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자인가 씻김인가, 그것이 문제로다[이주영의 연뮤덕질기](29)
셰익스피어 열풍이 거세다.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 유럽 연극의 르네상스 시기 명작을 쏟아낸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품은 세계 각지에서 매일 상연 중이라 할 만큼 공연계 단골 메뉴다. 하지만 올해처럼 중·대극장 작품이 연달아, 심지어 같은 시기에 같은 작품을 여러 프로덕션이 상연하는 경우는 해외에서도 흔치 않다. 대부분 전석 매진이거나 그에 준하는 인기몰이를 이어가 공연계 종사자들도 놀라고 있다.
시작은 신시컴퍼니의 세 번째 시즌 <햄릿>(손진책 연출·배삼식 극본·이태섭 무대)이다. 2016년 내로라하는 중견 연극배우들을 필두로 연극 <햄릿> 초연을 전석 매진으로 한 달여 상연한 신시컴퍼니는 2022년 같은 창작진들과 새로운 시도를 했다. 주요 배역은 청년 배우들로, 조·단역은 중장년 유명 배우들로 캐스팅한 역발상으로 매진을 기록했다. 현재 상연 중인 같은 맥락의 세 번째 시즌 <햄릿>은 이런 여정에 힘입어 3개월 장기공연 중이다.
셰익스피어 4대 비극의 리더 격인, 광기와 죽음이 가득한 3시간짜리 대작 연극 <햄릿>이 상연 중인 서울 종로구 홍익대 대학로 아트센터 대극장 로비에서 단체관람 온 초등학생들을 보는 필자의 마음은 괜히 벅차올랐다. 동서양 불문하는 고전을 예술적으로 재현한 공연을 어린 시절에 체험할 수 있는 문화적 인프라가 새삼 인식돼서다. 공연의 메카인 영국 웨스트엔드, 뉴욕 브로드웨이에서나 시도할 만한 도전이자 가능한 풍경이다.
“공연계, 셰익스피어 인기몰이에 놀라”
두 번째 <햄릿>(부새롬 연출·윤색, 정진새 각색, 박상봉 무대)은 국립극단의 2024년 라인업 중 한 작품이다. 2019년 기획돼 2020년 상연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로 온라인 상연만 했다. 이번이 명작을 무대 위에 올린 첫 관객 대면작이다. 온라인으로 본 관객들의 기대가 커서인지 서울 중구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과 동시에 한 달여 동안 매진을 이어갔다. 세 번째 <햄릿>(신유청 연출)은 예술의전당이 제작한다. 오는 10월 18일부터 한 달여 상연할 계획으로 프리 프로덕션(준비) 중이다.
현재 상연 중인 두 가지 버전의 <햄릿>은 대척점에 자리한다. 신시컴퍼니의 <햄릿>은 정통적인 햄릿을 현대적인 미장센으로 재해석한 교과서적인 작품이다. 캐릭터 분석과 만연체 대사는 셰익스피어 원작을 대부분 재현했다. 중점적으로 봐야 할 것은 무대예술이다. 검정 무대디자인은 생과 사, 인간과 유령의 경계를 넘나들게 동선을 안배해 현실과 꿈을 넘나든다. 영상디자인과 시적인 안무, 죽음의 강을 넘나드는 습기 가득한 향취와 안개 같은 미스트 효과 등은 오감을 생생하게 자극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어선 부질없음과 원혼을 위무하는 씻김(이승에 맺힌 원한을 씻고 극락에 가도록 한다는 뜻)이 작품의 전반적인 세계관을 형성한다. 모두 사망하는 순간 천장에서 뿌려지는 안개 같은 미스트는 그들의 원혼을 씻어 사후의 세계로 인도하는 제례이기도 하다. 전무송·박정자·손숙 등 노장 연극인들이 이를 풍자하는 배우와 선왕의 영혼 등으로 등장해 청년세대 햄릿(강필석·이승주 분)과 오필리어(루나 분)의 혼돈과 절망을 묵도하고 받치는 역할을 한다.
국립극단의 <햄릿>은 햄릿이 왕자가 아닌 공주라는 상상을 더해 각색했다. 기본 설정은 그대로 두고 원작을 곱씹을수록 드러나는 틈새에 현대적인 논리를 덧대니 강력한 정치 풍자극이 됐다. 해군 장교로 복무 중이던 덴마크 왕위계승 서열 2위인 햄릿 공주(이봉련 분)는 갑작스러운 부왕의 죽음에 본국으로 돌아오지만, 삼촌 클로디어스(김수현 분)가 어머니 거트루드(성여진 분)와 결혼해 국왕이 된 후다. 슬픔과 분노로 절망에 빠진 햄릿 공주는 선왕의 유령이 토해내는 억울한 죽음을 진실로 받아들인다.
