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밭춘추] 정생(正生)을 새겨 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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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에서 쿰쿰내가 스멀거리며 기어 나온다.
내 열여섯 살 겨울의 방은 웃풍 사나웠지만, 아랫목은 오붓했다.
다시 마주한 권정생의 '열여섯 살의 겨울'을 펼친다.
선생의 아명(兒名)은 경수(慶秀)였으나, 정생(正生)이라는 함자를 새겨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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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갈피에서 쿰쿰내가 스멀거리며 기어 나온다. 그리움에는 냄새가 있다더니 선명한 그림으로 기억을 부른다. 책을 덮어 책장 모퉁이로 밀어 놓는다. 겨울 방학이면 전혜린 키드였던 우리는 도서관 장기 대출 도서를 서로 돌려가며 읽었다. 아낀 용돈으로 사 모은 삼중당 문고본은 미덥고 든든해서 읽기의 복심을 채워준 밑돌이 되었다. 박계형 소설을 만난 날이면 아릿하여 슬쩍 서럽기도 했다. 내 열여섯 살 겨울의 방은 웃풍 사나웠지만, 아랫목은 오붓했다.
다시 마주한 권정생의 '열여섯 살의 겨울'을 펼친다. 작품은 자전적 이야기라서 수필로 분류한 글이지만, 창작한 작품의 원형이 고스란히 담긴 글이라고 지은이 스스로 말했다. 어린 시절 그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상급학교에 진학할 수 없었다. 성실한 면모를 눈 여겨 보았던 근동의 가게 주인이 점원으로 부린다. 점원은 주인이 시키는 대로 고구마 무게 재는 요령을 터득한다. 손잡이 조절로 저울 눈금을 속이는데, 처음에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익숙해진다.
고구마를 사러 오는 이들은 거의 가난한 사람들이다. 찐 고구마로 되팔아 생계를 이어가는 처지이거나, 밥을 대신한 한 끼니 양식이기 때문이다. 자신은 무게를 속여 고구마를 팔았지만, 저번 장날의 북새통에 값을 치루지 못했다고 미안하다는 아주머니를 잊을 수 없다. 거칠고 무딘 손으로 꼬깃꼬깃 접힌 종이돈을 건네주던 그 아주머니는 천사가 되어, 훗날 동화 속에 자주 등장한다.
책 곳곳의 인물들은 마음속에 간직한 착한 자리를 빼앗기지 않고, 이름 없이 살다가 떠났다. 그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 그의 글은 꾸밈 없고 단순하다. 글과 사람이 같아야 하는 실천의 덕목이 잘 닦인 빈 그릇처럼 남아있다. 자신의 저작물에 대한 인세를 어린이들에게 돌려주기 원하는 유언이 그 가운데 하나다. 선생의 아명(兒名)은 경수(慶秀)였으나, 정생(正生)이라는 함자를 새겨 읽는다. 열 번의 올곧은 획으로 채워진 두 글자의 만남 또한 죽비 소리의 울림처럼 맑고 깊다. 하인혜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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