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의 열연' 야쿠쇼 코지, 한국 지식인층 마음을 훔치다

2024. 7. 20.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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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진의 전지적 시네마 시점
히라야마 상이 인기다. 그는 도쿄 공중화장실 청소부다. 그러나 까닭 모를, 이런저런 사연이 많은 지식인처럼 보인다. 아마도 그는 일본의 극렬했던 학생운동 세력인 전공투(전학공투회의) 세대일 수도 있겠으며, 이런저런 일을 겪으며 인간사에 환멸을 느껴 은둔형 생활로 접어 든 인물일 수도 있다. 이유와 나이가 잘 짐작이 되지는 않지만 어쨌든 히라야마의 일상과 일과가 한국 사회의 일부, 특히 지식인 층에게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고 있다. 거의 큰 파도 수준이다.

히라야마 때문에 카세프 테이프를 찾는 사람들이 생기고 있다. 6,70년대의 팝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으며, 그가 읽는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를 사고 그가 헌책 방에서 구입하려 한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의 『11』을 찾는 사람들이 늘고 있다. 『11』은 국내에서 번역되지 않았다. 가장 인기를 모으는 것은 코모레비를 즐기는 것이다. 코모레비는 일본어로, こもれび(木漏れ日)인데 ‘나뭇잎 사이로 일렁이는 햇살’이란 뜻이다. 이 코모레비는 히라야마가 하루 일과 중 가장 소중하게 즐기는 일이다. 그는 그 햇살의 모습을 매일 카메라로 찍는다.

커피 캔 하나, 올드 팝으로 하루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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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야마는 매일 새벽에 일어나 화초에 물을 주고, 세수를 하고, 콧수염을 다듬은 후 작업복으로 갈아 입고, 전날 가지런히 챙겨 놓은 일상용품들을 챙긴다. 동전 몇 개, 시계, 열쇠 꾸러미 등등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거의 쓰지 않는, 소형 카메라다. 히라야마는 스마트 폰을 쓰지 않는다. 문을 벌컥 열고 나가면서 하늘을 꼭 올려다 보는데 그건 단순히 날씨가 어떨까를 알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에겐 하늘을 보는 것이 하늘 아래 자신이 오늘도 살아 있음을 증명해 주는 것 같은 행위이다. 허름한 집 앞 동네에 있을 법 하지 않은 자판기에서 커피 캔을 하나 꺼내서는 역시 꽤나 오래되고 낡아 보이는 자신의 소형 차에 탄다. 머리 위 수납장 같은 곳에 모아 놓은 카세프 테이프 중 하나를 골라 음악을 튼다. 화창한 날일 것 같으면 애니멀스의 ‘하우스 오브 더 라이징 선’을, 흐린 날이면 벨벳 언더그라운드의 ‘페일 블루 아이즈’를 듣는다. 히라야마의 일상은 커피 캔 하나 그리고 팝음악으로 시작되는 셈이다.

그는 거의 말을 하지 않고 산다. 만나는 사람이 없다. 그저 혼자서 묵묵히 일을 할 뿐이다. 중간에 도쿄 중심가에 있는 신사(神社) 경내의 정원 벤치에서 혼자 샌드위치를 먹고 나뭇잎 사이의 햇살을 좀 즐기고 그걸 소형 카메라로 몇 장 찍는다. 오후에 또 다른 지역 화장실을 청소하고 정시에 퇴근하고, 옷을 갈아 입고, 사우나에 가서 몸을 씻은 후, 역전 지하상가 같은 곳의 간이 음식점에서 하이볼 한잔을 하고 돌아 온 후 잠들기 전 돋보기를 쓰고 윌리엄 포크너의 『야생 종려나무』를 읽는다. 그리고 잔다. 새벽엔 골목길을 쓰는 할머니의 비질 소리에 깬다. 그리고 다시 하루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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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박적일만큼 평범한 루틴으로 가득 한 히라야마의 일상, 그 모습을 담은 영화 ‘퍼펙트 데이즈’가 국내에서 잔잔한 화제를 몰아가고 있는 건 순전히 두 사람 때문이다. 주연 배우 아쿠쇼 코지와 감독인 빔 벤더스이다.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국내 개봉관을 확대하지 않았다. 지난 3일 개봉된 이 영화는 현재 전국 68개 극장에서만 상영중이다. 거의 소규모 예술영화관에서만 상영되고 있다는 얘기이다. 전국 스크린 수 3700개 중 68개관에서 개봉 2주만에 4만명 가까운 관객을 모았다. 수입배급사인 티캐스트는 완벽한 롱런 전략으로, 향후 수개월간 장기 상영을 통해 영화를 흥행시키겠다는 계획으로 보인다. 한국 극장가에서 예술영화는 2~3주 개봉이 한계이다. 히라야마의 인기가 국내 예술영화의 배급 구도에도 변화를 불러 오고 있는 셈이다.

