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배의 공간과 스타일] [245] 수도원 맥주

박진배 뉴욕 FIT 교수, 마이애미대학교 명예석좌교수 2024. 7. 19.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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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발(Orval) 맥주 상표. 11세기 초 청혼 반지를 샘물에 빠트리고 슬픔에 빠져있던 귀족 처녀 앞에 물속에서 반지를 물고 솟구친 송어의 전설이 이 브랜드의 로고로 디자인되어 있다./박진배 제공

우리나라에서도 맥주의 취향이 다양해지면서 수제 맥주를 찾는 수요가 늘고 있다. 그중 특별한 품목 중 하나는 수도사들이 만드는 ‘트라피스트 맥주(Trappist Ale)’일 것이다. 1089년 유럽의 수도회에서 만들기 시작해서 ‘애비(Abbey·수도원 또는 성당의 뜻) 맥주’로도 불린다. 곡물은 수도원의 담장 안에서 키워야 하며 수도사의 엄격한 품질 관리가 필수 조건이다. 현재는 벨기에의 여섯 곳, 네덜란드의 두 수도원 맥주가 공식 인증돼 있다. 8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레페(Leffe), 가장 먼저 ‘트라피스트’ 이름을 사용한 시메이(Chimay) 등이 잘 알려져 있다.

‘황금의 계곡(Val d’Or)’이라는 뜻으로 이름 붙여진 오르발(Orval) 수도원은 프랑스 국경에서 멀지 않은 벨기에 부이용(Bouillon) 마을에 위치한다. 11세기부터 수도사들이 이곳에 정착하면서 1132년 수도원을 건립했다. 번성하던 수도원은 프랑스혁명 때 왕과 성직자의 권력 상징으로 간주돼 불태워지고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후 전쟁으로 건물은 더욱 파괴됐고, 이를 복구하면서 1931년부터 본격적인 양조를 시작했다. 포도를 길러 와인을 만들기 적합하지 않은 벨기에 날씨여서 대안으로 곡물을 이용해 맥주를 만들었다. 하나의 생활 공동체로 농사를 짓고 빵이나 치즈 등을 만들어 자급자족했던 전통을 이어간 것이다. 현재 수도원은 폐허로 남아있는 본당과 부서진 벽들은 그대로 남겨둔 채 정원으로 꾸미고 신도와 방문객들을 맞이한다. 식물과 약초를 키우던 텃밭은 그대로 보존돼 아직도 사용하고, 박물관에는 약을 제조하던 기구 등이 전시돼 있다.

오르발 맥주는 알코올 6.2도의 페일 에일(Pale Ale) 단일 종류로만 생산되는데, 맥아와 호프의 조화가 절묘해서 “트라피스트의 여왕”이라는 별명을 지닌다. 상온에서 마시지만 상쾌함이 일품이다. 짧은 와인 잔처럼 생긴 전용 맥주잔 또한 특별하다. 11세기 초 청혼 반지를 샘물에 빠트리고 슬픔에 빠져있던 귀족 처녀 앞에 물속에서 반지를 물고 솟구친 송어의 전설은 이 브랜드의 로고로 디자인되어 있다. 맥주를 통해서 수도원이 부활한 스토리텔링이 신선하다. 여름은 맥주의 계절이다.

오르발 수도원(Abbaye Notre-Dame d’Orval). ‘황금의 계곡(Val d’Or)’의 별명을 가진 이곳에 11세기부터 수도사들이 정착하면서 수도원을 건립했다./박진배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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