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극기 처음 휘날린 1948년 런던올림픽의 감격
[전봉관의 해방 거리를 걷다]
광복 후 첫 하계 올림픽 출전
가는 길은 험난했다
한국 선수단이 처음 참가한 하계올림픽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보름 앞두고 개막한 제14회 런던올림픽(1948년 7월 29일~8월 14일)이었다. 1940년 제12회 도쿄올림픽, 1944년 제13회 런던올림픽이 제2차 세계대전으로 취소되는 바람에 제14회 런던올림픽은 1936년 제11회 베를린올림픽 이후 12년 만에 열리는 국제 스포츠 제전이었다.
한국 선수단이 런던으로 가는 길은 멀고도 험했다. 1945년 11월 조선체육회가 일본인 주도의 ‘조선체육협회’로 강제 통합된 지 7년 만에 재건되었고, 통합 전 ‘이사’로 활약했던 여운형이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런던올림픽을 2년 앞둔 1946년, 조선체육회는 ‘올림픽대책위원회(대책위)’를 조직하고 참가 자격 확보를 위해 ‘국제올림픽위원회(IOC)’ 가입을 서둘렀다.
대책위 부위원장 전경무는 미국올림픽위원회(USOC) 위원장이자, IOC 부위원장 브런디지에게 한국의 올림픽 참가를 위한 협조를 요청했다. 전경무는 1903년 4세 때 부모와 함께 하와이 이민을 떠나 미시간대학에서 정치학을 공부했다. 학창 시절 미식축구 선수와 웅변 부장으로 활약했다. 1945년 11월 해방 조국에 봉사하기 위해 귀국했다.
하지 장군의 미군정과 맥아더 장군의 연합군 최고사령부(GHQ)는 한국의 올림픽 참가를 위해 행정적‧재정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국이 난관에 봉착할 때는 맥아더가 직접 나서 해결해 주었다. 맥아더는 1927년 현역 육군 소장 신분으로 USOC 위원장에 취임해 이듬해 제9회 암스테르담올림픽에서 미국을 메달 순위 1위에 올려놓은 걸출한 ‘스포츠 행정가’이기도 했다. 브런디지는 그때 USOC 부위원장으로서 ‘맥아더 위원장’을 도왔던 인물이었다.
1946년 말 브런디지는 조선체육회에 서신을 보내 한국에 국가올림픽위원회(NOC)가 조직되고, 3종목 이상의 경기단체가 국제경기연맹(ISF)에 가입한다면, 1947년 6월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 IOC 총회에서 한국의 가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스톡홀름 IOC 총회를 한 달 앞두고 조선올림픽위원회(KOC) 조직은 완료되었지만, ISF 가입이 승인된 종목은 레슬링 한 종목에 불과했다.
전경무는 브런디지에게 수영, 축구, 육상 등 7종목의 가입 신청을 완료하고 승인을 기다리고 있다며, 다시 한번 지원을 요청했다. 5월 29일 전경무는 한국의 가입 승인 여부가 확실치 않은 IOC 총회에 참석하기 위해 미군 수송기를 타고 도쿄로 출발했다. 도쿄에서 스톡홀름행 항공편으로 갈아탈 예정이었지만, 미군 수송기가 일본 아쓰키 산악지대에서 추락해 사망했다.
KOC는 전경무의 순직을 추모할 겨를도 없이 서둘러 후임을 물색해 뉴욕에서 한미무역상사를 경영하는 이원순에게 IOC 총회 참석을 요청했다. 미국 시민권이 없었던 이원순은 1개월 이상 소요되는 미군정의 여권 발급을 기다릴 수 없어 스스로 여행증명서를 만들어 영국, 덴마크, 스웨덴 영사관에 비자를 요청해 발급받았다.
유럽행 비행기 좌석은 전석이 매진이었지만, 총회 개회 닷새 전인 6월 13일이 금요일이었다. ‘다행히’ 불길하다고 예약을 취소한 사람이 나타나 이원순은 가까스로 유럽행 항공권을 구할 수 있었다. 이원순은 영국, 덴마크를 거쳐 개막을 이틀 앞두고 스톡홀름에 도착했다. 이원순의 헌신적 노력과 미국의 적극적 지원 덕분에 IOC 총회 개막 직전 육상과 축구의 ISF 가입이 승인되었다. 6월 20일 IOC는 가입 조건을 모두 충족한 KOC의 IOC 가입을 승인했다.
