그 사람들]
오딜롱 르동(1840~1916)
삶의 궤적 따라 그려낸
내면의 풍경
남자의 마음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남자는 어린 시절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골칫덩이 취급을 받으며 친척 집에 맡겨졌습니다. 병이 나은 뒤 집으로 돌아온 후에도 상황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뭘 시켜도 서투른 그를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곤 했습니다. 어머니는 활달하고 재능 있는 형만 예뻐하며 그를 아예 없는 사람 취급했습니다. 학교에도, 사회에도 남자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의 나이는 어느새 30대. 이룬 건 없는데 앞날은 막막했습니다. 그를 사랑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 같았습니다.
남자는 쌓인 울분을 풀듯 그림을 그렸습니다. 칙칙하고 우울한 그의 흑백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무섭고 꺼림칙하다”는 반응만 돌아왔습니다.
하지만 남자는 몰랐습니다. 머지않아 본인의 작품 세계가 꽃을 피우고 많은 이들의 인정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모네, 고흐, 세잔과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찬사를 받게 된다는 것을. 그리고 먼 훗날에는, 꽃 그림을 그리며 “인생은 아름답다”고 말하게 될 미래를. 그 남자, 상징주의를 대표하는 거장 오딜롱 르동(1840~1916)의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실패, 실패, 실패
르동은 1840년 프랑스 보르도 지역의 중산층 가정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그는 발작 증세를 보였습니다. 뇌전증(간질)이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런 그를 부모님은 멀리 페이를르바드라는 지역에 있는 친척 집에 맡겼습니다. 한적한 곳에서 르동을 요양시킨다는 명목이었지만, 아이가 아프다는 사실을 주변 사람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도 있었습니다. 그때만 해도 유럽에는 뇌전증에 대해 잘못된 생각이 퍼져 있었거든요. 뇌전증이 다른 사람에게 옮는다거나, 유전적 결함 때문이라거나, 심지어는 부모가 잘못 살아서 받은 천벌이라는 말도 안 되는 편견 말입니다.
지금은 나무가 무성하지만, 당시 페이를르바드는 황무지였습니다. 르동은 “회색과 푸른색이 도는 광활한 대지였다”고 회고했습니다. 그 황량한 풍경에서 어린 르동은 부모님과 멀리 떨어져 자랐습니다. 먹고 입는 것엔 부족함이 없었지만, 르동은 외롭고 쓸쓸했습니다. 그는 멍하니 하늘의 구름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나는 버려졌어.’ 르동은 생각했습니다. 마음을 파고드는 외로움의 고통은 이때부터 오랜 세월 그를 괴롭히게 됩니다.
다행히도 뇌전증은 르동이 성장하면서 저절로 나았습니다. 르동이 집에 돌아온 건 11살 때. 하지만 여전히 집안에 그의 자리는 없었습니다. 가족은 그를 서먹서먹하게 대했습니다. 아버지는 엄격하고 말수가 적은 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쾌활하고 재능 넘치는 형만 아끼고 르동은 전혀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르동은 학교에 적응하고 친구를 사귀는데도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훗날 그는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고통스러운 과거 중에서도, 그때가 가장 슬프고 우울했다.”
르동의 유일한 도피처는 예술이었습니다. 그는 소설을 비롯한 문학과 음악, 미술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특히 그림 그리는 걸 즐겼습니다. 존경하는 화가는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그린 유진 들라크루아. “인간은 상상력이 있기에 동물과 다른 존재다. 남들 하는 대로 관습에 따르지 말고 자신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펼쳐야 한다.” 들라크루아의 이 말은 다른 사람과 잘 어울리지 못했던 르동의 마음에 깊이 새겨졌습니다. ‘그래. 나는 그림으로 사람들에게 나만의 세계를 보여줄 거야.’ 스무 살 무렵의 르동은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그림에 별 재능이 없어. 건축가가 되거라.” 아버지를 무서워했던 르동은 도저히 그 말에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아버지의 말대로 그는 스물두 살이 되던 1862년 파리로 떠나 프랑스 국립미술학교(에콜 데 보자르)의 건축학과 입학시험을 준비했습니다. 하지만 르동은 시험에 떨어졌고, 자괴감 때문에 우울증에 빠졌습니다. 르동과 가까운 사람들은 당시 그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자신감이 없고 실패를 병적으로 두려워한다.” 제대로 다른 사람의 인정을 받아본 적이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나는 뭘 해도 안 돼'
그래도 수확이 전혀 없는 건 아니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만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한스 홀바인 등 과거 거장들의 작품은 그에게 위안을 줬습니다. 특히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건 렘브란트의 그림, 특히 흑백의 판화였습니다. ‘흑백만으로도 이렇게 영혼을 뒤흔드는 그림을 그릴 수 있다니…. 나도 저런 작품을 그리고 싶어.’ 르동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용기를 쥐어짜 아버지에게 말했습니다. “미술을 공부하고 싶어요. 허락해 주세요.”
