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캠핑이 시원해지는 단짠의 매력[정연주의 캠핑카에서 아침을]
매일 다른 하늘을 머리에 인 채 잠들고 깨어나는 것이 캠핑의 묘미지만, 특히 한여름에 무방비로 날것의 맨 하늘 아래 자리를 잡았다가는 인간이 얼마나 자연 앞에 나약한 존재인지 온몸으로 체험할 수 있다. 하지를 지나도 여전히 긴 태양이 새벽부터 텐트를 곧장 달구면 아무리 도심보다 서늘한 자연 속이라도 아침부터 서서히 익어가게 된다. 일부러 집을 나와 대자연에 몸을 던진 것은 우리지만 안전하게 여름을 즐기려면 대책이 필요한 법. 텐트 캠퍼라면 열기와 벌레, 빗방울로부터 텐트와 사람을 보호하는 가림막인 타프가 필수, 그리고 타프를 칠 수 없는 캠핑카 캠퍼를 비롯해 모두에게 중요한 것이 바로 나무 그늘이다.
캠핑장에서 울창하게 우거진 나무는 조경에도 중요한 역할을 하지만 각 사이트를 구분하는 표지판, 설거짓감과 빨래를 널어놓는 빨랫줄과 해먹을 매다는 기둥은 물론 선풍기만으로 여름을 날 수 있게 하는 그늘막 역할을 톡톡히 수행한다. 나무 그늘이 있는지 혹은 없는지, 그리고 어떤 방향으로 드리우고 몇 시간 동안 그늘을 제공하는지에 따라 그날의 캠핑을 얼마나 쾌적하게 즐기고 좋은 추억으로 남길 수 있을지가 정해진다. 이 때문에 캠핑장 내의 사이트마다 나무의 위치와 구성이 다르다면 매의 눈으로 동서남북을 관찰해 가장 그늘이 오래 넓게 머무는 곳을 고르는 것이 일이다.
아침부터 서서히 익어가는 여름
안전한 캠핑을 위한 대책은 필수
뙤약볕 가려주는 나무 그늘 아래
수박에 페타치즈 곁들인 맛이면
무더위로 잃은 활기 빠르게 회복
지난 캠핑에도 나무 그늘 바로 아래 캠핑카를 댔다. 뒤축에서 뻗어 나온 굵은 가지가 드리운 그늘이 벙커 침대가 자리한 운전석 앞 즈음까지 길게 드리워, 새벽부터 차 뚜껑이 뜨겁게 달궈질 걱정이 없는 든든한 나무였다. 내일은 길 건너 개울가에 가서 다슬기를 잡고 물놀이를 하고 수박을 썰어 먹으리라, 휴일답게 대충 허술한 계획만 세우고 잠자리를 정돈하던 우리는 갑자기 뚜렷하게 지붕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놀라 일시정지 상태가 되었다. 똑 또그르르르. 또도독 또그르르르. 쥐인가? 벌인가? 벌레인가? 겁을 먹고 자라목이 되어 문을 빼꼼 열어보자 실소가 나왔다. 범인은 나무 한가득 열려 있던 초록빛 열매였던 것이다.
아이들 장난감 구슬보다 자그마한 열매가 얼마나 땅땅한지, 그리고 바람도 잘 불지 않는데 얼마나 자주 떨어지는지 밤새 마치 지붕을 두들기는 빗방울처럼 또그르르 굴러가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마치 딱따구리가 잠꼬대를 하는 나무줄기 속에서 잠드는 기분이었다. 다음날 아침, 미리 깔아 놓은 피크닉 매트 위로 잔뜩 떨어진 이름 모를 열매를 치우다 마주친 캠핑장 사장님께 이 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물어봤다. 그러자 예상치 못한 답이 들려왔다. 봄이면 마치 파스타 위로 눈꽃처럼 소복하게 쌓인 치즈처럼 곱게 피어나는 흰꽃으로 이름난 이팝나무라는 것이 아닌가!
조금 부끄러웠다. 원래 나이가 들면 꽃 사진을 찍기 시작한다고들 하지만 난 원래 초등학교 때부터 꽃만 보면 사진을 찍는,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팝나무, 자귀나무, 배롱나무에 모과나무. 살아온 동네 곳곳의 꽃나무라면 잘 알고 있다고 멋대로 넘겨짚었지만 사실 화사한 꽃이 지고 난 이후의 나무의 모습에 대해서는 일절 알고 있지 못했구나. 잠깐 좋은 순간을 즐겼다 잊었을 뿐이구나. 아마 이제 꽃이 진 이팝나무라 하더라도 무심코 지나칠 일은 없을 것이다.