야쿠쇼 코지는, 마치 안성기가 한국의 국민배우이듯, 일본의 대표 배우다. 코지는 그간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져 왔지만 이번 영화는 특히 그의 최고작으로 거론되고 있을 만큼 큰 화제를 모으고 있다. 영화를 본 관객들은 히라야마로 분한 야쿠쇼 코지의 대사 없는 연기, 그 무언의 표정 연기에 압도당했다고들 입을 모은다. 새벽에 골목길 비질 소리에 깨어날 때, 옆으로 고개를 살짝 돌리는 그 각진 얼굴에서도 일품의 연기력이 느껴진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코지의 이번 ‘잠에서 막 깨는 연기’는 그가 1996년에 출연했던 오구리 코헤이 감독의 ‘잠자는 남자’에서 이미 한번 시도했던 것이다. 배우가 연기에 앞서 해당 캐릭터에 자신의 얼굴 선과 각까지도 조형할 줄 알아야 하는 존재라면, 이번의 야쿠쇼 코지야 말로 그 전형과 모범을 보여 준 셈이다. 그가 왜 이 영화로 지난 2023년 5월 제76회 칸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는지를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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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쇼 코지는 1956년 1월 1일생이다.(안성기가 1952년 1월 1일생으로 두 사람은 생일이 같다. 둘은 ‘잠자는 남자’에 같이 출연했다.) 올해로 68세다. 너무나 많은 영화에, 너무나 훌륭한 연기를 해왔던 그이기에 특정한 작품 한둘로 그의 연기를 평가하는 건 주마간산과 같은 짓이 된다. 그래도 굳이 얘기한다면 야쿠쇼 코지의 연기는 지극히 내추럴한 것, 그 안에 담겨진 흉포한 무엇, 안과 밖의 이중성이 보여 주는 기이한 자연스러움 같은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존재이며 평범하고 정상적인 나날을 추구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탈을 갈구하는 면이 있다.

우리에게는 오랫동안 수입이 금지돼 왔던 ‘실락원’(1996)에서 코지는 린코(구로키 히토미)라는 유부녀를 만나 걷잡을 수 없이 욕정과 사랑에 빠지는 남자 구키로 나온다. 평범한 직장인으로 단란한 가정을 영위하던 남자와 사랑 없는 결혼 생활에 지친 여자는 결국 동반자살로 끝을 맺는다. 질서정연한 체제인 일본에서 조직(회사원)생활과 가정에 얽매인 삶에 지친 중년남의 유쾌한 일탈을 보여 준 영화는 수오 마사유키 감독의 ‘쉘 위 댄스’(1996)였다. 야쿠쇼 코지가 주연을 맡아 라틴 댄스의 스텝 연기를 소화해 냈던 이 영화는 이후 할리우드로 건너가 리처드 기어와 제니퍼 로페즈 주연의 동명 영화로 리메이크 됐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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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쇼 코지의 최고작 중 하나는 이마무라 쇼헤이 감독의 ‘우나기’(1999)이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중년 남자로 보이는 인물이 신새벽 여명 길에 자전거를 타고 가는 뒷 모습이다. 한참을 자전거를 따라 가던 카메라는 그가 어느 파출소 문을 열고 들어 가면 경악한 표정의 순경들 얼굴을 비춘다. 이윽고 카메라가 턴, 그제서야 남자의 정면을 비추면 온통 피칠갑을 한 야쿠쇼 코지가 매우 평이하고 평화로운 톤과 표정으로 이렇게 말한다. “제가 조금 아까 아내를 죽였습니다.” ‘우나기’는 한국 개봉 당시 일본영화 개봉이 이루어진 직후였던 때라 대단한 흥행을 기록하지는 못했으나 두고두고 평가받는 영화다. 야쿠쇼 코지의 피칠갑 연기는 25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야쿠쇼 코지는 큰 키와 마른 체형으로 제복이 잘 어울리는 배우이기도 하다. ‘일본 패망 하루 전’ 같은 전쟁 영화, ‘세키가하라 대전투’에서의 도쿠카와 이에야스 역, ‘13인의 자객’에서의 사무라이 역 등등 현재와 과거를 종횡무진 누비며 갖가지 인물들을 연기해 왔다. 출연 영화만 70편이 넘는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다룬 넷플릭스 드라마 ‘더 데이즈’에서 후쿠시마 제1원자력 발전소 소장도 연기했다.

엔딩 장면, 향후 10년 최고로 꼽힐 듯
야쿠쇼 코지 츨연작
‘퍼펙트 데이즈’의 연출을 맡은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는 세 가지가 유명한 사람이다. 하나는 일본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열혈 숭배자라는 것이다. 오즈 야스지로에게 존경을 표하기 위해 ‘도쿄가’라는 작품을 만들었다. 또 하나는 에드워드 호퍼를 매우 좋아 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영화의 매 쇼트(shot)를 호퍼 그림처럼 찍었을 정도였고 바로 그런 영화가 ‘돈 컴 노킹’(2006)이었다. 마지막으로 빔 벤더스는 평생을 주로 아티스트를 다루는 작품을 찍었다. 쿠바 재즈를 다룬 ‘부에나비스타 소셜클럽’과 피나 바우쉬에 대한 다큐인 ‘피나’를 위시해 ‘데니스 호퍼 : 언이지 라이더’ ‘카를로 디 팔마의 영화세계’ 등등이 그것이다.

‘퍼펙트 데이즈’는 에드워드 호퍼 식으로 찍되 야스지로 같은 영화로 만들면서 이를 야쿠쇼 코지라는 아티스트를 위한 영화 같은 느낌을 준다. ‘퍼펙트 데이즈’의 마지막 원 쇼트 롱 테이크 장면, 히라야마가 운전을 하면서 울다가, 미소짓다가, 울다가 하는 모습은 아마도 향후 10년 정도는 최고의 엔딩 장면으로 꼽힐 것이다. 60이 넘은 배우가 끊임없이 진화하고 노력하고 있다는 걸 보여준다. 사람들이 감동하는 건 바로 그 대목에서다. 명배우는 명작과 함께 결코 사라지지 않는 존재이다. 오랜 시간 동안, 혹은 종종, 불멸의 모습으로 기억된다.

오동진 영화평론가. 연합뉴스·YTN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이후 영화주간지 ‘FILM2.0’창간, ‘씨네버스’ 편집장을 역임했다.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컨텐츠필름마켓 위원장을 지냈다. 『사랑은 혁명처럼 혁명은 영화처럼』 등 평론서와 에세이 『영화, 그곳에 가고 싶다』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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