문제는 누구에게 미술을 배우느냐였습니다. ‘유명한 사람에게 배우지 않으면 아버지가 미술 공부를 허락해주시지 않을 거야.’ 르동은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당시 ‘나폴레옹의 화가’로 유명했던 사실주의 미술의 대가 장 레옹 제롬의 제자로 들어가겠다고 했습니다. 예상대로 아버지는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르동은 제롬의 화실에서도 적응에 실패했습니다. 제롬과 르동의 예술 철학이 전혀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림은 사실적이어야 한다’는 게 제롬의 생각. 반면 르동은 그림에 상상력과 영감을 최대한 반영하려고 했습니다. 르동의 작품을 볼 때마다 제롬은 번번이 호통을 치며 “이것도 그림이냐”고 다그쳤습니다. 훗날 르동은 이렇게 회고했습니다. “제롬이 마치 나에게 예술을 혐오하게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것 같았다.”
머지않아 르동은 제롬에게 미술을 배우는 걸 그만두고, 짐을 싸서 보르도의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아버지는 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아. 나는 세상에서 불쌍한 존재야. 뭘 해도 안 돼.” 르동의 마음속에는 자기 연민과 자기혐오가 가득했습니다. 자존감이 바닥을 쳤습니다. 그러는 사이 르동의 나이도 어느새 30대에 접어들고 있었습니다
마음의 풍경, '검은 그림'
그러던 르동의 삶에 한 줄기 빛이 비쳤습니다. 괴로워하면서도 작품을 놓지 않으며 실력을 쌓은 덕분에, 1869년 프랑스에서 가장 권위 있는 전시인 살롱전이 그의 작품을 받아들여 준 겁니다. 이는 르동의 삶에서 처음으로 남에게 제대로 인정받은 경험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는 미술을 계속할 용기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1874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건 르동의 인격이 한층 성장하는 계기가 됐습니다. 르동에게 평생 아버지는 무섭기만 한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니 그간 잊고 있었던 기억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어린 시절 아버지가 페이를르바드에 찾아와 함께 구름을 바라보며 다정한 말을 건넸던 일, 수많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가 자신을 지원해줬던 순간들 같은 것 말입니다. 르동은 회고했습니다. “나는 아버지에 대해 많은 걸 오해하고 있었다. 그는 엄격한 겉모습과는 달리 나를 많이 사랑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 그 사실을 알았어야 했는데.”
르동은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자기도 모르게 모든 우울과 불행의 책임을 다른 사람들에게만 돌리고 있었다는 것, 자신의 인생은 자신이 책임져야 하고 오직 자신만이 구원할 수 있다는 것, 지나버린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것, 그러니 사람은 매 순간 힘껏 도전해야 한다는 사실을요. 훗날 자서전에 르동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때 모든 걸 깨달았다. 그때부터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오직 나만을 위해,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르동이 ‘검은 그림’(Noir·누아르)으로 불리는 그림들을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게 이때였습니다. ‘세상에는 말이나 음악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게 있다. 글로 설명할 수 없는 것, 음악으로 들려줄 수 없는 것, 바로 내 내면의 풍경을 그림으로 보여줄 거야.’ 르동은 생각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림은 흑백으로 그리기로 했습니다. 꿈과 상상의 세계는 어둠에서 나오니 흑백으로만 표현해도 충분하고, 색을 써봤자 눈만 어지러워질 뿐이라는 이유에서였습니다.
그렇게 르동은 방금 악몽에서 갓 튀어나온 듯한 괴물들과 황폐한 풍경을 작품에 담아내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르동의 마음속 풍경이자, 그의 마음속 상처를 조금씩 치유하는 과정이기도 했습니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모르겠고 징그럽다”는 반응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평론가와 관객들은 점차 르동의 그림이 가진 ‘마성의 매력’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상징주의 화가’라는 꼬리표도 붙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풍경을 묘사하는 대신, 여러 상징으로 사람의 마음 속 풍경을 실감나게 묘사한다는 뜻이었습니다.
만화나 영화 등 환상의 세계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매체가 많은 요즘, 현대인의 눈에 르동의 그림은 기괴하고 조금은 유치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내면의 풍경을 그린다’는 개념은 생소했습니다. 특히 르동의 그림처럼 무의식과 인간 심리의 여러 기괴한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은 없다시피 했습니다. 독창성과 진정성을 겸비한 르동의 그림을 통해, 관객들은 저마다 자기 마음속에 사는 무의식이라는 새로운 존재를 처음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삶에 색을 입히다
미술계에서 점차 자리를 잡아가던 르동은 마흔 살이 되던 1880년 결혼식을 올립니다. 신부는 스물여덟 살의 카미유. 르동은 말했습니다. “아내에게서 나는 내 운명을 발견했다.” 카미유는 물심양면으로 르동을 든든하게 지원했습니다. 안정과 행복을 찾은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합니다. 그간 쓰지 않던 색채를 작품에 쓰기 시작한 겁니다.
