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간 한국으로 수학여행…일본 고교생 2만명 이끌었죠”
이후 50년간 수학여행에 참가한 지벤학원 고교생만 2만2338명에 달한다. 후지타 기요시(藤田淸司·70) 지벤학원 이사장도 2009년 작고한 선친의 뜻을 이어 20년째 한국을 찾고 있다. 특히 올해는 장남인 후지타 세이치로(44) 나라칼리지 교장과도 동행하며 3대째 방한 수학여행에 대한 의지를 다졌다. 코로나19로 중단된 지 5년 만에 다시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온 후지타 이사장을 지난 10일 서울 명동에서 만났다.
Q : 5년 만의 방한에 감회가 남달라 보입니다.
A : 코로나19로 국경이 봉쇄되면서 새삼스레 깨달은 게 있습니다. 지벤학원과 한국 학생들의 교류를 절대 중단해서는 안 되겠다는 거였죠. 2003년 사스(SARS·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가 창궐했을 때도 우리는 한국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때는 출국 자체가 불가능해지면서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어요. 다시 오게 돼 정말 기쁩니다. 오늘 오전엔 학생들과 경복궁에 다녀왔는데 20년간 방문한 곳인데도 색다른 기분이 들었습니다. 예전엔 일본·중국인 관광객이 대부분이었는데 그새 유럽과 동남아 관광객이 크게 늘었더라고요.
Q : 예년보다는 규모가 줄었는데요.
A : 원래는 3개 고등학교 2학년생 전원이 수학여행을 왔어요. 인원도 700~800명이나 됐죠. 그러던 중 2017년 북한의 미사일 도발로 한반도 정세가 불안정해지면서 학부모들의 우려가 커졌고, 그러다 보니 저희도 학생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맺어온 한국과의 우호 관계는 반드시 지켜나가고 싶었죠. 그래서 절충안으로 희망자에 한해 수학여행을 오게 됐는데, 이젠 전염병 등 장벽들도 다 사라지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도 한층 좋아진 만큼 다시 과거처럼 많은 학생이 한국을 찾게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한·일 관계 굴곡에 따라 양국을 오가는 학생들도 들쭉날쭉했다. 실제로 일본에서 수학여행을 온 학생들은 1996년 4만명을 정점을 찍은 후 줄곧 하락세였다. 한·일 관계가 얼어붙은 후 2019년에는 1000명대에 머무르며 바닥을 찍었다. 한국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방한 수학여행객은 2341명을 기록했으며 올해는 5000명 이상이 방문할 것으로 예상한다.
지벤학원의 한국행을 지원하는 한국관광공사 박성웅 일본팀장은 “지벤학원의 꾸준한 방한 수학여행 실시는 일본 내 많은 학교들의 한국 수학여행 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견인차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며 “엔저 등 외부요인으로 일본인의 해외여행심리가 위촉되는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교육여행 시장은 미래 수요를 육성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반세기 동안 지벤학원의 한국행도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처음 방한했던 1975년엔 일본 학생들이 탄 관광버스를 경찰이 호위하고 다녀야 했을 만큼 국내 여론 또한 좋지 않았다. 그 이후에도 한·일 외교 갈등에 북핵 위협, 사스 등 각종 악재가 끊이질 않았다. 그때마다 학생의 안전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아졌고 때론 일본 우익단체의 비난도 감수해야 했다. 한·일 관계가 요동칠 때마다 한국행 수학여행을 포기하는 학교가 속출했다. 그럼에도 지벤학원은 한 번도 빠짐 없이 한국을 수학여행지로 택했다.
“75년 경주에 갔을 때 조그만 태극기와 일본 국기를 나란히 들고 저희 일행을 환영해준 한국 사람들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이방자 여사가 창덕궁에서 고운 한복 차림으로 저희를 맞아주던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후지타 테루키요 초대 이사장은 2009년 방한 35년째를 맞아 한국관광공사로부터 감사패를 받는 자리에서 이렇게 소회를 밝혔다. “과거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으로 앞으로 최소한 35년은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가겠다”고 결심했던 그에게 35년이란 숫자는 남다른 의미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는 수학여행 직전까지 폐렴으로 사경을 헤맬 정도로 위중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산소 호흡기를 달고 휠체어에 의지해 한국을 찾았고, 이는 결국 그의 마지막 수학여행이 됐다.
Q : 숱한 어려움에도 50년을 이어왔습니다.
A : 부친이 돌아가시기 4~5년 전부터 건강이 악화돼 제가 함께 한국을 찾게 됐어요. 그리고 경주로 마지막 수학여행을 왔을 때 ‘오늘로 35년은 내가 채웠으니 앞으로는 네가 맡아 수학여행단을 이끌어라’는 당부의 말씀을 남기셨죠.
