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민의 문화이면] 정신승리 감별법
나쁜 상황도 좋은 상황 왜곡
무력감 견디는 방법이지만
습관화 되면 약보단 독 돼
만사에 정신승리 적용보단
주어진 목표엔 최선 다하되
완벽함 너무 얽매이지 말고
부차적인 일에만 적용해야
요즘 주변을 보면 정신승리법을 삶의 기술로 삼는 사람이 많다. 루쉰의 '아Q정전'에서 처음 쓰인 이 말은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을 좋은 상황이라고 왜곡해 인식함으로써, 정신적 자기 위안을 하는 행위를 이른다. 작품 속 아큐가 동네 건달들에게 두들겨 맞은 뒤 '아들뻘 되는 놈들인데 아들과 싸울 순 없지'라며 정신승리를 한 것에서 루쉰은 하층 민중의 정신 상태와 마음가짐, 삶을 견디는 그들만의 방식을 읽어냈다.
정신병리학적으로 볼 때 정신승리는 자아 보호의 필수불가결한 도구다. 어차피 세상은 우리가 감당하기 힘든 것들로 가득하다. 그것들과 대결해 전부 패배한다면 어떤 정신이 그 무력감을 견디겠는가. 적절히 선별해 바보 취급하는 게 내 정신 건강에 이롭다는 건 당연지사다. 친구의 연봉이 자기보다 몇 배나 더 높다면 부러워하기보다는 '진짜 부자에 비하면 새 발의 피'라는 식으로 인식하는 게 마음에 위로가 된다.
다만 정신승리가 습관이 돼버리면 약보다는 독이 될 것이다. 삶은 정직하게 맞서서 이겨내고 견뎌내야 우리에게 더 많은 것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상에서는 안타깝게도 정신승리라는 말로 너무 쉽게 회피하거나 희화화하는 경향이 짙다. 가령 서울에서 지방으로 출퇴근하는 사람들이 지역 차별적인 발언으로 정신승리를 외칠 때는 아주 거슬린다.
반면, 기묘하게 긍정적으로 삶을 바꾸어 가는 정신승리법도 있다. 최근 알게 된 한 작가의 이야기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하고 싶은 게 소설 쓰는 것밖에 없었다. 시장 바닥에서 자라 10대가 되기 전부터 장사에 나섰던 그는 매대에 올라가 "골라, 골라" 하는 판매의 귀재였다. 어찌나 물건을 잘 팔았는지 20대 시절 도매시장에서 옷을 받아와 낮에 다 팔고 저녁에 또 물건을 떼어 와 야시장에서 팔 정도였다. 그렇게 모은 돈으로 그럴듯한 사업체도 꾸렸지만 삶의 내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았다. 출장이 잦아 글을 쓸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가 돈으로는 행복해질 수 없는 유형의 인간이라는 걸 아주 젊은 나이에 알아버렸다.
그 후 그의 삶은 극단적인 방향 전환에 이은 궁핍한 작가 생활로 이어진다. 사업체를 가족에게 맡기고 그 자신은 혈혈단신 서울로 올라와 방 한 칸을 빌려 생활했다. 각종 잡지 기사, 자서전 대필로 돈을 벌고 나머지 시간엔 소설을 썼다. 수익은 한 달에 150만원 정도 됐지만 상당 금액을 집에 부쳐야 했기 때문에 생활을 꾸리기엔 너무 빠듯했다. 그래서 먹는 걸 줄이고, 사람을 만나지 않고, 술도 끊었다. 사람을 만나지 않으니 옷값도 들지 않았다. 과일은 끊을 수 없어 제철 과일이 쏟아질 때 가장 저렴한 것을 골라서 샀다. 어쩔 수 없이 친구들 모임에 나갈 때면 상황을 아는 친구가 음식비며 교통비를 챙겨줘야 했다. 그의 결단과 실행력은 엄청났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많은 정신승리법도 사용해야 했다. 축의금이나 조의금을 보내지 못할 때, 집에 일이 생겨도 가보지 못할 때,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할 때 그는 '글쓰기'를 끌고 와서 방패막이로 삼았다. 가장 힘든 건 방패막이로 사용한 글쓰기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일이었다. 사람이란 집에서 일을 하면 나태해지기 마련이지만 그는 매일 서너 시간을 책상에 앉아서 글을 썼다. 글이라는 게 그 속성상 잘 써지는 날이 드물고 진입장벽도 높다. 그는 글쓰기 초반의 어려움을 이겨내는 다양한 방법을 고안해냈다. 스토리가 나아가지 않으면 인물들 묘사만 쭉 한다든지, 장소 묘사만 쭉 한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겨냈다. 대부분의 경우 30분 이상 계속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글쓰기에 몰입할 수 있었다. 글의 완성도에 있어서도 그는 일종의 정신승리를 한다. 프로페셔널하려고 하지만 끝도 없이 완벽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적절한 시기에 손을 놓고 여기까지가 지금의 나로서는 가장 잘해낸 거라고, 최선을 다했다고 여긴다.
이 작가의 모습에서 나는 정신승리의 이상적 모델을 발견했다. 첫째는 중요한 것과 부차적인 것을 나눠서 정신승리는 부차적인 것에서만 한다는 점이다. 둘째는 중요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고 결코 변명하거나 자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을 중심으로 견결하고 소박하게 삶을 꾸려 가는 그의 정신승리법은 아름다웠다.
[강성민 글항아리 대표]
Copyright © 매일경제 & mk.co.kr.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 “한국여자 맘에 들면 전세계서 먹힌다”...국내 들어오는 콧대 높은 브랜드 어디? - 매일경제
- 이준석 “조국 딸 조민이랑 왜 결혼했냐 따지는 어르신 많다” - 매일경제
- 보자마자 ‘예약 대박’ 국산車…4일간 ‘2만5000대’ 신기록, 토레스 이겼다 [카슐랭] - 매일경제
- “전 남친에게 보여줄게”…女고생 성고문 생중계한 중학생, 대체 뭔일? - 매일경제
- “6분에 한번 꼴로 강간 발생”…젠더 폭력 심각한 ‘이 나라’ - 매일경제
- “행복감 느끼다 순식간에 죽는다”…안락사 캡슐 서비스 임박 - 매일경제
- “연진이 죄수복?” 한국 올림픽 선수단 단복 조롱한 중국 - 매일경제
- 멜라니아보다 한 살 많은 앵커 출신 ‘예비 맏며느리’...트럼프시즌2 ‘실세’ 되나 - 매일경제
- 나경원 “대표는 커녕 당원자격도 없어” 한동훈 “디테일 없는 상상력뿐” - 매일경제
- 홍명보 감독, 오랫동안 냉대했던 ‘캡틴’ 손흥민 만난다...과연 어떤 말 할까 - MK스포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