갓 블레스 트럼프… 대관식이 돼가는 유세장

정인환 기자 2024. 7. 19. 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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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미수 사건이 모든 논란을 잠재워… 민주당에는 ‘질서 있는 퇴각’이 나쁘지 않은 선택으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24년 7월13일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에서 선거 유세 도중 총격을 당한 직후 성조기가 나부끼는 연단 위에서 지지자들을 향해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이고 있다. AP 연합뉴스

대선이 넉 달도 남지 않은 시점에 벌어진 ‘암살 미수’ 사건은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을 둘러싼 모든 논란을 잠재웠다. 가짜뉴스와 극한의 갈라치기로 정치적 폭력을 부추겼던 장본인이 그 폭력의 피해자가 됐다. 이제 아무도 그를 비난할 수 없게 됐다. 성조기 아래서 경호요원에 둘러싸여, 피를 흘리면서도 움켜쥔 주먹을 들어 보이며 “싸우자”(파이트)고 외치는 그의 모습은 ‘영웅의 귀환’을 떠올리게 했다. 생사의 기로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한 그는 쇠락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어줄 ‘구세주’로 그려졌다. 이제 누구도 그를 막기 쉽지 않아졌다.

2016년 트럼프 전 대통령을 탄생시킨 러스트벨트

미국 북동부 펜실베이니아주 제2대 도시 피츠버그에서 북쪽으로 약 50㎞ 떨어진 곳에 독립전쟁의 영웅 리처드 버틀러 장군의 이름을 딴 소도시가 있다. 버틀러는 20세기 초 자동차와 철강 산업을 중심으로 번성한 제조업의 중심지인 ‘스틸(강철)벨트’의 일원이었다. 미 북동부와 중서부 일대 펜실베이니아·오하이오·웨스트버지니아·인디애나·일리노이·미시간·위스콘신 주 등이 ‘스틸벨트’를 형성하고, 생산직 노동자(블루칼라)의 삶을 중산층 수준으로 끌어올렸다.

하지만 1950년대 중반 정점을 찍은 미국의 제조업은 이후 하락세로 돌아섰다. 1980년대 중반에 이르면 ‘스틸 벨트’는 미국 제조업의 몰락을 상징하는 ‘러스트(쇠에 슨 녹)벨트’란 이름으로 대체됐다. 1950년대 2만3천여 명이던 버틀러의 인구가 2024년 1만3천여 명까지 줄어든 것도 이 때문이다. ‘러스트벨트’에 쌓인 분노가 2016년 트럼프 전 대통령을 탄생시켰다.

2024년 7월13일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펜실베이니아주 버틀러에서 선거 유세 도중 총격을 당하자, 플로리다주 팜비치에 있는 마러라고 자택 앞으로 몰려든 지지자들이 고개 숙여 쾌유를 빌고 있다. AFP 연합뉴스

버틀러 서쪽 외곽 ‘에번스 시티로드 625번지’에 해마다 농축산업 박람회가 열리는 ‘버틀러 팜 쇼 그라운드’가 있다. 2024년 7월13일 오후 그곳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 유세가 열렸다. 지지자 수백 명이 연단 앞뒤를 빼곡히 채웠다. 미 의회방송 <시스팬>(C-SPAN)의 현장 중계화면을 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오후 6시3분께 넥타이를 매지 않은 짙은 색 정장 차림에 빨간색 ‘마가’(MAGA·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모자를 눌러쓴 채 무대에 올랐다. 환호성이 유세장을 가득 메웠다.

“미국인이란 게 자랑스럽다. 적어도 미국에서 나는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권리를 내게 주기 위해 죽어간 모든 이들을 잊지 않겠다. 그리고 당신들 곁에 나란히 서서, 오늘도 미국을 지킬 수 있어 기쁘다. 내가 이 땅을 사랑한다는 점엔 추호의 의문도 없으니까.” 유세 때마다 등장하는 <갓 블레스 더 유에스에이>(신께서 미국을 축복하시길) 떼창이 끝난 6시5분께 트럼프 전 대통령이 인사말과 함께 연설을 시작했다.

