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진 미국을 하나로’… 오피니언 리더 1000명 모였다
로키산맥이 솟은 산악 지대로 유명한 콜로라도주 중서부에 인구 6000명에 불과한 소도시 애스펀이 있다. 그 흔한 맥도널드나 스타벅스 같은 프랜차이즈 가게도 찾아볼 수 없는 시골이다. 이곳이 매년 여름이면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룬다. 미국 싱크탱크 애스펀연구소가 주최하는 연례 회의인 ‘애스펀안보포럼’에 참석하려는 이들이다. 올해로 15회를 맞은 애스펀안보포럼은 미국과 세계 주요 국가의 전현직 고위 관료와 학계 인사들이 모여서 당면한 세계 안보 문제에 대해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는 행사다. 올해 포럼 기간(16~19일)은 공교롭게도 공화당 전당대회(위스콘신주 밀워키·15~18일)와 대부분 겹쳐서 예년에 비해 썰렁할 수 있다는 우려도 있었지만 기우였다.
미국 외교 안보 라인의 실세인 토니 블링컨 국무장관, 제이크 설리번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찰스 브라운 합참의장을 비롯해 1000여 명이 참석했다. 응엥헨 싱가포르 국방장관은 “밀워키에서 공화당 전당대회가 열리고 있어 솔직히 누가 올까 집사람과 걱정했는데 기우였다”며 “올 사람들은 다 여기 있었다”고 말했다.
포럼 기간 애스펀 시내 호텔의 1박 요금은 600달러(약 83만원)가 넘었고, 공항에서 시내로 가는 왕복 4차선 도로는 5㎞를 이동하는 데 1시간 가까이 걸릴 정도로 체증이 심했다. 한 식당 종업원은 “이맘때면 늘 벌어지는 일”이라고 했다. “대화를 통해 미국과 세계가 직면한 중요한 도전 과제들을 해결하겠다”는 주최 측 사명에 공감한 사람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이다. 대만의 한 전직 정치인은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서 여기까지 왔다”고 했다.
◇ 천혜 자연환경 속 대화 집중… “동의 안해도 서로 존중”
엘크 산맥 중턱에 자리 잡은 포럼장이 사슴·흑곰 같은 야생동물도 심심치 않게 보이는 천혜 자연환경을 자랑하는 점도 참가자들에겐 기꺼이 수고를 감수할 이유가 된다. 대머리수리·송골매 등 맹금류를 눈앞에서 관찰하는 ‘버드 아우팅(Bird Outing)’ 등 주변 자연환경을 활용한 다양한 야외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포럼을 기획한 ‘애스펀전략그룹(ASF)’의 공동 의장인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교수는 “생각이 달라도 귀를 기울이고 얘기가 통할만한 인사들을 섭외하는 것이 원칙”이라며 “입지의 이점을 활용해 등산·낚시 같은 활동을 함께하도록 설계했다. 정치적 고정관념을 뛰어넘어 우정을 쌓을 수 있게 만드니 동의하지 않더라도 존중은 하는 분위기가 형성됐다”고 했다. 나이는 “이라크 전쟁으로 미국 여론이 양분돼 갈등이 극심했을 때 (전쟁 설계자인) 딕 체니 부통령이 와서 래프팅을 했다”고도 자랑했다. 민주당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국방부 차관보를 지낸 나이와 함께 공동 의장을 맡은 이가 공화당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외교 사령탑 콘돌리자 라이스 전 국무장관이다.
라이스의 보좌관 출신인 안야 마누엘 총괄 디렉터는 “스트롱맨을 찬양하고 상대방의 증오를 부추기는 세상이지만 중도에 있는 다수의 차분한 목소리가 더 중요하다고 믿는다”고 했다. 마누엘의 조부는 2차 세계대전 때 연합군의 반대 편에서 싸웠다고 한다. 그는 “포퓰리스트들이 선동하고 증오를 부추겨 벌어진 비극적인 일”이라며 “대화로 세상을 바꾼다는 것이 개인적으로도 의미 있다”고 했다.
