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 음악과 결혼했다, 평생 독신으로 산 낭만청년 브람스

2024. 7. 20.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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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은기의 클래식 비망록
요즘 결혼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 결혼은 고사하고 연애조차 하지 않는 사람도 적지 않다. 이유야 다양하겠지만 경제적인 요인이 제일 크지 않을까. 취업이 어렵고 취업해도 충분한 월급을 받기 어려우니 결혼에 뒤따르는 주거비용이나 양육비를 감당하기 힘들다. 오죽하면 나 혼자 산다는 걸 보여주는 방송이 인기를 끌까. 결혼도 연애도 안 하니 출산율은 자꾸 더 떨어져 인구소멸을 우려할 정도다. 얼마나 상황이 심각하면 대통령이 국가비상사태를 다 선언할까. 둘만 낳아 잘 키우자고 산아제한 정책을 폈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바흐·베토벤과 ‘3B’로 불린 최고 거장
바흐, 베토벤과 ‘3B’로 불린 브람스. [사진 사회평론]
전통이 중요한 영향력을 행사하는 사회에서 결혼은 언제나 성스러운 축복이자 필수적 의무였다. 그리고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다면 사회적 압력이 뒤따르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결혼하지 않는 사람이 유명 인사라면 사람들의 의심스러운 눈길을 피하기 어려웠다. 바흐, 베토벤과 함께 3B로 불렸던 당대 최고의 거장 요하네스 브람스가 그랬다.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사는 바람에 구설수에 자주 시달렸다. 특히 브람스는 평생 결혼하지 않은 이유가 스승인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 클라라 슈만과 연인 관계였기 때문이라는 오해를 받았다.

함부르크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난 브람스는 피아노보다 발트호른, 바이올린, 첼로 같은 악기를 먼저 배웠다. 떠돌이 출신이었던 아버지가 아들을 안정된 직장인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만들려고 직접 가르쳤기 때문이다. 8살 때 브람스는 피아니스트가 되겠다고 고집을 피웠고 오셀 코셀이라는 선생에게 피아노를 배울 수 있었는데, 2년 만에 자선 콘서트에서 연주할 정도로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 코셀 선생은 이 신동을 자신의 은사인 에두아르트 막센에게 보냈고 그는 브람스에게 무보수로 피아노는 물론 이론과 작곡까지 가르쳐 주었다. 하지만 가난이 그의 학업을 막았다. 12살부터 가계를 돕기 위해 돈벌이에 나서야 했기 때문이다. 좋아하던 학교도 14살까지밖에 다니지 못했고 낮에는 피아노 레슨, 교회 오르간 연주, 극장의 노래 반주, 그리고 밤에는 술집이나 무도장에서 연주하며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런 그의 인생에 반전의 기회가 된 것은 슈만과의 만남이다. 브람스에게 슈만은 인생에 다시없을 최고의 은인이었다. 젊은 브람스가 슈만을 처음 찾아왔을 때 만해도 그는 유럽의 도시를 순회 연주하고 있던 가난한 작곡가 지망생이었다. 하지만 슈만은 그의 실력을 바로 알아봤고 ‘새로운 길’이라는 제목의 유명한 칼럼을 써서 그의 출현을 세상에 알렸을 뿐 아니라, 라이프치히의 권위 있는 출판사에 소개하여 그의 작품을 정식으로 출판하게 도와서 그를 주류 음악계에 데뷔시켰다. 그러나 조현병에 시달리던 슈만이 자살을 시도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되면서 그의 멘토 역할은 끝을 맺는다. 그렇지만 슈만을 은인으로 존경했던 브람스는 자주 그를 문안하고 안부를 살폈다.

소설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베르테르의 무덤을 찾은 로테. [사진 사회평론]
브람스의 삶과 작품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또 다른 인물은 다름 아닌 슈만의 아내 클라라였다. 슈만이 정신병원으로 떠난 이후 가족의 생계를 떠맡게 된 클라라는 연주를 해서 돈을 벌어야 했고 6명이나 되는 어린 자녀들을 돌볼 사람이 절실히 필요했다. 이때 선뜻 그 역할을 자원한 것이 브람스였다. 뜻하지 않게 슈만의 집에 살게 된 브람스는 클라라를 비록 잠시지만 열렬히 사랑하게 된다. 당시 그의 나이는 한창 젊은 21살. 그리고 클라라는 36살로 전 유럽에서 손꼽히는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였다. 변방 출신으로 인생 경험이 부족했던 젊은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그가 상상할 수 있었던 가장 이상적인 여성상이었을 것이다. 한창 혈기 왕성한 나이에 그가 사랑에 빠지지 않았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까.

게다가 때는 바야흐로 낭만주의의 시대. 많은 청년들이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흉내 내어 사랑에 주저 없이 목숨을 바치던 때였으니. 브람스 자신도 훗날 이 시절을 회고하면서 자신의 베르테르 시기라고 말한 바 있다. 슈만의 집에 살 때 하행하는 다섯 음으로 된 일명 클라라 주제를 사용해 작곡했던 ‘피아노 4중주 c단조’를 20년이 지난 1875년 출판사에 보내면서 그는 악보의 겉표지에 소설 속 베르테르처럼 옷을 입고 권총을 머리에 대고 있는 그림을 넣으라고 제안한다. 이 곡이 ‘베르테르 4중주’라고 불리는 이유다.

