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선데이] 국민이 책 읽어야 정부가 두려워한다

2024. 7. 20. 0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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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영 소설가
최근 온라인상에서 불거진 문해력 저하 논란이 오프라인에서도 화제를 모았다. 문해력 저하 논란이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이번 논란의 대상은 학생이 아닌 학부모라는 점에서 모양새가 달랐다. 논란의 불씨는 자신을 9년 차 어린이집 교사라고 밝힌 누군가가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올린 사연에서 시작됐다. 그는 ‘우천 시’ 장소를 변경한다고 공지했는데 우천시가 어디냐고 묻는 학부모가 있다며 답답함을 호소했다. 해당 사연에는 ‘중식 제공’을 중국집 음식 제공으로, ‘금일’을 금요일로 이해하는 학부모도 있다는 등 비슷한 내용의 댓글이 여럿 달려 논란의 덩치를 키웠다.

「 성인 57%가 1년간 한권도 안읽어
문해력 부족은 독서량 적기 때문
책은 단순 글자가 아닌 논리체계
짧은 영상만으론 논리 파악 어려워

ON 선데이
우리 말을 두고 굳이 한자어를 쓸 필요는 없다. ‘우천 시’를 ‘비가 내리면’으로 바꿔 써도 이해하는데 아무런 문제가 없다. 혹자는 ‘우천 시’라는 한자어가 압축표현이어서 효율적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비가 오면’으로 줄이면 된다. 조사를 빼서 ‘비 오면’으로 줄일 수도 있다. ‘중식 제공’은 ‘점심 제공’, ‘금일’은 ‘오늘’로 바꿔 쓰면 글자 수도 같고 이해하기도 쉬워진다. 이런 한자어의 의미를 알면서도 사용하지 않는 사람과 전혀 모르는 사람의 문해력이 같을 순 없다. 우리 말로 대체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데도 굳이 한자어를 고집하는 태도가 옳은지는 모르겠다. 나는 굳이 ‘우천 시’를 사용하는 사람보다 우천시가 어디냐고 묻는 학부모의 편이다.

내가 이 논란을 지켜보며 경악한 이유는 ‘우천 시’를 모르는 학부모 때문이 아니었다. 논란을 불러일으킨 사연에는 “○○해도 되지만, 하지 않는 것을 권장 드립니다”라는 공지사항을 보고 “그래서 해도 되냐, 안 되냐”고 묻는 학부모가 여럿이었다는 하소연이 담겨 있었다. 문장이 길어지면 읽지 못하고 그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는 학부모가 많아지고 있다는 점이 내겐 ‘우천 시’를 모르는 학부모보다 심각한 문제로 다가왔다.

최근 온라인 커뮤니티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서 벌어지는 온갖 논란을 살펴보면, 그 흐름이 기괴하기 짝이 없다. 누군가 문제를 제기하면, 느닷없이 그 문제와 상관없는 단어에 꽂힌 또 다른 누군가가 등장해 분탕질을 한다. 여기에 ‘누칼협’(누가 그걸 하라고 칼 들고 협박했느냐는 조롱이 담긴 은어)을 운운하는 누군가의 비아냥이 더해지면 논란은 산으로 간다. 그러면 또 다른 누군가는 “반박 시 니 말이 맞음”이라는 짧은 문장 하나로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고 논란을 회피한다. 서로 같은 언어를 쓰는데도 맥락을 파악하지 못하고 자기 말만 하니 소통이 이뤄지지 않는다. 제대로 된 반론은 없고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적으로 취급한다. 최근 정치권을 둘러싼 풍경과 비슷하지 않은가. 문해력 저하는 우리 사회의 건강한 논의를 막는다는 점에서 중대한 문제다.

문해력 저하의 주된 원인으로 꼽히는 건 독서량 저하다. 최근 문화체육관광부가 발표한 ‘2023 국민 독서실태조사’에 따르면 지난해(2022년 9월~2023년 8월) 성인 종합 독서율은 43.0%다. 성인 10명 중 6명이 지난 1년 동안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셈이다. 책은 단순히 종이에 글자를 모아 놓은 물건이 아니라 하나의 논리 체계다. 짧은 영상에 담긴 파편화된 정보만으로는 그런 논리 체계를 파악하기가 어렵다. 책장을 넘기며 생각의 순서와 줄기, 흐름과 연결을 고민할 수밖에 없는 독서는 그 자체로 논리적 사고 훈련이다. 독서량이 쌓이면 자연스럽게 문해력도 쌓인다.

책 한 권 읽지 않아도 사는 데 딱히 지장이 없는데, 왜 독서를 하고 문해력을 키워야 하느냐는 반발도 있을 터다. 똑바로 알기 위함이다. 살면서 속지 않기 위함이다. 사용 설명서를 숙지하지 않으면 물건의 기능을 온전히 사용할 수 없고, 계약서를 대강 보고 넘기면 결정적인 순간에 눈뜨고 코 베인다. 우리의 삶에 직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정부 정책은 모두 법적인 근거와 논리에 따라 추진된다. 그 과정은 문서로 이뤄지며 문장으로 흔적을 남긴다. 국민이 이 과정을 완전히 이해하긴 어려워도, 이 과정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면 정부는 긴장한다. 전 세계적으로 독재 정권과 부패 정권이 왜 우민화 정책에 열을 올렸는지 생각해 보라. 정부가 과연 책 한 권 읽지 않는 국민을 두려워하겠는가. 주방을 모르는 주인이 계산대만 지키는 식당은 결국 주방장 손에 휘둘리기 마련이다.

정진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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