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탄한 스토리에 빨려든다…영화 속 주인공처럼 탈출하라! [ESC]
극적인 상황 설정된 방, 60~90분간 단서 찾아 문제 풀며 탈출하는 게임
공포·추리·코믹 등 다양한 주제…전문배우 등장 ‘극강의 몰입감’ 진화 중
런닝맨 출연자처럼 ‘대리만족’…조직 결속 다지는 워크숍 행사로도 주목
눈을 감고 직원의 지시에 따라 어두운 방으로 들어섰다. “당신은 영국 런던의 한 술집에 와 있습니다.” 무거운 내레이션이 들렸다. 어두운 조명에 잔뜩 긴장하며 눈을 떴다. 눈앞의 작은 텔레비전 화면에 상황 설명이 나타났다. 영상을 보니, 런던이 누군가에게 정복당했다!
영상 속에서 한 꼬마가 ‘나’의 주머니 안에 뭔가를 집어넣고 홀연히 사라진다. ‘영상 속의 내’가 주머니를 뒤적여보니 황급히 누군가 갈겨쓴 듯한 메모가 있었다. “Today, 8 PM.” 이후 내가 서 있는 방 장치들에 하나둘 불이 켜졌다. 나는 술집에 들어와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고급스러운 인테리어가 눈에 띄었다. 본격적으로 게임이 시작됐다. 거리의 간판이며 음악이며 진짜 런던에 와 있는 듯 순식간에 몰입됐다.
안대 쓰고 들어가는 방
혼란스러워하고 있던 찰나, 방 한편 스피커에서 추가 설명이 흘러나왔다. “악당들이 런던을 공격했다. 그들은 런던에 있는 고급 에너지원을 약탈 중이다. 소량으로도 엄청난 동력을 내는 그 에너지원을 악당들이 혈안이 되어 찾고 있다. 약탈자들로부터 에너지원을 지켜라.”
주변을 둘러보니 자물쇠가 채워진 서랍들이 군데군데 있었다. 당혹스럽다. 벽에 힌트인 듯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벽면 무늬, 거리의 간판까지 단서가 될까 싶어 샅샅이 살펴보고 추리했다. 그때, 문이 덜커덩 열렸다. 다음 방에서도 주어진 힌트를 조합해 퀴즈를 푸니, 다른 방으로 이어지는 다른 단서가 또 나왔다.
여기저기 단서를 찾았더니 이번에는 정체 모를 기계 하나가 등장한다. 기계에는 이상한 기호의 버튼이 여러개 있다. 도대체 이게 뭔가. 한참 생각했다. 모르겠다. 정답을 알려주는 찬스를 썼다. 문제마다 일련번호가 적혀 있는데, 그걸 사전에 제공받은 스마트폰 앱에 입력하면 정답을 알 수 있다. 마지막 방까지 모두 문제를 풀며 방을 탈출했고, 마침내 악당들로부터 런던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지난 10일 서울 마포구 홍익대 주변 ‘지구별 방탈출’ 카페를 체험했다. 탄탄한 스토리와 단서를 숨겨놓은 화려한 미디어 장치들에 넋을 잃고 문제를 풀어가던 과정에서 누군가 게임에 등장하며 긴장도를 높이기도 했다. 가상과 현실을 넘나들며 단서를 찾고 수십개의 문제를 풀다 보니, 어느덧 내게 주어진 90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이런 ‘극강의 몰입도’라는 매력 덕분에 “한편의 영화를 본 것 같은 느낌” “길게는 1시간 반에 1인 3만원에 달하는 금액이 결코 아깝지 않은 체험” 등등의 평가가 뒤따른다. 방탈출 앱이나 동호회 인터넷 카페에 올라오는, 웬만한 유명 영화 감상 후기 못지않은 반응들이다.
방탈출 게임은 밀폐된 공간에서 주어진 단서로 실마리를 찾으며 제한된 시간 안에 방을 탈출하는 게임이다. 2015년 무렵부터 서울 홍대입구·강남역 인근에서 문을 열기 시작해 지금은 전국으로 확대됐다. 방탈출 예약 플랫폼 ‘빠방’에 따르면 현재 전국에는 422개의 방탈출 카페가 성업 중이다. 방탈출 카페의 테마는 ‘수상한 병원’ ‘여신의 눈물’ ‘비밀의 가족’ ‘구미호’ ‘선택받은 자’와 같이 공포·추리·코믹 등 매우 다양한 상황 설정으로 구성된다. 한 카페당 대개 2~8개 정도의 테마를 운영한다. 보통 2~3명이 방탈출 카페의 테마방으로 들어가 문제를 푼다. 1시간에서 길게는 90분 동안 단서를 찾아 자물쇠를 열고 모스부호 같은 암호를 해독하며 문제나 수수께끼도 풀어야 한다. 한 공간 안에 주어진 3~4개의 단서를 조합하면 다른 방 문이 열리고, 또 다른 방으로 이동해 거기서도 단서를 찾아 최종 탈출하게 된다. 원래는 방 한칸에서 모든 게임이 종결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최근에는 방 여러개를 넘나들기도 한다. 60~90분에 요금은 1인당 2만2천~3만원 정도다. 예전에는 방탈출이 젊은층과 소수 마니아 위주의 취미생활이었다면, 최근에는 남녀노소 모두 즐길 수 있는 ‘몰입형 체험공간’으로 변모하고 있다.