◇ 외교·안보부터 우주까지 총망라… “정쟁은 국경에서 멈춰”
50여 세션으로 구성한 이번 포럼은 전통적 주제인 외교·안보는 물론 최근 국제사회의 핵심 현안으로 떠오른 에너지, 우주, 인공지능(AI) 등 다양한 주제를 망라했다. 세션마다 가장 많이 나온 말은 “당신의 의견을 존중한다” “현실 정치에 관한 평론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17일 마크 에스퍼 전 국방장관과 제이 존슨 전 국토안보부 장관의 대담이 대표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버락 오바마 정부 내각에서 각각 일한 두 사람이 나흘 전 발생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피격’ 사건을 놓고 토론했다.
워싱턴 정가에선 가장 폭발성 있는 주제지만 두 사람은 특정 주체의 책임을 묻고 따지는 대신 “갈수록 끔찍해지는 정치 담론, 황폐화된 정치 공론장이 가장 큰 문제다” “피격 사건 후 난무하는 음모론에 좌든 우든 먹이를 줘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존슨은 “우리는 많은 부분에서 동의하고 같은 가치관을 갖고 있는 것 같다”며 “이런 말을 해서 공화당 정부가 당신을 블랙리스트에 올리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농담했다. 에스퍼는 “나도 당신을 사랑한다”고 화답했다.
이곳에선 ’정쟁(政爭)은 국경에서 멈춘다’는 격언을 실감할 수 있다. 16일 개회 직후 열린 ‘중국의 도전’에 관한 세션에선 바이든 정부의 대중(對中) 산업 정책을 총괄하고 있는 앨런 에스테베스 상무차관, 트럼프 정부 때 미·북 대화를 담당한 스티븐 비건 전 국무부 부장관이 머리를 맞댔다. 비건은 “미국 내 중국 유학생은 30만명인데 중국 내 우리 유학생은 1만5000명밖에 되지 않는다”며 “심각한 차이고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미·중 경쟁이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뤄지려면 중국을 더 잘 아는 젊은 사람이 지금보다 많아야 한다”고 했다. 에스테베스가 여기에 맞장구를 치며 “젊은 사람들이 중국 관련 커리어를 밟으면 정부에 취업을 못 하고 불이익을 받을 거라 생각하는데, 해소돼야 한다”고 했다.
◇ 유수 재단, 큰손 등이 기부해 만들어진 공론장
이런 공론장이 매년 만들어질 수 있는 건 취지에 공감한 기업과 시민사회, 독지가들의 자발적 기부가 있기 때문이다. 현장에는 포드·록펠러·게이츠 재단 등 연구소에 매년 큰돈을 기부하는 유수 기금 관계자들이 자리를 지켰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최측근인 크리스 쿤스 민주당 상원의원, 미치 매코널에 이어 상원 원내대표 자리를 노리는 존 코닌 공화당 의원 등은 와이셔츠를 걷어붙이고 행사장을 다니며 연사들 발언에 귀를 기울였다. 외교·안보 분야의 차세대 재목을 선발해 학비를 후원하는 장학 프로그램 ‘영 라이징 리더’ 수혜자 30여 명도 사흘 내내 행사장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 프로그램 역시 헤지펀드 거물인 레이 달리오 브리지워터 창업자 등이 기부해 성사된 것이다. 대니얼 포터필드 애스펀연구소 대표는 “전날 12시까지 술을 마시고도 다음 날 아무렇지 않게 나타나 행사장 앞줄에 앉아있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이 젊은이들이 미국의 미래이자 전략 자산”이라고 했다.
◇ ☞애스펀 연구소 (Aspen Institute)
미국의 사업가인 월터 펩키가 1949년 콜로라도주 애스펀에 설립한 비영리단체다. 시카고 출신으로 애스펀의 자연경관에 감동한 펩키가 세계의 리더들이 일상에서 벗어나 토론을 하는 아이디어를 구상한 것에서 비롯됐다. “대화와 리더십을 통해 미국과 전 세계가 직면한 가장 중요한 도전 과제들을 해결하겠다”는 것이 운영 취지다. 정치 구도에서 한 발짝 물러나 다양한 사람이 모여서 토론하도록 주선하는 초당적 주관자를 지향한다. 경제·교육·환경 등 30여 개 분야서 각 프로그램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는데, 2010년부터는 매년 전 세계 외교·안보 전문가들이 국내외 문제를 논의하는 ‘애스펀안보포럼’을 개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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