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데이 칼럼] 한국 외교, 그리고 각주구검의 우
무엇보다 먼저 국제정치 현실을 냉철하게 꿰뚫어 보아야 한다. 현재 한국을 둘러싼 국제정치 흐름에는 세 가지 핵심 도전 요인이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미·중 대결 심화, 북한 위협의 격화다. 이 세 가지는 우리가 지금 6년 전과는 완전히 딴판인 세상에서 살고 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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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 미·중, 북한 문제 등으로
6년 전과 크게 달라진 국제 정치
정치권과 여론 담론은 변화없어
고정 관념 버리고 사고 틀 바꿔야
」
과거 제국주의 시대에 일본은 한국을 35년간 강점했다. 1950년 북한의 남침 시 16개국이 참전해서 한국을 지켜준 것, 한국이 이만큼 경제와 민주주의를 키워올 수 있었던 것은, 그러한 제국주의 시대가 가고, 영토주권이나 자결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자유주의 국제질서 규범이 강하게 살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런 방패막이가 사라지려 하고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가 승리하면 시진핑 중국 주석의 대만 침공,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대남 도발 가능성도 높아질 것이다. 그동안 동맹과 자유주의 진영을 지원하고 리더 역할을 했던 미국이 더 이상 그럴 힘과 의지가 없어졌다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현실이 그러할진대, 별 상관도 없는 우크라이나 때문에 대러 수출이 타격받고 러시아와의 균형 외교가 깨졌다고 말하는 것은 사안의 경중을 가리지 못하는 이야기다.
둘째, 미·중 대결의 심화다. 미·중 대결은 지금 우리가 실감하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하다. 2017년에 나온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보고서는 최초로 중국을 수정주의 세력이자 실질적인 주적으로 정의했다. 그것은 1972년 닉슨 대통령의 방중이래 시작되어 온 중국 포용 정책을 45년 만에 폐기 처분한다는 공식 선언인 셈이었다. 2018년 7월에는 340억 달러 상당의 중국산 수입품에 25% 고율 관세를 부과해서 본격적인 무역전쟁이 시작되었다. 2019년에는 중국의 화웨이를 비롯한 68개 계열사에 대한 미국산 부품과 기술 판매를 금지하면서 기술전쟁이 격화되었다.
외교전에서는 미국 주도의 자유주의 국제 질서를 와해하고 다극 질서를 만들겠다는 시진핑 주석의 일대일로에, 미국은 인도태평양전략과 인태-나토의 연계로 맞서고 있다. 군사적으로는 대만과 남중국해에서 충돌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최근 2~3년 사이에 미·중 간의 전쟁 가능성에 관한 책과 논문들이 미국에서 수십 편이 출판되었다. 지금 미국 조야에서는 미국이 시급히 중국을 타깃으로 더 집중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세다. 주한미군도 북한 대응 목적을 넘어서서 대중국 군사전략의 틀 안으로 끌어들여 새로운 형태로 조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트럼프 2기가 들어서면 주한미군의 숫자, 형태, 역할의 변경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셋째, 위와 같은 상황에서 북한 위협이 갈수록 고조되고 있다. 2019년 이래 김정은 위원장은 대남 적대시 정책과 핵미사일 프로그램 완성 목표에 박차를 가해왔다. 그 결과 한국 국민의 70% 이상이 핵 개발을 원할 정도로 불안해하는 상황이 되어버렸고, 한·미 당국은 이에 대해 확장억제 강화로 대응해 왔다. 김정은 위원장은 선대의 통일전략까지 폐기하고 모든 남북간 연결망을 끊어버렸다. 이러한 남북관계의 변화는 포용과 협력은 뒷전으로 밀리고, 당장 무력 충돌 가능성을 막는데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 와버렸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국제규범이 약화되고, 미·중 대결이 격화되며, 북한 위협이 심각해진 상황에 처한 한국에게 가장 합리적인 전략적 선택은 과연 무엇일까? 60여 개의 동맹을 중심으로 자유민주주의 진영을 이끌어 온 동맹국 미국과 러시아, 북한, 이란과의 권위주의 연대를 이끌고 있는 중국 사이에서 치우치지 않고 균형을 잡는 이른바 ‘균형 외교’일까?
세상은 6년 전과 완전히 달라졌는데 외교에 관한 우리 정치권이나 여론의 담론은 달라진 게 별로 없다. 여전히 수십 년 된 고정관념의 틀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이 변하면 사고의 프레임도 바꿔야 최소한 생존, 더 나아가 번영이 가능하다. 그것이 역사의 법칙이다.
흘러가는 강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물속에 칼을 떨어뜨렸는데 뱃전에 칼을 놓친 위치를 표시해 놓고 그 자리에서 칼을 찾으려 했다는, 이른바 각주구검(刻舟求劍)의 우를 범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윤영관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전 외교통상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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