1889년 아들의 탄생은 그야말로 르동의 삶과 작품을 총천연색으로 물들였습니다. 더글러스 드라윅 전 시카고미술관장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르동이 어린 시절부터 느껴온 외로움과 고립의 감정은 이 때부터 완전히 사라진다.” 그에 대한 미술계 안팎의 평가가 갈수록 좋아진 것도 르동이 색채에 도전할 자신감을 갖추는 데 영향을 미쳤습니다. 1890년대 미술평론가들은 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렘브란트, 뒤러가 갖고 있는 탁월한 독창성을 이어받았다.”
이후 르동의 변신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놀랍습니다. 르동은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잘 팔리는 그림을 모아 판화집을 여러 번 발간하고, 마케팅에 열을 올리고, 작품 수요를 조절하기 위해 자기 작품을 샀다가 팔기도 하며 열심히 돈을 벌었습니다. 예전의 르동이라면 ‘모양 빠진다’고 생각할 만한 일들도 처자식을 먹여살리기 위해서는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염세적인 백수 청년이었던 그가 누구보다도 성실한 가장이 된 겁니다.
그림이 풍기는 분위기도 확 바뀌었습니다. 몽환적인 내면과 꿈의 풍경을 그린다는 점은 같았지만, 그림은 화사하고 예뻐졌습니다. 1900년을 전후해 본격적으로 그리기 시작한 꽃 그림들은 이런 변화를 잘 보여줍니다. 험난한 환경에서 피워낸 꽃이기 때문이었을까요. 르동의 꽃 그림은 불티나게 팔려나가며 그에게 경제적인 안정을 가져다줬습니다.
미술계도 그의 변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평론가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늘날 우리 미술계는 반 고흐, 세잔, 쇠라만큼이나 르동에게 큰 빚을 졌다. 르동은 인간의 상상력을 대표하는 예술가이자 사상과 감정을 그림으로 표현하기 위해 고독한 길을 걸어온 예술가다.”
승리 선언
르동은 1914년 총천연색의 괴물 그림을 그립니다. 그리스 신화 속 외눈박이 거인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에 그리던 흉측하고 무서운 ‘흑백 괴물’ 그림과 전혀 달랐습니다.
무방비 상태의 소녀를 바라보는 키클롭스의 시선과 표정에서는 어딘가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마치 과거의 자신을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듯이. 르동은 과거 자신의 아픔까지 끌어안는 듯한 이 그림을 그리고 나서 2년이 흐른 뒤, 1916년 76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세상에서 제일 불행한 사람처럼 굴었던 옛날이 무색하게도, 노인이 된 그는 누구보다 온화하고 긍정적인 사람이었습니다. 1905년 편지에서 르동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림은 너무나도 즐거운 예술입니다. 저는 제 인생이 끝날 때까지 계속 발전해나갈 겁니다.” 1909년에는 이렇게 썼습니다. “나는 내 예술을 점점 더 좋아하게 됩니다. 다채로운 색이 특히 마음에 들어요.”
1912년에는 이렇게 편지에 썼습니다. “예술이 예술가의 인생을 표현하는 노래라면, 나는 색채로 행복한 음을 만들어냈습니다.”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나는 나의 삶을 사랑합니다!” 수많은 좌절을 겪었음에도 내면의 어둠을 마주해 모든 것을 견디고, 이겨내고, 황량한 흑백 삶의 풍경에 총천연색의 정원을 가꿔냈기에 가능했던 값진 ‘승리 선언’이었습니다.
오늘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행복한 주말 보내세요.
**이번 기사는 Odilon Redon: Prince of Dreams, 1840~1916 (전 시카고미술관장 Douglas W. Druick 지음)을 중심으로 Odilon Redon, Gustave Moreau, Rodolphe Bresdin(뉴욕 MoMA 출판), 오딜롱 르동의 자서전 To Myself: Notes on Life, Art, and Artists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과 고고학, 역사 등 과거 사람들이 남긴 흥미로운 것들에 대해 다루는 코너입니다. 토요일마다 연재합니다. 쉽고 재미있게 쓰겠습니다. 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6만여명 독자가 선택한 연재 기사를 비롯해 재미있는 전시 소식과 미술시장 이야기를 놓치지 않고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
Copyright © 한국경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한국서 고생해 번 돈인데…" MZ 외국인 근로자들 '돌변'
- 믿었던 선생님의 배신…문제 팔아 2억5000만원 벌었다
- "남는 게 있나"…다이소, 또 3만원짜리 '3000원'에 내놨다
- 바이든 믿고 공장 지었는데…"트럼프 당선되면 어쩌나" 초비상
- "입병 난 줄 알았는데…혀 절반 잘라야 한다고요" 무슨 병? [건강!톡]
- 황정음 사로잡은 농구스타는 김종규…"조심스럽게 만남" [종합]
- 정우성 "끊임없는 정치적 공격"…유엔난민기구 대사 사임
- '국민 시어머니' 지천명 앞둔 라이즈 앤톤 엄마 미모에 '깜짝'
- [속보] '아침 이슬' 김민기 별세…향년 73세
- 시청역 사고 운전자, 국과수 결과에도…"급발진" 주장 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