그날은 미처 가을을 맞이하지 못할 열매를 후드득 떨어뜨리는 이팝나무가 뙤약볕을 가려주는 가운데 느긋한 낮시간을 보냈다. 한여름 대낮의 캠핑장은 생동감 넘치고 떠들썩할 것 같으나 의외로 고요하다. 다들 개울가로 수영장으로 떠나 땀을 식히거나 더위가 한풀 꺾일 때까지 최소한의 움직임만 유지하며 휴식하는 중이기 때문이다. 다들 이 띠약볕에서 살아남으려면 물놀이와 시에스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아챈다. 어차피 오후 느지막한 시간이 되면 갑자기 조금 숨쉬기 편한 온도의 바람이 불어오고, 저절로 가볍게 몸을 움직이게 되니까. 억지로 버티지 않고, 기력을 짜내지도 않고, 자연의 변화에 순응하며 즐기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수박에 ‘단짠’의 매력이 특출나다는 것을 깨달은 것도 더위 덕분이다. 원래 그리스와 튀르키예, 이집트 등지의 지중해 국가에서는 차갑고 달콤한 수박에 짭짤한 양젖 페타 치즈를 곁들여 샐러드 등을 만들어 먹는다. 초등학교 시절 김춘수의 시 ‘차례’를 배웠을 때는 수박 살에 소금을 조금 발라 드리고 싶다는 말이 그리도 어색했다. 나이가 든 이후에도 어느 고장엔가에는 그리 먹는 사람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 직접 시도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에어컨 대신 그늘 아래 자연 바람으로 흐르는 땀방울을 말리는 여름 캠핑을 통해 깨닫고 만 것이다. 갈증을 해소하고 탈수를 막아주는 달콤한 수박에 짭짤한 페타 치즈의 조합은 잃어버린 미네랄과 염분을 보충하는, 한여름의 신체가 본능적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는 맛이라는 것을.
페타 치즈는 보통 잘게 부서지는 질감이라 수박을 깍둑 썰어 그 위에 양념과 함께 올려 먹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단짠의 매력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더 부드럽고 진한 맛을 느끼고 싶다면 튀르키예식 차지키를 먹을 때처럼 소스나 딥의 형태로 만드는 것이 좋다. 페타를 잘게 부순 다음 그리스식 요구르트나 사워크림, 소량의 다진 마늘(의외로 잘 어울린다), 후추와 레몬즙 등을 넣고 곱게 잘 섞는 것이다. 캠핑장에 믹서를 들고 다니는 사람은 없을 테니 포크 등으로 곱게 으깨는 것으로 충분하다. 페타 덩어리가 잘게 남아 있으면 가끔 씹히면서 뚜렷한 짭짜름함을 선사해 그 또한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페타가 충분히 짠맛을 내니 소금을 추가할 필요는 없다.
하얀 페타 소스가 준비되었다면 접시에 넓게 펴 발라보자. 그리고 그 위에 깍둑 썰거나 동글동글하게 파낸 수박을 수북하게 얹는 것이다. 딜이나 민트 등 화한 매력의 허브가 있다면 잘게 뜯어서 뿌려도 좋다. 수박은 껍질째 썰어서 찍어 먹게 해도 좋지만 한 입 크기로 썰어 딥에 얹어 내면 포크로 깔끔하게 딥을 닦아내듯이 먹을 수 있다.
수박으로 페타 딥을 떠서 입안에 넣으면 달콤한 수박즙과 함께 짭짤한 페타의 유제품 풍미가 퍼지며 서로 끝없이 어우러진다. 비 내리는 장마철의 수박이라 조금 덤덤한 맛이 난다 해도 입안에서 터지는 페타가 침샘을 자극하며 갈증을 해소시키는 중독적인 단짠의 궁합을 보여준다. 땡볕이 빼앗아간 활기를 이온음료만큼 빠르게 회복시킨다. 한여름의 캠핑이나 물놀이를 계획하고 있다면 페타 소스와 동글동글 파낸 수박을 각각 아이스박스에 담아 신나게 논 후에 입에 쏙 넣을 수 있게 준비해보자. 여름에는 수분과 염분이 우리를 살린다는 느낌을, 과연 수박 살에 소금은 조상의 지혜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계절의 미식이다.
▶수박 페타 샐러드
재료
수박 1/4통, 딜 또는 민트, 페타 딥 소스(페타 치즈 150g, 사워크림 또는 그리스식 요구르트 3~5큰술, 다진 마늘 1/2쪽 분량, 레몬즙과 후추 약간씩)
만드는 법
1. 페타 치즈를 잘게 부수고 나머지 딥 소스 재료를 넣어 곱게 으깨며 섞는다. 레몬즙과 후추를 취향에 맞춰 넣는다. 농도는 사워크림이나 요구르트로 조절한다.
2. 접시에 페타 딥 소스를 바르고 그 위에 원하는 모양으로 썬 수박을 올린 다음 딜이나 민트를 뜯어서 뿌린다.
■정연주
캠핑 다니는 푸드 에디터, 요리 전문 번역가. 르 꼬르동 블루에서 프랑스 요리를 공부하고 요리 잡지에서 일했다. 주말이면 캠핑카를 타고 떠나는 맛캠퍼로 ‘캠핑차캉스 푸드 라이프’ 뉴스레터를 발행한다.
정연주 푸드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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