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미술관의 백미 희원(熙園) [이한빛의 미술관 정원]
[용인=뉴시스] 이한빛 미술칼럼니스트 = 경기도 용인. 서울에서 1시간 남짓 가야 도착할 수 있는 이 미술관은 거리의 압박에도 관객이 끊이질 않는다. 최근에 호암미술관을 찾는 인원이 늘어난 것은 김환기 대규모 회고전, 불교미술 전시처럼 학예사의 오랜 연구를 바탕으로 촘촘하게 짜인 전시의 위력이기도 하다. 그러나 호암에 한 번이라도 가 본 사람이라면, 다음번 방문을 계획할 때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미지는 바로 미술관 앞의 정원, 희원(熙園)이다.
삼성그룹 창업주의 미술관, 호암미술관
호암은 개관사에서 “개인의 소장품이라고 하나, 우리 민족의 문화유산이기때문이다. 이것을 영구히 보존하여 널리 국민 누구나가 쉽게 볼 수 있게 전시하는 방법으로는 미술관을 세워서 공영화하는 것이 최상책”이라고 밝혔다. 호암이 우리 문화 유산을 지켜야한다며 공격적으로 문화재를 사들인 것은 유명하다.
현재 리움에서 전시하고 있는 ‘청자동채연화문표형주전자’(국보133호)는 호암의 투 톱 컬렉션 중 하나로 꼽힌다. 이 주전자는 전 세계에 딱 석 점이 있는데, 하나는 서울에 다른 하나는 독일 함부르크 공예미술박물관에, 나머지 하나는 미국 워싱턴 D.C.의 스미스소니언국립아시아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호암이 이 주전자를 컬렉션하고 싶어 백지수표를 주고 사들였다는 이야기도 있고, 한옥 두 채 값을 지불했다는 설도 있다. 개관 당시 2층 전시실에 30mm방탄유리로 쇼케이스를 만든 것도 이 주전자 때문으로 전해진다. 또 다른 대표 컬렉션으로는 고려불화 ‘아미타여래삼존도’(국보 218호)가 있다. 일본으로 유출됐던 문화재를 사들여 환국한 사례로 꼽힌다.
호암의 수집 열정은 이건희 전 삼성전자회장에게도 이어졌다. 합리적인 가격에 좋은 작품을 수집했던호암과 달리, 이건희 전 회장은 명품주의에 방점을 두었다고 평가된다. ‘국보 100점 수집 프로젝트’, ‘특급이 있으면 컬렉션 전체의 위상이 올라간다’며 좋은 작품은 값을 따지지 않고 구입해 쉽게 넘볼 수 없는 국보급컬렉션을 만든 것. 한국을 대표하는 미술관으로 꼽히는 리움은 이 같은 집념의 컬렉션에서 시작했다.
호암미술관은 호암의 고미술 사랑에서 출발했지만, 개관전은 의외로 현대미술전으로 꾸려졌다. 바로 ‘헨리무어 조각 초대전’이다. 당시 영국 최고 추상조각가였던 헨리 무어의 작품을 소개한 것이다. 호암의 ‘우리나라 미술계가 세계에 근접한 수준으로 올라왔으나, 조각은 아직 미흡하기에 헨리 무어의 조각전이 배움의 장소가 되면 좋겠다’는 의지를 반영해 기획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후에도 고미술, 근현대미술을 폭넓게 다루며 기획이 돋보이는 전시를 이어갔다. 1987년에는 호암이 개인적으로 컬렉션한 1167점(국보/보물 10여점 포함)을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하기도 했다. 컬렉션에 기반해 ‘조선백자전’, ‘민화걸작전’을 선보였고 이후 백자나 민화전을 준비하는 전시기획자나 학예사들 사이 꼭 공부해야하는 ‘원조’전시로 꼽힌다.
호암의 앞마당, 그곳에 자리한 정원
그러다 1997년 호암미술관 개관 15년과 유네스코 ‘문화유산의 해’를 기념해 희원을 조성했다. 미술관으로 들어오는 길은 길게 우회하는 형태로 변형됐다. 희원을 조성한 배경에는 한국의 전통 정원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다는 분석이다. 창덕궁 후원, 경복궁 정원, 안압지, 광한루원 등 우리 정원은 꽃과 나무를 감상하며 산책하는 곳에 그치지 않고 때로는 군사훈련을 위한 장소로, 연회장소로, 선비들의 문무를 겨루는 장소로 쓰였다. 차경(借景∙경치를 빌려오다)도 우리 정원을 일본과 중국의 그것과 다르게 하는 요소다. 낮은 돌담과 작은 연못들을 품은 희원은 이 같은 한국 정원의 특징을 그대로 가지고 있다.
약 2만여평(6만 6000㎡)규모인 희원의 시작은 보화문(葆華門)이다. 얇은 회색 벽돌이 층층이 쌓여깔끔하면서도 안정감을 준다. 덕수궁의 유현문을 본떠 전돌을 쌓아 올린 문으로, 인간의 예술을 보호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보화문을 시작으로 정원에 들어서면 매화나무 숲과 크고 작은 벅수(석상)이 길을 안내한다. 모두 쌍으로 놓인 크고 작은 벅수들은 멀리는 신라시대로 연대가 올라간다. 장군처럼 꽤나 크고 잘생긴 것들부터 동자승처럼 작고 귀여운 것들까지 저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제각각 모양새를 하나 하나 뜯어보다보면 절로 웃음이 난다. 미술관안의 국보급 불상에는 못미칠지모르나, 투박하고 자연스러운 그리고 때로는 익살스런 모습에서 드러나는 미감이 수준급이다.
세심한 높낮이 조절, 걸어가면 풍경이 바뀐다
주정을 바라보는 정자는 ‘호암정’이다. 사방 창호문이 달린 정자로, 창 사이로 보이는 풍경이 매력적이다. 특히 가을엔 정자의 창 너머로 보는 단풍이 일품이라 관객들의 포토스팟이기도 하다. 밖의 경치를 빌려온다는 ‘차경’의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그러나 사실 차경은 이곳 호암정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희원 전체가 차경의 원리에 의해 구성됐다. 맨 위에 미술관이 있고 아래로 계단식으로 낮아지는 희원은 담의 높이, 석벽의 높이, 계단의 높이를 세심하게 조율해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보는 풍경이 확 달라진다.
특히 미술관 바로 앞 양지바른 잔디밭에서 바라보면 정원이 보이지 않는다. 가까운 정원은 숨고 멀리 호수가 바로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느껴진다. 호수의 잔잔한 물결이 만들어내는 질감을 더 자세히 보려 걸음을 옮기면 그제야 비로소 정원이 드러난다.
정원에서 위를 올려다 보아도 마찬가지다. 높은 석담과 초목, 낮은 담장에 가려 미술관 기와지붕이 나타났다 사라졌다를 반복한다. 희원은 건축사 조성룡이 디자인했고, 한국의 1세대 조경가이자 최초의 여성 기술사인 정영선이 참여했다. 이제는 그 가치를 헤아리기도 벅찬 문화재가 모인 곳이 호암미술관이라면, 미술관처럼 빛나는 정원, 그곳이 희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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