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한다, 강릉 사투리로
‘사투리는 못 참지!’ 특별전
국립한글박물관 10주년 기념전
퇴계 이황도 영남식 발음 유지
지방소멸 시기의 언어적 상상력
서울말로 재현된 문화 돌아보기
국립한글박물관의 기획특별전 ‘사투리는 못 참지!’(10월13일까지)는 방언과 관련된 유물과 자료를 소개하는 자리다. 400여점에 달하는 풍성한 전시품은 한글 편지, 문학 작품, 조사 기록과 옛 문헌 등의 자료와 미디어, 웹 콘텐츠를 아우른다. 방언은 그림·조각·도자기처럼 형태가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말을 쓰는 모두가 공평하게 나눠 가진 문화유산이다. 이 전시는 유물과 함께 영상과 소리를 동원해 방언이 자아내는 특유의 말맛을 생생하게 전하고, 문화유산으로서의 가치를 더욱 생생히 느끼게 한다.
“그러니요, 내 말을 똑데기 들어야 돼요!”
전시 제목인 ‘사투리는 못 참지!’의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는 못 참지’라는 유행어(사회 속 방언)를 빌려 방언이 지닌 매력을 강조하는 것이다. 한편으론 사투리 쓰는 사람을 낮잡아 보는 인식을 거부하고, 당당하게 말하고 쓸 권리를 인정하자는 제안처럼 보이기도 한다. 전시 첫 부분 소개글에서 “우리 모두는 방언 화자”라고 정의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이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선 표준어를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로 정함을 원칙으로 한다”고 정의하지만, 사실은 서울말 역시 방언의 하나라는 점을 전시는 우선 짚고 넘어간다.
20세기에 표준어라는 개념이 생겨나기 이전에도 서울말은 다른 지역의 말보다 중심적으로 자리매김했다. 18세기 후반에 역관 최기령이 쓴 일본어 교재 ‘인어대방’에는 “말을 배우더라도 경상도 사투리가 아닌 서울말로 배우도록 하라”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조선 후기 호남에서 활동했던 실학자 위백규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서울말을 본받고 지방 사투리를 비웃는 관습이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퇴계 이황이 영남식 발음을 고치지 않은 것이 매우 의미 있는 일이라고도 적었다. 언어는 지역에 따라 우열을 가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존재가 발전하고 지속되는 바탕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퇴계 이황,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율곡 이이. 지폐 속 위인들이 구사하는 실제 말씨를 상상해본 이가 얼마나 될까. 전시 한편에는 율곡이 십만양병설을 주장하는 상황을 강릉 사투리로 들어볼 수 있는 콘텐츠가 있다. “그러니요, 내 말을 똑데기 들어야 돼요!” 전시는 미디어 속에서 서울말에 기반한 표준어로만 재현되어 온 우리 역사와 문화를 새로운 각도에서 돌아보게 한다.
물론 방언을 사용했던 것은 역사책 속 위인들만이 아니다. 한글은 소리 나는 대로 적는 문자이므로, 오늘날 전하는 옛 문헌과 한글 편지에도 각지의 방언이 담겨 있다. 전남 화순의 동학농민혁명군이었던 한달문이 어머니에게 쓴 편지엔 ‘고상’(고생)이라는 전라도 사투리가, 경남 의령 출신 국어학자 이극로가 조카에게 쓴 편지에는 ‘머심아’(남자아이)라는 경상도 사투리가 쓰였다. 모던보이 백석은 평안도 사투리로, 북간도에서 태어난 윤동주는 함경도 사투리로, 김영랑은 전라도 사투리로 시를 썼다는 사실을 비로소 글자만이 아닌 억양과 소리를 입은 말맛 가득한 언어로 다시 상상하게 한다.
이 상상력은 과거만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에도 걸쳐져 있다. 언어가 계속 기억하고 사용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문화유산이라는 사실은 2010년에 유네스코가 ‘심각한 소멸위기 언어’로 지정한 제주어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지방 소멸이라는 위기에 놓인 한국에서, 과연 다른 지역 방언들은 미래에도 건재하리라고 안심할 수 있을까. 우리 시와 소설 속 아름다운 방언들에 감탄하다 보면 문득 그 언어를 나눠 쓰던 수많은 삶이 사라질지도 모르는 미래를 떠올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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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도 사투리 모아 쇼트폼으로
전시를 둘러보며 발견한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은 영상과 디자인 등을 활용하는 솜씨다. 쇼트폼 형식을 빌려 팔도 사람들의 사투리를 모은 꾸러미, 서울 토박이말과 제주어처럼 요즈음은 점점 잊히는 방언을 담은 영상, 문학 속 방언을 그래픽으로 표현한 작품 등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콘텐츠들이 20세기부터 꾸준히 이어진 방언 조사 연구의 자취들과 선명하게 이어지며 전시 주제와 시의성을 더 뚜렷하게 한다는 점이다.
이 영상들은 박물관 직원들이 전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직접 찾아다니며 수집한 자료들로 제작한 것이다. 다만 기록을 남기는 매체가 수십년 전 현지 조사에서 쓰였던 녹음 테이프나 노트 대신 영상과 시각 디자인, 애니메이션으로 변화한 것이다. 그래서 콘텐츠 하나하나는 작품을 알기 쉽게 부연하는 자료나 공간을 꾸미는 보조물이 아니라, 기록문화유산이라는 주제를 오늘날에 적합한 기록 방식으로 구현한 결과물 구실을 한다. 디자이너가 한글로 기록된 방언을 그래픽으로 표현한 작업 역시 기존 학술 연구나 조사 사업에선 시도되지 않았던 해석 방식이다. 한글과 방언 연구가 더 이상 국어국문학자만의 몫이 아니라 다양한 영역에서 폭넓게 이루어질 수 있음을 보여주는 지점이다.
박물관 전시는 여러 사람이 힘과 마음을 합쳐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래서 전시는 많이 볼수록,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한 매무새가 아닌 여러 사람이 만들고 다듬은 결이 낱낱이 눈에 들어온다. 전시 말미에는 조사를 다니고 회의를 하고 유물을 매만지는 준비 과정의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직원들이 관람객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넉넉하게 담아냈다. 이름을 다 밝히지 않고 ‘부산 사람, 이씨’, ‘홍성 사람, 김씨’로만 적었지만, 각자의 출신지 사투리로 전시에 참여한 소감과 보람을 진솔하게 적은 내용은 관람객의 마음을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박물관 사람들의 곁으로 훌쩍 끌어당겨 놓는다.
이 전시는 국립한글박물관의 10주년을 기념하는 전시다. 생물처럼 계속 살아서 변화하는 언어라는 문화유산을 다루는 10년차 박물관이 보여주는 알찬 진심은 미래를 더욱 기대하게 한다.
문화유산 칼럼니스트
박물관과 미술관의 문화유산 전시나 전통문화를 주제로 한 전시를 소개합니다. 우리 문화유산을 사회 이슈나 일상과 연결하여 바라보며, 보도자료에는 나오지 않는 관람 포인트를 짚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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