그는 그러면서 “선친이 학생들의 역사 교육에 초점을 맞췄다면 앞으론 글로벌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흔히 한국과 일본은 ‘멀고도 가까운’ 나라라고 하는데, 앞으로는 ‘소중하고도 가까운’ 나라가 돼야 하지 않겠어요.”
Q : 과거에 비해 한국에 대한 일본 학생들의 인식도 많이 달라졌을 텐데요.
A : 맞습니다. 아직 10대에 불과한 고등학생들이 아는 한국은 이미 ‘새로운’ 한국입니다. 과거사에 얽매이지 않고 한국 문화를 수용하는 데 있어서도 더 자유로워진 모습이에요. 한국을 찾기 전에 학생들과 ‘이번 수학여행을 통해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토론하는 자리를 가졌는데, 학생들이 한국과의 교류에 훨씬 적극적이고 긍정적임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후지타 이사장의 선친은 수학여행 코스를 정할 때 일본 아스카 문화의 원류가 한반도에서 전해졌다는 점에 착안했다. 부산항으로 입국해 경주와 공주·부여 등을 둘러보며 옛 백제 문화가 일본으로 건너간 루트를 거슬러 올라가도록 했다. 선조들의 발자취를 그대로 따르고자 10년 전까지만 해도 비행기가 아닌 배를 탔다.
후지타 이사장은 "오사카에서 후쿠오카까지, 후쿠오카에서 부산까지 배를 타고 이동하는 데만 꼬박 이틀이 걸렸다"며 "현해탄 뱃길이 험해 뱃멀미로 고생하면서도 이 험난한 길을 거쳐 일본으로 문화가 전파됐다는 걸 몸소 느끼게 하기 위해 배편을 고집했다"고 말했다. 그러던 중 2014년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학부모의 걱정이 커지면서 비행기로 바꿨지만 한국 내 경로는 지금까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3박 4일 일정이 끝나갈 무렵인 지난 11일 오후, 후지타 이사장의 마지막 발걸음은 서울 중구 신당동의 한양공고로 향했다. 지벤학원과 한양공고와의 인연도 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선친은 방한 수학여행을 계획하며 한국 학생들과 직접 교류해야 한다는 의지를 내비쳤고, 이후 일본 국토청 장관 등을 지낸 하라 겐자부로의 소개로 한양공고와 자매결연을 맺게 됐다. 후지타 이사장은 "이번에 함께 온 학생 가운데는 학부모가 고교생 시절 한양공고를 찾아 한국 학생들을 만난 사례가 있을 정도로 양교의 우정이 깊다"고 소개했다.
이날 학생 대표로 단상에 오른 와카야마고 2학년 츠지 모토마키(17)양은 유창한 한국어로 발표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츠지양은 "학교의 한국 관련 수업 때 가족·약속 등 일본어와 발음이 유사한 한국어가 많다는 걸 배웠다"며 "이번 여행을 통해 양국이 언어만큼 문화적 유사성도 깊다는 걸 새삼 느꼈다"고 말했다. 토키 류세이(16)군은 "양국 사이에 불행한 역사가 있었음에도 이렇게 오랜 기간 교류가 지속돼 왔다는 게 놀라웠고, 무엇보다 한국인 친구를 만나 우정을 쌓게 돼 너무 기쁘다"며 환하게 웃었다.
Q : 지난 50년의 소회가 남다를 듯싶습니다.
A : 일본에선 손님을 환대하는 ‘오모테나시(御持て成し)’ 문화를 중시하는데, 그동안 한국을 찾으면서 느낀 게 한국인에게도 같은 마음이 있다는 점이었어요. 돌이켜보면 서로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 이어지는 반세기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교류라는 게 서로에 대한 '마음'을 키워나가는 일이잖아요. 특히 한국은 정보통신기술과 문화 분야 등에서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만큼 서로의 장점을 배워가며 신뢰를 쌓아가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양국의 젊은 인재들이 아픈 과거를 딛고 미래지향적으로 협력해 나가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될 수 있도록 향후 50년도 꾸준히 한국을 찾을 겁니다.
후지타 이사장은 "연로한 부친을 따라 처음 수학여행길에 오른 게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내가 그때 아버지 나이가 됐다"며 "팬데믹 기간 한국과 한국 사람들을 그리워하면서 부친의 뜻을 조금이나마 헤아릴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제가 그러했듯 제 아들과 손자도 대대손손 한국으로 수학여행을 올 거라고 확신합니다. 이젠 그 어떤 난관도 우리의 한국행을 막지 못할 겁니다."
허정연 기자 jypow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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