‘지구별 방탈출’ 카페는 총 6개의 테마를 운영하고 있다. 방탈출 전문 기획자 이상민(41)씨는 이 중 4개의 테마를 기획했다. 테마 1개를 설계하고 완성하는 데 1억원 넘는 비용이 들고 1년이 걸린다. 이씨는 “방탈출 설계는 최근 트렌드를 게임에 녹여내면서도 스토리를 탄탄하게 전개하고, 기술적으로 허점 없이 진행해야 하는 까다로운 작업”이라고 했다. 시간과 비용이 많이 들어간 만큼 방탈출 게임은스토리·문제 유출이 엄격히 통제된다. 게임 시작 전에 게임 시놉시스를 제외한 스토리, 문제, 방 개수, 방의 넓이 등을 외부에 유출하지 않겠다고 서약해야 한다. 스마트폰도 입구 쪽에 보관해야 하고, 입장할 때도 안대를 쓰거나 눈을 감고 들어간다.
꽃길 vs 흙길…1천개 ’방탈출’ 경험자도
방탈출을 엄연한 ‘인생 취미’로 삼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방탈출 카페도 점차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10여년 전 경험했던 이들이 요즘 방탈출을 체험한다면 그야말로 격세지감을 느낄 수 있다. 방탈출이 처음 유행하던 약 10년 전의 ‘1세대 방탈출’ 게임은 매우 폐쇄적이었고 오직 ‘탈출’만이 목표였다. 방을 탈출하는 데 중요한 단서가 되는 ‘힌트’도 사용 횟수에 제한이 있었고, 그마저도 제한시간이 끝나면 게임을 중단하고 방을 나와야 했다. 하지만 최근에는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힌트를 무제한으로 쓸 수 있다. 게임 공간과 방탈출 카페의 큰 로비 공간을 자유롭게 오가며 문제를 풀기도 한다. 중요한 건 탈출이 아닌 스토리 체험이다. 방탈출 카페에선 누구나 영화 속 주인공이나 ‘런닝맨’ ‘무한도전’ 출연자가 될 수 있다.
방탈출 마니아층이 넓어지면서 전국의 방탈출 카페 테마와 리뷰 수, 별점을 공유하는 코로리방탈출이라는 사이트도 생겼다. 방탈출 체험자들이 평가한 난이도는 물론, 지역별·테마별 인기 순위가 실시간으로 매겨진다. 방탈출 체험자들은 잘 만든 게임은 ‘꽃길’, 스토리가 허술한 게임은 ‘흙길’이라고 부른다. 기획자들은 체험자들의 적나라한 평가를 접하며 더 ‘진짜 같은’ 방탈출 게임을 만들어내기 위해 고민한다.
최근에는 몰입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 ‘진짜 사람’을 방탈출 카페 장치처럼 활용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전문 배우들을 스토리 속 역할에 투입해 현실감을 높이는 것이다. ‘공포’ 장르에서 귀신 분장을 한 배우가 등장해 공포감을 극대화하거나, 추리물에서 배우들이 형사 연기를 하는 식이다. 게임의 클라이맥스에서 연극의 한 장면처럼 눈물을 쏟으며 연기하는 배우도 있다. 게임에 참여한 이들은 이런 순간에 더 극적으로 몰입하게 된다.