정의를 위해, 생존을 위해 미치광이인 척하며 삼촌의 악행을 고발하고 왕위에 대한 정당성을 되찾고자 고군분투한다. 치열한 궁중 암투와 골육상잔이 벌어지고 모두 죽어 쏟아지는 폭우 속으로 사라진 자리에 노르웨이의 왕자 포틴 프라스가 등장해 왕좌를 차지, 전쟁과 폭력으로 점철된 독재국가를 건설한다. 감정과 사색에 빠져 민중은 외면하고 각자의 정의만 주장하는 ‘헛짓거리’로 전쟁이 시작된다는 경고와 자성의 작품으로도 읽힌다.
<맥베스> 역시 <햄릿> 못지않게 올해 많이 공연됐다. 중극장 작품으로 청각장애 배우 6인이 등장한 힙합 세계관의 유혈낭자극 <맥베스>(김미란 각색 연출·송성원 무대)가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서 선보인 데 이어 샘컴퍼니가 <맥베스>(양정웅 연출, 여신동 무대·조명)를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상연 중이다. 소극장인 서울 서대문구 신촌극장 <맥베스>(임성현 연출, 백소정·임성현 등 각색)도 같은 기간에 공연하고 있는 데다 작년 12월 말 상연한 뮤지컬 <맥베스>(조윤지 연출·김은성 작가·박천휘 작곡)까지 가세해 <햄릿> 못지않은 인기를 얻고 있다.
“‘아름답고 추한 것’ 경계 만끽하게 될 것”
최근 베일을 벗은 샘컴퍼니의 <맥베스>는 맥베스(황정민 분), 레이디 맥베스(김소진 분), 뱅코우(송일국 분) 등의 초호화 캐스팅으로 거의 전석 매진을 기록했다. 오프닝의 까마귀 떼가 객석을 저공 비행하는 광경과 세 마녀가 절단된 시신, 특히 잘린 머리를 들고 농담하는 장면까지 을씨년스러운 전쟁의 공간을 체감하게 이끈다. 영상 휴대전화기와 게임기가 혼재된 시공간 불문의 무대디자인은 중세 이야기가 아닌 동시대 이야기로 끌어당기는 오브제이기도 하다. 스코틀랜드 전쟁영웅 맥베스와 레이디 맥베스가 세 마녀의 예언에 휘둘려 수많은 살상을 자행하고 어떻게 자멸해가는지 현대적 미장센으로 스펙터클하게 담아냈다.
필자는 국립극단 연극 <햄릿> 기자간담회에서 만난 창작진들에게 최근 관객들 사이에 불고 있는 셰익스피어 열풍에 관해 질문한 적이 있다. 부새롬 연출은 “이 작품 모두 창작자들이 해석한 동시대 리액션들인데 왜 지금 하필 셰익스피어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도 질문이 생긴다. 왜 그럴까? 왜 지금 햄릿이고 맥베스일까? 왜 올해 한꺼번에 약속이나 한 듯 동시에 상연 중인 걸까?”라며 질문을 되돌려준다. 정진새 작가는 “한국 관객들이 연극에 대한 문해력·독해력이 좋아진 듯하다. 셰익스피어 정도는 충분히 즐기면서 수용할 수 있다는 문화적 자신감이 높아지고 선진국의 관객으로서, 낯설어했던 고전 원작을 누락 없이 즐길 수 있는 시대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고 말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청년 창작진들의 시선처럼 셰익스피어 공연 열풍은 관객들에게 행운이다. 오는 여름휴가에는 문화 강국의 장점을 누리며 새로운 셰익스피어와 만나길 추천한다. <맥베스>의 세 마녀가 읊조린 ‘아름답고 추한 것, 추하고 아름다운 것’의 경계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 국립극단 부새롬 연출 <햄릿>은 오는 7월 29일, 신시컴퍼니 손진책 연출 <햄릿>은 오는 9월 1일, 샘컴퍼니 양정웅 연출 <맥베스>는 오는 8월 18일까지 상연한다.
이주영 문화 칼럼니스트·영상학 박사
Copyright © 주간경향.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