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굴제국 낙원-식민체제 폐허 사이… 명암 공존하는 ‘모순의 도시’[장은수의 도시와 문학]
印북부 갠지스 평원의 천년고도
무굴제국때 당대 최고번영 구가
불평등에 신음하던 민중들 저항
제국쇠퇴 이어 英식민통치 시작
뉴델리로 수도이전후 본격 몰락
소설가 알리 “이름·자부 빼앗겨”
“우리 같은 사람이 많아. 시인 압둘 핫산도 그중 하나지. 아버지는 이슬람교도, 어머니는 힌두교도거든. 그래서 그는 인도 사람에겐 인도의 모든 것을, 이슬람교도에겐 이슬람 국가의 모든 것을 찬양해. (중략) 우리는 이편에도 저편에도 낄 수가 없어. 사람들은 우리를 어지자지인 것처럼 취급하고.”
쿠스완트 싱의 장편소설 ‘델리’의 한 구절이다. 이 작품은 관광안내원 화자인 나를 중심으로 델리의 600년 역사를 현재와 과거를 오가면서 겹겹이 펼쳐낸다. 나와 바그마티의 사랑 이야기가 흐르는 가운데, 방문 유적지를 중심으로 과거 델리 역사를 수놓았던 술탄, 성자, 반역자, 정복자, 시인의 이야기가 다채롭게 이어진다.
상스럽고 못생긴 바그마티는 남녀 양성을 함께 지닌 신비한 존재다. 그녀는 파괴와 번영을 반복하면서 복합적 정체성을 이룩할 수밖에 없었던 델리를 상징한다. 화자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면서도 일정한 거리를 두는데, 이는 몰락해 초라해진 델리가 마음엔 들지 않으나, 절대 떨쳐내지 못할 매력을 지닌 도시임을 암시한다.
작품이 말하듯, 델리는 인도 아대륙 북부 갠지스 평원에 자리 잡은 천년 고도다. 고대부터 여러 침략자가 인도 정복의 발판으로 삼았던 도시로 번영과 침략, 폐허와 재건의 역사를 반복했다. 공식 명칭은 델리 국가 수도 직할구, 그 안엔 수도 뉴델리를 작게 포함하고 있다. 인구는 약 1900만 명, 주변 위성 도시를 합하면 3294만 명에 달한다. 델리는 현재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발전하는 곳으로, 전통과 현대, 부와 가난, 번화하고 깔끔한 거리와 더럽고 혼란한 빈민가가 공존하는 모순의 도시이다.
인도 최초의 서사시 ‘마하바라타’에 따르면, 약 5000년 전 판다바가 크리슈나 신의 도움을 받아서 이곳에 처음 도시를 세우고, 인드라프라슈타란 이름을 붙였다. 델리는 거대한 궁전, 깨끗한 거리, 푸른 초원 덕택에 지상낙원으로 여겨졌다. 이곳에서 고대 인도인은 우주 법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마음껏 부와 쾌락을 추구하는 세속주의와 함께 언제든 이를 버리고 궁극적 해탈을 꿈꾸는 고도의 영성을 발전시켰다. 이러한 정신성은 카스트 제도와 결합해 현재까지 인도인의 삶을 지배하는 핵심 원리가 되었다.
11세기 초 라지푸트가 높은 탑, 단단한 성벽, 거대한 철문으로 이루어진 랄콧 성을 세우면서 델리는 역사에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1192년 이슬람 세력이 들어와서 힌두 세력을 몰아내고 델리를 점령했다. 이로부터 델리를 수도 삼아 600년에 걸친 이슬람 통치 시대가 열렸다. 델리 술탄국은 이슬람과 힌두를 융합해 독특한 아름다움을 이룩했다. 페르시아 건축과 힌두 전통 건축 양식을 결합한, 높이 73m의 붉은 석탑 쿠트브 미나르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유산이다.
1526년 티무르의 후손인 바부르가 이끄는 군대가 쳐들어와 델리 술탄국을 무너뜨리고, 무굴제국을 세웠다. 샤자한 재위 기간(1628~1658)에 무굴제국의 수도로 자리 잡은 델리는 당대 세계에서 가장 번영한 도시에 속했다. 도로가 정비되고 상공업이 발전해 인구가 60만 명에 이르렀다. 이 시기에 붉은 사암으로 쌓아 올린 요새 성곽 랄킬라, 이슬람 사원 자마마스지드, 전통시장 파이즈바자르, 도시 중앙 대로 찬드니초크 등이 건설되었다. 그 아름다움에 만족한 샤자한은 자기 이름을 따서 델리에 샤자하나바드란 이름을 붙였다.
델리 지배자들이 부와 사치를 즐길 때, 민중들은 고통에 처해 있었다. 차별과 불평등에 반대해 박티 시인들은 신 앞에서 누구나 평등하게 행복을 누리는 삶을 찬미했다. “계급 같은 건 묻지 말게, 누구라도 신을 찬미하면 모두 신의 것이 되리니.” 민중들은 신의 사랑이 ‘죄악과 피곤’을, ‘빈곤과 잘못’(툴시다스, ‘람차리트마나스’ 중에서)을 제거하고 고통을 치유해줄 것을 간절히 바랐다.