한 달 후인 7월 19~20일 조선체육회 주최로 ‘세계올림픽 참가 기념 경기대회’가 서울운동장에서 개최될 예정이었다. 육상, 야구 등 다양한 종목의 경기가 치러질 예정이었지만, 때마침 인천에 입항한 영국함대팀과 서울축구단의 축구 경기가 가장 큰 관심을 끌었다. 19일, 오전 일정을 마친 여운형은 오후 4시에 열릴 축구 경기를 참관하기 위해 옷을 갈아입으러 귀가하던 길에 혜화동로터리에서 19세 청년 한지근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당일 축구 경기는 서울축구단이 영국함대팀을 6대0으로 대파했지만, 이튿날 잡혀 있던 경기는 조선체육회장 서거에 대한 조의를 표하기 위해 취소되었다.
KOC 부위원장과 위원장이 연이어 비명횡사하는 어수선한 가운데 올림픽 참가 비용 마련을 위해 올림픽후원회가 조직되었다. 영화 상영과 공연 수입, 하와이·LA 교포들의 성금으로도 적지 않은 후원금이 모금되었지만, 참가 비용 대부분은 한국 최초의 복권으로 기록되는 ‘올림픽후원권’ 발행을 통해 충당되었다. 담배 한 갑이 30원, 영화 관람료가 40원이던 시절, 순직한 전경무의 사진으로 도안한 후원권은 100원이었다. 발행한 140만 장의 후원권이 완판된 덕분에 1억2600만원에 달하는 올림픽 출전 경비가 마련되었다.
어려운 경제 사정에도 후원권을 사고, 성금을 모금한 한국인들은 한마음으로 한국 선수단이 세계를 제패하고 런던 하늘에 태극기를 휘날리고 돌아올 것을 기원했다. 한국인들이 꿈꾼 ‘세계 제패’는 ‘우물 안 개구리’ 같은 망상은 아니었다. 12년 전이고, 비록 일장기를 달고 출전했을망정 한국은 ‘직전 올림픽’에서 마라톤 챔피언 손기정을 배출한 나라였다. 또한 런던올림픽 1년 전 보스턴마라톤대회에서는 서윤복이 세계기록으로 우승했다. 그해 9월, 필라델피아에서 개최된 세계역도선수권대회에 김성집이 75kg급 3위, 남수일이 60kg급 2위로 입상한 역도 강국이기도 했다.
1948년 6월 21일 한국 선수단은 서울역에서 부산행 특별열차 ‘해방자호’ 1등 침대차를 타고 장장 20여 일 동안 이어질 런던행 장도에 올랐다. 해방자호는 일본이 1940년 도쿄올림픽 때 한반도를 경유하는 외국 선수단 이송을 위해 제작했지만, 올림픽이 취소되는 바람에 해방 전까지 창고 안에 묵혀 두었던 열차였다.
선수단은 홍콩까지 선편으로 가서 그곳에서 비행기에 탑승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22일 밤 부산을 출항한 선수단은 홍콩이 아니라 후쿠오카로 향했다. 이튿날 오전 후쿠오카에 도착한 선수단은 운집한 교포들의 환영을 받으며 태극기를 앞세우고 당당히 일본 땅을 밟았다. 베를린올림픽에 육상 선수로 출전했던 스포츠 기자 무라코소는 “일본은 이번 올림픽에 나가지 못하지만, 한국 대표단은 런던에서 잘 싸워주시오”라며 한국 선수단에 부러움 가득한 응원을 건넸다. 맥아더는 가마쿠라에 있는 자신의 별장으로 한국 선수단을 초청해 성대한 환송연을 열고 올림픽에서 선전을 당부했다.
런던올림픽에서 한국은 역도의 김성집, 권투의 한수안이 동메달 2개를 획득해, ‘세계 제패’를 꿈꾸던 한국인들의 기대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올림픽 첫 출전치고는 나쁘지 않은 성적을 얻었다. 숨은 영웅들의 헌신과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출범하기도 전 런던 하늘에 태극기가 휘날리는 감격은 없었을 것이다.
<참고 문헌>
김영남, ‘한국의 올림픽경기대회 최초 참가의 체육사적 의미’, 충남대 박사학위논문, 2020
김재우, 박종인, ‘제14회 런던올림픽대회(1948)의 한국 참가 과정과 그 평가에 관한 연구’, 한국사회체육학회지, 제50호, 2012
민재호, ‘런든올림픽기행’, 수로사, 1949
이기형, ‘몽양 여운형’, 실천문학사,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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