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은의 고전노트] 비뚤어진 소유욕의 사랑이 왜 古典인가

이수은, 독서가· ‘느낌과 알아차림’ 저자 2024. 7. 20. 00: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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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풍의 언덕

1847년 출간한 데뷔작이 “저속하고 기괴한 소설”이라는 혹평과 함께 참담한 판매 실적을 거두고 작가는 바로 이듬해 열병을 앓다 서른 살에 사망했다면, 그가 남긴 단 하나의 작품이 후대에 재평가될 가능성은 희박하다.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은 근 70년간 대중에게 잊혀 있었다.

1929년 버지니아 울프는 ‘자기만의 방’에서, 가부장제 사회에서도 꿋꿋이 ‘자기만의 시선’을 고수한 뛰어난 여성 작가로 브론테 자매를 꼽았다. 1954년에는 만년(晩年)의 유명 작가 서머싯 몸이 ‘10편의 위대한 소설과 그 저자들’이라는 비평 에세이를 펴냈는데, 여기에 발자크 도스토옙스키 스탕달 등과 함께 에밀리 브론테가 이름을 올렸다. ‘폭풍의 언덕’은 몸의 ‘걸작’ 목록에 든 4편의 영문학 중 하나였다.

2000년대 이후 여성주의의 대중화와 더불어 ‘폭풍의 언덕’은 명실상부한 고전으로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지만,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 중 상당수는 여전히 “몹시 혼란스럽고” “모든 면에서 지나쳐”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의 파괴적 사랑에 당혹감을 호소한다. 두 사람은 비뚤어진 소유욕으로 서로의 삶을 망가뜨릴 뿐만 아니라, 자식들에게까지 원한을 대물림한다.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공감 능력이 결여된 사이코패스, 타인을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나르시시스트들이다.

이수은 독서가· '느낌과 알아차림' 저자

그럼에도 ‘폭풍의 언덕’이 빅토리아 시대 고딕풍 로맨스 소설을 넘어 손꼽을 만한 고전이라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이 사랑이라는 미명(美名)으로 감춰 왔던 인간 본성의 어두운 측면을 폭로하는 매력적인 ‘안티로맨스’라는 설명만으로는 미흡하다.

배신당한 연인이 수십 년에 걸쳐 완성하는 이 비정한 복수극은 풍부한 상징과 시적 언어로 쓰인, 희귀한 영토 전쟁 서사다. 인물들은 저마다 인종, 성별, 계급의 지배 권력에 맞선다. 낭만적 사랑과 결혼이라는 통념에 도전하는 그들은 절제도 포기도 모르고 싸움에 임하므로 악덕의 창조자다. 관습적 질서를 해체하려는 자는 자기 사회에 대하여 미치광이가 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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