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리포트] ‘도쿄의 巨商’ 서갑호
일본 도쿄의 최고 부촌으로 꼽히는 미나토구(港區) 아자부(麻布)는 외교 1번가다. 프랑스·독일·이탈리아·중국·러시아의 주일 대사관이 있다. 아자부의 바로 옆인 아카사카에는 미국·캐나다 대사관이 있다.
19세기와 20세기 초, 아시아에 진입한 세계 열강은 지도(地圖)를 도쿄 아자부 위에 그렸다. 본래 아자부는 막부 시대엔 지방 영주 다이묘들이 별저를 뒀던 곳이다. 메이지 정권이 다이묘를 없애자, 서구 열강에겐 ‘경비에 유리하고 넓은 대지의 다이묘 별저’가 최고 입지였던 것이다.
1965년에야 일본과 국교를 맺은 한국의 대사관이 아자부에 위치한 건 사실 의외다. 강국 대사관 못지않은 8264㎡(약 2500평)의 넓은 대지인 데다, 일본 4·6대 총리 마쓰카타 마사요시의 저택 부지라 다이묘 별저보다 한 수 위다. 추정 땅 가격은 현재 1조원 정도고, 59년 전에도 금싸라기 땅이었다. 당시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130달러도 안 됐던 약소국이 매입하긴 어려운 입지였다.
‘어떻게?’의 해답은 지난 12일 열린 ‘한국 대사관저의 이례적인 현판식’이다. 관저에 ‘동명재(東鳴齋)’란 이름을 붙였다. 동명은 고(故) 서갑호(일본명 사카모토 에이이치) 사카모토방직 회장의 아호다. 일제강점기 1915년 경남 울주군에서 태어나, 14세 때 일본에 와선 사탕을 팔고 폐지를 수집하며 돈을 모았다. 1948년 세운 방직 회사가 급성장해 1950년대 ‘돈을 가장 많이 버는 재일 교포’가 됐다. 서 회장이 1951년 은행 돈을 빌려 부지를 매입하곤 5년간 원금·이자를 갚은 뒤, 1962년 한국 정부에 기부했다.
안타깝게도 사카모토방직은1974년 오일쇼크 때 휘청였다. 일본 금융기관들이 대출금을 회수하자 부도를 맞았다. 급전이 필요해 한국 정부에 도움을 요청했지만 외면받았다. 서 회장은 2년 뒤 서울에서 61세의 나이에 별세했다.
서갑호를 기억하는 한국인은 거의 없을 터다. 잊힌 이름을 관저에 붙인 건 윤덕민 주일 한국 대사다. 윤 대사는 “어려울 때 우릴 도운 사람을 기억 못하면 앞으로 누가 다시 한국을 돕겠는가”라며 서 회장의 후손들과도 만났다.
그래도 서 회장의 거룩한 뜻을 되새기기엔 아직 모자란다. 여전히 주일 한국 대사관의 서 회장 자료관은 빈틈투성이다. 예컨대 박정희 전 대통령과 서 회장이 포즈를 취한 사진은 ‘연도 미상’이다. 한국 대사관은 본국 대통령기록관·외교사료관·재외동포청 등 곳곳에 서 회장의 연관 자료를 요청했지만 9개월째 답신이 없다. 서 회장 손녀는 “한국을 짝사랑한 조부의 자료를 모으는 데 도와달라”고 부탁하는 중이다.
생전의 서 회장은 “조국이 부끄러우면 안 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나라를 겨우 되찾은 시절, 설움을 함께 견뎌내자며 재일 교포들을 독려하는 한마디였을 것이다. ‘거상(巨商)’을 기억하는 데 우리 정부가 보다 적극적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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