17세기 말, 관용 정신을 잃은 무굴제국이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를 탄압하면서 저항이 일어나고, 제국은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제국이 약해지자 18세기 중반 영국이 발호해 인도를 점차 먹어들어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소설 ‘체스광’에서 프렘찬드는 영국의 압제에 짓눌린 채 무력한 세월을 보내는 제국의 초라한 모습을 그려낸다. “아무 희망도 없어. 몹쓸 체스 내기가 우리 왕국을 파멸시킬걸세. 조짐이 나빠.” 동인도 회사에 진 빚은 늘어가는데, 체스 내기 도박에 빠져 현실을 잊으려 하는 지배층의 무책임한 행태는 결국 제국의 몰락을 불렀다.
1857년 차별적 처우에 불만을 품던 인도인 용병 세포이가 반영 투쟁에 돌입했다. ‘델리’에서 쿠스완트 싱은 세포이에 동조해 영국을 몰아낼 계획을 수립하는 무굴제국의 마지막 시도를 그려낸다. 그러나 델리 공성전이라 불리는 처절한 전투 끝에 영국이 델리를 함락하면서 무굴제국은 최후를 맞았다. 시인 갈립은 그 참상을 이렇게 전한다. “성난 사자가 도시에 들어서자 그들은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죽이고 집들을 불태웠다.”
1858년 인도를 직접 통치하기로 한 영국은 델리에서 무굴제국의 과거를 지우는 데 몰두했다. 사원을 무너뜨리고, 공공건물을 파괴하며, 요새를 부숴 철도를 건설했다. 시인 바라텐두는 말했다. “영국은 한가득 챙겨서 행복하다네. 돈은 모조리 외국으로 가고 여기엔 쓸모없는 것들만 남지.” 착취의 반대말은 저항이다. 이에 따라 영국 식민 통치에 대한 반발과 투쟁이 갈수록 심해졌다.
1911년 영국은 식민 수도를 콜카타에서 델리로 옮겼다. 천년 수도의 상징성을 빼앗음으로써 인도의 반발을 누그러뜨리려 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웅장한 사원, 붐비는 시장, 구불구불한 골목길로 이루어진 오래된 델리가 아니라 거대한 관청, 높고 곧게 뻗은 거리로 이루어진 새로운 델리를 원했다.
1927년 영국은 샤자하나바드를 내려다보는 자리에 뉴델리 건설에 나서 1931년 그곳으로 수도를 옮겼다. 오늘날 세계 최악으로 여겨지는 델리의 도시 환경은 여기서 비롯했다. 영국인과 인도인의 거주지가 분리되자 옛 델리엔 물 공급, 하수 처리 같은 공공투자가 지연되면서 환경이 급속히 악화했다.
‘델리의 황혼’에서 아흐메드 알리는 식민 지배 이후 몰락하는 델리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델리는 한때 낙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이름과 자부를 앗아가 버렸다. 이제 남은 것이라고는 폐허와 근심뿐.” 옛 성벽은 허물어지고, 전통과 문화는 송두리째 파괴됐다. 알리에 따르면, 이 도시에서 잘 나가는 자들은 오직 무덤 파는 이들뿐이었다. 델리 전체가 죽음의 도시로 변한 것이다.
1947년 인도가 영국에서 독립한 후, 델리의 재건과 부활이 시작됐다. 그러나 영국의 오랜 분할 통치 정책에 따라 갈등이 격화하면서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단됐다. ‘파키스탄행 열차’에서 쿠스완트 싱은 어두움과 파괴를 상징하는 열차에 올라탄 사람들을 통해 조화와 관용을 잃은 도시의 미래를 암시한다. 펀자브 지역에서 시크교도와 힌두교도 약 50만 명이 델리로 강제 이주하고, 이슬람 주민 약 30만 명이 파키스탄으로 떠났다. 다양성과 포용성을 버리고 배타성과 편협성을 택한 결과는 이후 델리의 지속적 골칫거리로 떠올랐다.
‘지복의 성자’에서 아룬다티 로이는 종교의 차이를 빌미로 테러와 학살이 반복되는 델리의 참혹한 현실을 그려낸다. “삶은 계속되었다. 죽음도 계속되었다. 전쟁도 계속되었다.” 1984년에 벌어진 인디라 간디 암살 사건과 이에 대한 보복으로 자행된 시크교도 약 3000명 학살 사건, 2020년 벌어진 힌두 폭도들의 이슬람 신자 학살 사건 등은 그 선연한 예이다. 최근 인도 정부가 공공연히 힌두 민족주의를 내세우면서 사태는 갈수록 악화하는 중이다.
로이는 말한다. “그는, 자신이 늘 옳다고 믿었다. 그녀는, 자신이 완전히, 늘 잘못되었다고 믿었다. 그는, 자신의 확실성으로 인해 축소되었다. 그녀는, 자신의 모호성으로 인해 확대되었다.” 포용성을 버렸을 때 무굴제국은 몰락했다. 불안과 혼란이 델리의 앞날을 삼키지 않게 하려면, 문학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것이다.
출판평론가
■ 용어설명 - 박티(Bhakti)
박티는 중세 인도에서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일어난 힌두 영적 운동이다. 이들은 카스트, 성별, 지위에 상관없이 누구나 신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통해 해탈에 이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카비르, 툴시다스 등 수많은 시인이 박티 운동에 참여하면서 종교적 차별, 사회적 불평등, 카스트 제도의 억압에 대한 저항정신을 일깨웠다. 이들의 작품은 힌두 전통 문학의 최대 성취로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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