브람스가 사랑했던 슈만의 아내 클라라. 그녀는 유럽에서 손꼽히는 비르투오소 피아니스트였다.
클라라는 성숙한 여인이었다. 브람스가 질풍노도의 시간을 보내는 동안 그가 자신에 대해 품고 있는 연정을 몰랐을 리가 없건만 그녀는 그에 대해 큰아들을 대하는 어머니 같은 태도를 한 번도 잃지 않았다. 그 덕분에 둘은 스승의 부인과 제자라는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죽은 남편을 대신해서 브람스가 홀로 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왔다. 브람스가 처음으로 맡았던 데트몰트의 궁정 음악가 자리도 클라라가 소개해 준 것이었다. 1861년 브람스를 대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합창과 관현악을 위한 유명한 걸작 ‘독일 레퀴엠’도 브람스가 이때 합창단을 지휘하는 경험을 쌓지 않았다면 결코 세상에 나오지 못했을 것이다.

브람스와 클라라는 서로의 인생과 음악에 있어 가장 소중한 친구이기도 했다. 특히 브람스에게 클라라는 언제나 정확하고 솔직한 평가를 해주는 가장 믿을만한 선배 음악가였다. 그래서일까, 당대 누구보다도 실력이 뛰어난 작곡가가 된 이후에도 브람스는 작품을 출판사에 넘기기 전에 반드시 클라라의 의견을 구했다. 그리고 작업이 잘 풀리지 않을 때에 클라라의 조언 덕분에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브람스 실내악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피아노 5중주 f단조’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브람스가 오랫동안 두 대의 첼로가 포함된 현악 5중주에 매달렸다가 포기하려고 했을 때 클라라의 말을 듣고 오케스트라 효과를 내는 피아노 5중주로 바꾸어 작곡한 것이 결국 신의 한 수가 되었다.

작곡가로서의 명성이 올라갈수록 브람스의 작곡에 대한 열정은 더 뜨겁게 불타올랐고 그럴수록 결혼에 대한 계획은 더 멀어졌다. 그는 진정한 음악가가 되기 위해서는 남들처럼 안락한 가정생활은 포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렇다고 그가 연애 자체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늘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때로는 결혼을 진지하게 고민할 때도 없지 않았다. 다만 결혼과 자유라는 선택지 앞에서 매번 결혼이 아닌 예술과 삶의 자유를 선택했을 뿐이다. 그리고 반복되는 사랑과 실연은 아름다운 가곡으로 남았다.

독신자 브람스의 생활은 지극히 검소하고 간소했다. 빈에 입성한 후 내내 허름한 호텔과 하숙집을 전전하다가, 9년 만인 1871년 카를스가세에 소박한 거처를 마련한 후에는 사망할 때까지 25년간 줄곧 그곳에서 머물렀다. 식사도 언제나 빈의 작은 펍에서 간단하게 해결했다. 그에게 유일한 사치는 8차례나 다녀온 이탈리아 여행이었다. 해외로 여행을 다니는 일이 쉽지 않았던 시절, 그는 가까운 친구와 동료들과 함께 여행을 떠났으며 가능한 한 오래 머물곤 했다.

독신으로 사는 바람에 구설수 시달려
독신이었지만 브람스는 말년에도 지인들 덕분에 외롭거나 생활에 큰 불편을 겪지는 않았다. 특히 펠링어 부부가 그를 가족처럼 보살펴 주었는데 남편인 리하르트 펠링어가 전기회사인 지멘스 & 할스케에 근무했기 때문에 빈에서 최초로 전기를 공급받는 호사까지 누렸다. 하지만 생애 마지막 5년 동안 가까운 친구들의 잇따른 사망은 그에게서 삶의 활력을 빼앗았다. 인생의 허무를 느껴서였을까. 그는 삶과 죽음의 의미에 천착한다. 그리고 1896년 임종을 앞둔 클라라를 마지막으로 만나고 난 후 ‘4개의 엄숙한 노래’를 작곡한다. 가사를 모두 성서에서 가져온 이 엄숙하고 장엄한 노래들은 “가곡 역사상 최고의 보물”로 여겨지고 있다. 평생 흠모했던 여인이자 친구였던 클라라가 사망한 후 브람스 자신도 간암으로 1년도 지나지 않아 눈을 감는다.

겉보기에 한없이 진지하고 매사에 철저했던 브람스가 사실은 너무나 낭만적인 삶을 살았으며, 그토록 꿈결같이 애절하고 사랑스러운 음악들을 작곡했다는 것은 언제 생각해도 놀랍다. 어쩌면 우리 모두가 낭만주의자가 될 소질을 조금씩은 갖고 태어나는 것 아닐까. 단지 살면서 현실의 무게에 눌려서 가려져 있을 뿐. 필요한 것은 어떤 계기일 터이다. 소설 속 젊은 변호사 시몽이 무미건조한 나날을 살아가던 서른아홉 살 여성 폴의 삶을 단 하나의 질문으로 마구 흔들어 놓았듯이. “브람스를 좋아하시나요?”

민은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 서울대학교에서 음악이론을 전공하고 파리 소르본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1995년부터 서울대 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음악과 페미니즘’‘독재자와 음악’‘대중음악의 역사’ 등을 주제로 여러 권의 저서를 출판했으며 최근에는 『난생 처음 한번 들어보는 클래식 수업』 시리즈를 집필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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