“저 사람이 총을 가졌다. 지붕 위에, 저 사람이 총을 가졌다.” 갑자기 청중 한 명이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6시11분께 불법 이민자 문제를 거론하던 트럼프 전 대통령이 ‘탁’ 소리와 함께 오른쪽 귀에 손을 댔다. 피가 묻어났다. ‘탁, 탁.’ 같은 소리가 두 번 더 들렸다. 그는 이미 연단 바닥에 엎드린 상태다. 놀란 청중이 우왕좌왕 몸을 숙이는 사이 ‘다다다다다.’ 다섯 차례 소리가 들렸다. 경호요원 4명이 순식간에 연단으로 뛰어올라 트럼프 전 대통령의 몸을 감싸 ‘인간 방패’를 형성했다. 어디선가 처절한 비명이 두 차례 길게 이어졌다.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미국 공화당 전당대회 개최지인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2024년 7월13일 주민들이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피격 소식을 텔레비전으로 지켜보고 있다. AFP 연합뉴스

‘기다리라’ 외친 뒤 성조기 앞에서 올린 손

“총격범 사망, 총격범 사망. 이동해도 되나? 이동하겠다.” 다급한 무전 소리와 함께 경호요원들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일으켜 세웠다. 첫 총성이 울린 지 꼭 1분 뒤다. 귀에서 흘러내린 핏줄기는 이미 얼굴로 번지고 있었다. 벗겨진 신발을 찾던 그가 문득 “기다리라”고 외치더니, 경호원에게 둘러싸인 채 팔을 들어 올리며 외쳤다. “파이트, 파이트, 파이트.” 웅성거리던 청중이 열광적으로 화답했다. “유에스에이, 유에스에이, 유에스에이.” 무대 위쪽에 걸린 성조기가 피 묻은 그의 얼굴 위에서 펄럭였다.

총격범은 현장에서 사살됐다. 무엇이 스무 살 청년 토머스 매슈 크룩스를 ‘암살 미수범'으로 만들었는지는 미궁에 빠질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암살 미수 사건이 ‘피해자'에게 막대한 정치적 자산이 됐다는 점이다. 사건 직후 인근 병원으로 옮겨져 치료를 받은 트럼프 전 대통령은 2시간 남짓 만에 퇴원했다. 그는 7월14일 공화당 전당대회(7월15~18일)가 열리는 위스콘신주 밀워키에 예정대로 도착했다. 그는 소셜미디어를 통해 “총격범이든 잠재적인 암살범이든, 내 정해진 일정을 바꿀 순 없다”고 강조했다. 위협에 맞서는 단호함, 부상에 굴하지 않는 강인함을 부각한 셈이다.

“누가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될 것인지에 의심의 여지가 있나? 기도는 응답받는다. 미국은 신앙에 기반을 둔 나라다. 기도는 이뤄진다. 도널드 트럼프는 아주 살짝 고개를 돌렸고, 그래서 총알이 그를 피해갔다. 그렇게 목숨을 부지했고,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될 수 있게 됐다. 우린 오랫동안 신께서 미국에 변화를 가져다줄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 신께서 현 정부를 집으로 돌려보내려 하신다.”

2024년 7월15일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열혈 지지자인 래퍼 포지아토 블로가 ‘탄핵당하고 체포되고 유죄 선고받고 총 맞았어도 여전히 건재하다’고 적힌 티셔츠를 입고 있다. AFP 연합뉴스

대선 후보 선출을 위한 공화당 전당대회 첫날인 7월15일 컨트리 가수 리 그린우드가 짤막한 연설로 행사장을 달궜다. 그가 1984년 5월 발매한 세 번째 음반에 <갓 블레스 더 유에스에이>가 수록됐다. 석 달 뒤인 그해 8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대통령의 재선 도전을 확정 짓는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울려 퍼진 이 노래는 이후 공화당의 ‘비공식 당가’가 됐다. <폭스뉴스>의 현장중계 화면을 보면, 그린우드의 노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귀에 붕대를 댄 트럼프 전 대통령이 통로를 지나 천천히 행사장 안으로 들어섰다. 함성이 메아리쳤다. 그가 팔을 들어 흔들자, 청중들은 “파이트, 파이트, 파이트”로 화답했다. 흐뭇한 미소가 그의 얼굴에 가득했다. 성대한 ‘대관식’의 서막이었다.

