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 위원장 “오르반의 러시아 방문은 유화정책” 맹비난

김태훈 2024. 7. 19.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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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유화정책'(appeasement)이란 표현을 써가며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를 강하게 질타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오르반 총리가 순전히 헝가리 정상 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며, 그와 푸틴의 만남은 헝가리·러시아 양자외교의 틀 안에서 이뤄졌을 뿐 EU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오르반 총리의 대(對)러시아 외교를 유화정책이라고 부르며 거듭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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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 총리의 대러 외교정책 강력 규탄
“푸틴이 원하는 것 그대로 따라하는 셈”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유화정책’(appeasement)이란 표현을 써가며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를 강하게 질타했다. 외교적 양보를 뜻하는 유화정책은 1930년대 영국 정부가 히틀러의 나치 독일에 취한 저자세 외교를 비판적으로 언급할 때 흔히 쓰인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EU) 집행위원장이 18일(현지시간) 유럽의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이날 실시된 위원장직 연임 표결에서 이겨 앞으로 5년간 더 EU를 이끌게 됐다. AFP연합뉴스
18일(현지시간) AFP 통신에 따르면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이날 유럽의회에서 EU 공동의 외교·국방 분야 정책을 주제로 연설하는 동안 오르반 총리를 맹비난했다. 지난 5일 그가 러시아에 가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만난 점이 질타의 근거가 됐다. 헝가리는 7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6개월간 EU 이사회 순회 의장국을 맡고 있다. 그런데 오르반 총리는 이를 활용해 푸틴 앞에서 자신이 EU의 대표인 양 행세해 다른 회원국들의 공분을 샀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오르반 총리가 순전히 헝가리 정상 자격으로 모스크바를 방문했으며, 그와 푸틴의 만남은 헝가리·러시아 양자외교의 틀 안에서 이뤄졌을 뿐 EU와는 무관하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당시 오르반 총리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관해 얘기하며 푸틴에게 “평화로 가는 가장 빠른 방법이 알고 싶다”고 말했다. 그가 전쟁 중인 두 나라 사이에서 중재자라도 되는 것처럼 행동한 셈이다. 이에 푸틴도 오르반 총리에게 “EU의 대표 자격으로 온 것으로 이해한다”며 “EU 회원국들의 의견을 듣고 싶다”고 말했다.

오르반 총리의 이같은 행동을 ‘외교적 불량행위’라고 규정한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러시아는 유럽과 서방이 자국을 부드럽게 대하는 것에 기대를 걸고 있다”며 “그런데 유럽의 일부가 이를 따라하는 형국”이라고 꼬집었다. 헝가리가 푸틴의 장단에 놀아나고 있다는 지적이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오르반 총리의 대(對)러시아 외교를 유화정책이라고 부르며 거듭 비판했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18일(현지시간) 영국에서 열린 유럽정치공동체(EPC)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동하는 도중 취재진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AFP연합뉴스
유화정책이란 1930년대 히틀러의 나치 독일이 국제법을 어기고 무력으로 주변국을 위협하며 영토를 확장하는 동안 영국과 프랑스, 주로 영국 정부가 취한 외교 노선을 지칭한다. 독일의 그릇된 행동을 단호히 막는 대신 은근슬쩍 용인하며 질질 끌려갔다는 뜻에서다. 1938년 독일이 이웃 체코에 독일계 주민이 많이 사는 주데텐란트 땅의 할양을 강요하는 일이 벌어졌다. 히틀러는 “체코가 수용하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협박했다. 이에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4국 대표가 독일 뮌헨에 모여 회의를 열었다.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는 물론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총리조차 ‘독일 요구를 들어주자’는 쪽으로 기울었다. 정작 체코는 자국 운명이 걸린 회의에 대표를 참석시키지도 못한 채 ‘주데텐란트를 독일에 넘기라’는 영국·프랑스의 권고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회의가 끝나고 귀국한 체임벌린은 “이로써 평화가 도래했다”고 강조했으나 그로부터 불과 1년 만인 1939년 9월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벌어지면서 유화정책은 완전히 잘못된 판단이었음이 드러났다. 오늘날 뮌헨회의는 유화정책의 문제점과 한계를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 사례로 곧잘 인용된다.

김태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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