2019년부터 회원 수 40여명의 방탈출 동호회 ‘집’(ZIP)을 운영해온 백단비(33) 팀장은 “평소엔 직접 체험할 수 없는 일들을 진짜처럼 경험하며 대리만족을 느낀다”고 요즘 방탈출의 매력을 설명했다. 이 동호회에는 방탈출 테마 1천개를 경험한 회원도 있다. 800개의 방탈출 테마를 경험한 백 팀장은 “동호회 활동을 처음 시작한 2019년과 비교하면, 방탈출은 이제 문제풀이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도 마치 영화를 한편 보러 가듯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취미생활로 대중화한 것 같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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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지를 찾아라’ 야외로도 확장
최근의 ‘2세대 방탈출’ 게임은 한정된 공간인 방에서 벗어나 야외로도 공간을 확장하고 있다. 지난 13일 찾은 서울 홍대입구의 야외 방탈출 게임 업체에는 무더운 날씨에도 게임을 즐기려는 이들로 붐볐다. 좁은 방이 아닌 홍대입구 인근의 길거리가 게임의 무대다. ‘만약 당신이 길을 잃었다면’이라는 주제로, 태블릿피시를 활용해 일대의 건물과 공원, 지형지물을 활용해 목적지를 찾아가는 게 목표다. 이 게임을 개발한 이스케이퍼스의 원영민(33) 사장은 “야외 방탈출이 진행되는 곳은 벚꽃길로 유명한 거리”라며 “연인과 데이트하고, 친구와 밖에서 산책하듯이 여유 있게 커피 한잔하며 즐겁게 퀴즈를 푸는 시간이 되길 바랐다”고 설명했다.
방탈출은 단순한 취미와 오락에 머물지 않고 조직의 친목을 다지는 용도로도 각광받고 있다. 방탈출 게임 기획·제작 업체인 키이스케이프는 지난 5월, 에스케이이엔에스(SK E&S)의 임직원 워크숍에서 방탈출 행사를 접목해 눈길을 끌었다. 같은 건물에 근무하면서도 직원들끼리 서로 어떤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는 점에 착안해 서로를 소개하고, 그 정보를 바탕으로 방을 탈출하는 방식의 워크숍 프로그램을 진행해 호응을 얻은 것이다. 에스케이이엔에스 쪽에서는 “틀에 박힌 지루한 워크숍이 아니라, 임직원이 능동적으로 즐겁게 참여해서 뜻깊은 행사였다”는 평가를 보내왔다. 키이스케이프 방탈출 크리에이터 서민주(26)씨는 “함께 문제를 해결하며 결속력이 높아지고, 그 과정에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경우가 많아 많은 기업들의 방탈출 워크숍 문의가 이어지고 있다”고 말했다.
장선희 자유기고가
“영화감독처럼 연출…‘한방’에 만족시켜야”
방탈출 기획자 서민주씨
‘도대체 누가 설계한 걸까.’ 방탈출 게임을 해본 사람이라면 절로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짧게는 6개월에서 길게는 1년이 넘는 시간 동안 스토리를 설계하고, 기계 설비팀과의 협업을 통해 하나의 방탈출 테마를 탄생시킨다.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강남대로 방탈출 게임 제작 회사인 키이스케이프 사무실에서 방탈출 크리에이터 서민주(26)씨를 만났다.
―방탈출 게임 기획을 시작하게 된 계기는?
“방탈출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을 정도로 마니아였다. 게임을 할 때마다 언젠가는 내가 직접 실제 게임을 만들어보겠다는 욕구가 커졌다.”
―방탈출 게임 하나가 탄생하기까지의 과정은?
“요즘 방탈출은 문제풀이 중심의 예전과 달리 스토리 위주다. 게임 제작 과정은 영화감독의 작업과 비슷한 것 같다. 게임 한편을 끝까지 이끌기 위해 수많은 장면을 생각하고 연출한다. 방탈출에 처음 관심을 가졌던 5년 전만 해도 ‘미치광이 과학자 집에 잡혀왔다’ ‘살인마로부터 빠져나와라’ 등의 간단한 한줄 스토리로 게임이 진행됐다면, 지금은 탄탄한 스토리 고안에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스토리가 완성되면 ‘이곳에 물건을 놓으면 어디에 불이 켜지게 해달라’처럼 원하는 전개를 기술 설비팀과 논의해 나의 상상을 현실화한다.”
―현장에서 느끼는 방탈출 게임의 인기는?
“‘명작’으로 소문난 인기 게임의 경우 웬만한 아이돌 ‘티케팅 전쟁’ 못지않게 예약 경쟁이 치열하다. 일부 인기 테마를 지닌 방탈출 카페의 경우 매주 일요일 밤 12시에 예약을 오픈하기도 하는데, 단 몇초 만에 일주일치 모든 시간 예약이 마감되곤 한다.”
―방탈출 기획의 매력은?
“방탈출은 한번 다녀간 고객이 다시 똑같은 방을 찾지 않는다. 그들을 ‘한방’에 만족시켜야 한다. 방을 나서는 사람들은 마치 잘 만든 영화 한편 감상한 듯한 표정을 짓곤 한다.”
장선희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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