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만 남기고 만남 거부한 엄마…‘친부모 알 권리’는? [보호출산]②
앞으로 의료기관은 반드시 출생 사실을 통보해야 하고, 동시에 ‘위기 임산부’는 익명으로 출산하는 길이 마련됐습니다. 정부는 산모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하는 보호출산제를 고려하기 전에 직접 양육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일각에선 여전히 우려의 시각도 존재합니다. KBS가 현장의 의견을 들어봤습니다.
“한편으로는 너를 찾는다는 게 두렵고 무섭기도 했단다. 난 이미 한 가정의 엄마이자 다른 사람과 살고 있어서. 나의 과거를 전혀 알지 못하는 우리 가정을 생각하니 너무나도 무서웠어. 나에겐 또 다른 아이들이 셋이나 있거든.
너에게는 정말 정말 미안한 생각이 들었지만, 현실을 생각하니 어쩔 수가 없었단다. (…) 어떤 말로도 날 이해할수도 감히 용서할 수도 없겠지만, 그래도 날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길 바라.”
-조혜정 씨 어머니 편지 중
친어머니를 알려달라며 정보공개청구를 한 뒤, 조혜정 씨는 한 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성인이 된 이후 입양 가정에서 파양된 조혜정 씨, 친어머니를 찾아 함께 여행을 가고 싶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의 편지로, 더는 자신의 ‘뿌리’를 찾기는 쉽지 않아졌습니다. 입양은 현행법상 친부모의 동의 없이 정보가 공개되지 않아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기 때문입니다.
■ 보호 출산으로 태어난 아동..‘부모 알 권리’는?
보호출산제 역시 친부모의 동의 없이는 관련 개인 정보를 아동 측에 공개하지 않도록 하고 있습니다.
보호 출산 시엔 부모의 정보와 출생 당시 상황 등을 ‘출생 증서’로 남기고, 이 문서는 아동권리보장원에 넘겨집니다.
이후 아동은 성년이 되거나, 미성년일 경우 법정대리인의 동의를 얻어 이 문서를 ‘정보 공개 청구’할 수 있습니다.
다만 관련 법 제17조에서는 “신청인 또는 생부가 동의하지 아니하는 경우에는 그 신청인 또는 생부의 인적사항을 제외하고 출생증서를 공개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즉 보호출산 아동들이 성년이 되어 정보공개청구를 했을 때 친부모가 이를 거절하면, 혜정 씨처럼 더는 자신의 친부모를 알 방법이 없는 겁니다.
혜정 씨는 ‘뿌리’를 평생 알지 못하는 답답함을 보호 출산 아동들도 겪게 될 것이라고 우려합니다.
“(보호출산 아동들은) 보호를 받으면서 태어날 수 있지만 나라는 (친부모의 정보를) 알고 있는데 당사자한테 정보를 주지 않는 거잖아요.”
-조혜정/자립 준비 청년
■ 해외는 어떻게…프랑스 ‘익명 출산’ 아동, 국가 상대 소송도
유럽 등 해외에서는 이미 위기 임산부의 신원을 비밀로 하고 출산하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특히 프랑스와 독일이 제도를 오랫동안 시행하고 있지만, 그 양상은 조금씩 다릅니다.
먼저 프랑스는 ‘익명 출산제(Accouchement sous X)’ 를 통해 친부모의 신원을 철저히 비밀로 보장하고 있습니다.
친부모의 동의 없이는 익명 출산으로 태어난 아동에게 관련 개인정보를 제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보호출산제와 유사한 측면이 있습니다.
이 때문에 1965년 익명 출산 후 입양된 오디브르(Odièvre) 씨는 ‘생모와 형제의 신상을 공개하라’며 국가(프랑스)를 상대로 소송을 걸기도 했습니다.
다만 이 소송은 결국 국가(프랑스)의 승리로 마무리됐습니다. 2003년 해당 판결에서 유럽인권재판소가 “신청인이 혈통에 관하여 차별을 받지 않았다고 판단된다”며 프랑스의 손을 들어준 겁니다.
이 결과는 ‘익명 출생 아동의 알 권리’보다는 ‘생모가 익명성을 보장받을 권리’가 우선된 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독일에서도 지난 2014년부터 ‘신뢰출산제(Vertrauliche Geburt)’가 시행됐습니다.
상담부터 진료, 출산, 입양까지 임산부가 실명을 밝히지 않아도 되고, 출산 관련 비용은 독일 연방 정부가 모두 부담합니다.
다만 독일은 대상 아동이 16살이 돼 친부모에 대한 정보 열람을 신청했을 때, 친부모가 반대하더라도 법원의 판단에 따라 관련 정보를 공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아동과 친부모의 의견이 다를 때, 독일 가정법원이 양측의 이익 등 제반 사항을 고려해 아동의 정보 열람권을 인정 혹은 기각할 수 있습니다.
아동의 입장에선 나의 뿌리를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기고, 반대로 친부모의 입장에선 익명성이 온전히 보장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 양립 불가능한 부모 ‘익명성’과 아동 ‘알 권리’…해답은?
‘출생 정보’는 ‘부모의 개인 정보’인 동시에 태어난 ‘아이의 개인 정보’이기도 합니다. 필연적으로 한쪽의 익명성은 다른 한쪽의 알 권리 침해로 이어지게 됩니다.
취재 과정에서 허민숙 국회입법조사관은 “두 권리의 충돌을 완벽하게 해소할 방법은 없다”고 설명했습니다.
독일처럼 소송을 통해 친부모의 신원이 언젠가는 드러난다고 한다면, 과연 위기임산부가 보호출산제를 통해 아이를 낳으려고 할지 장담하기 어려운 게 현실이라는 겁니다.
아이가 안전하게 의료 기관에서 태어나 출생 등록이 되게끔 유도하고자, 우리 사회는 양립 불가능한 두 권리 중 ‘친부모의 익명성 보장’을 택한 셈입니다.
다시 혜정 씨의 이야기입니다.
자신을 만나길 거부하는 어머니의 사정을 어느 정도는 알겠다면서도 편지를 받아들고는 “그냥 슬펐다”고 했습니다. 그저 “마음이 아팠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혜정 씨는 계속해서 어머니를 찾고 싶다고 했습니다. 이유를 묻는 질문에는 이렇게 답했습니다.
“내 부모, 내 가족, 내 아빠가 누구고 내 엄마가 누구인지 모른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저 같은 경우는 보호자가 없으니까, 보호자 개념인 것 같아요. 내 뿌리는 내가 알아야죠. 당연한 것이고..”
-조혜정/자립 준비 청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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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지현 기자 (veteran@k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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