부통령 후보는 ‘힐빌리’ 밴스 후보

트럼프 전 대통령은 이날 초선 연방 상원의원 제임스 데이비드(제이디) 밴스를 부통령 후보로 지명했다. 애초 ‘반트럼프’ 성향이 강했던 밴스 후보자는 2022년 중간선거 때 연방 상원의원에 당선된 뒤 태도를 바꿔 ‘친트럼프’로 돌아섰다. 그의 젊은 나이(39)는 트럼프(78) 전 대통령의 약점은 보완하고, 조 바이든(81) 대통령의 ‘고령 리스크’는 부각할 것이다. 러스트벨트에 속한 오하이오주 빈민 가정에서 태어나 자력으로 ‘인생역전’을 이뤄낸 경험은 격전지(스윙스테이트)에서 백인 노동자층의 호감을 살 것이다. 치밀한 계산에 따른 선택인 셈이다. 밴스 후보자는 2016년 펴낸 자서전 <힐빌리의 노래>(한국어판 김보람 옮김, 흐름출판 펴냄, 2017년) 서문에서 이렇게 썼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2024년 7월16일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열린 공화당 전당대회 이틀째 행사를 제이디 밴스 부통령 후보자(앞줄 오른쪽)와 함께 귀빈석에서 지켜보고 있다. EPA 연합뉴스

“나는 백인이긴 하나, 북동부에 거주하는 미국의 주류 지배 계급인 와스프(WASP·백인 앵글로색슨계 개신교도)는 아니다.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의 핏줄을 타고난데다 대학 교육을 받지 못한 수백만 백인 노동 계층의 자손이다. 우리에게 가난은 가풍이나 다름없다. (…) 미국인들은 이런 부류의 사람을 힐빌리(Hillbillies), 레드넥(Rednecks), 화이트 트래시(White Trash)라고 부르지만, 나는 이들을 이웃, 친구, 가족이라고 부른다.”

이번 전당대회에서 공화당은 ‘단합’을 으뜸 구호로 내걸었다. 대회 이틀째인 7월16일 대선 후보 경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과 맞붙었던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와 니키 헤일리 전 주유엔 대사가 지지연설에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 디샌티스 주지사는 “적들이 오전 10시부터 오후 4시 사이에만 공격하는 건 아니다.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일할 수 있는 군 통수권자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고령 탓에 업무시간을 줄인 것으로 알려진 바이든 대통령을 향한 조소다. 경선 막판까지 트럼프 전 대통령과 날을 세웠던 헤일리 전 대사는 연설 시작과 함께 “한 가지 분명히 해야겠다. 나는 도널드 트럼프를 강력하게 지지한다”고 강조해 박수갈채를 받았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2024년 7월13일 사저가 있는 델라웨어주 러호버스비치의 경찰서에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피격 사건을 비판하는 긴급 성명을 발표한 뒤 행사장을 빠져나가고 있다. AFP 연합뉴스

마지막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단합’은 민주당에도 화두다. ‘재앙’이라던 첫 번째 대선 후보 토론회(6월27일) 이후 불거진 ‘후보 교체론’ 대신 바이든 대통령을 중심으로 통합·단결해야 한다는 목소리에 아연 힘이 실리고 있다. 트럼프 전 대통령의 기적적 생환에 전당대회 효과까지 더해져 지지율 격차가 벌어지면서, “대선은 이미 끝났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어서다.

역으로 바이든 대통령으로선 완주를 고집했다가 패배의 책임을 온전히 혼자 짊어지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판세가 이대로 굳어진다면, 대선뿐 아니라 연방 상·하원의원 선거 전망도 암울할 수밖에 없다. ‘질서 있는 퇴각’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 될 수 있는 상황이란 뜻이다.

“공개적 후보 교체 요구는 잦아들었지만, 개별적인 물밑 설득 노력은 계속되고 있다.” <시엔엔>(CNN) 방송은 7월15일 민주당 고위 관계자의 말을 따 “최신 여론조사 결과를 대통령과 참모들에게 전달하면서 ‘자칫 모든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고 전했다. 시간이 갈수록 ‘대체 후보’ 찾기도 어려워질 터다. 민주당은 반전을 위한 ‘마지막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세계가 지켜보고 있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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