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워즈〉와 〈마블〉의 변화는 진보일까, 보편의 상실일까
2015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연말 기자회견을 이렇게 시작했다. “오늘 회견은 백악관에서 제일 중요한 일정이 아닙니다. 새로 나온 〈스타워즈〉 상영회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회견은 최대한 간단하게 할 겁니다.” 〈스타워즈〉에 ‘성공한 문화 프랜차이즈’라는 수식어는 부족하다. 이 작품은 ‘현대 미국의 신화’라고 불린다. 화려한 광선 검 싸움과 대규모 우주 전투 덕만은 아니다. 젊은이의 모험심, 가족 간 갈등과 회복, 민주주의의 위기 등 굵직한 주제를 다뤘다. 그런데 이 시리즈 최신작인 드라마 〈스타워즈: 애콜라이트(애콜라이트)〉는 사람들을 둘로 나누고 있다. 취향이 다른 관객들 간 입씨름을 넘어선다. 이 드라마에는 한국 배우 이정재씨가 출연하고, 주인공 어맨들라 스텐버그는 흑인 여성이다. 세계 최대의 미디어 기업 디즈니가 ‘다양성’과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뜨거운 감자를 품은 전장이 되었다.
〈애콜라이트〉는 8부작 드라마다. 6월4일(미국 기준) 1·2화를 시작으로 매주 한 편씩 순차 공개되고 있다. 6월26일 현재 5화까지 나왔다. 2012년 〈스타워즈〉 제작사 루카스필름을 인수한 월트디즈니컴퍼니가 자사 OTT 디즈니플러스에서 독점 스트리밍한다. 루카스필름을 인수한 뒤부터 디즈니는 〈스타워즈〉 관련 영화·드라마·애니메이션의 제작도 전담하고 있다. 디즈니는 루카스필름 이외에도 마블 엔터테인먼트, 픽사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서치라이트 픽처스 등을 거느린 미디어 공룡이다. 1977년 〈스타워즈: 새로운 희망〉을 연출하고 루카스필름을 설립한 ‘스타워즈의 아버지’ 조지 루커스 감독은 〈애콜라이트〉를 비롯한 〈스타워즈〉 시리즈에 관여하지 않는다.
디즈니플러스는 정식 공개 전 언론 시사회에서 〈애콜라이트〉 4화까지 상영했다. 시리즈 중반까지 본 비평가들의 점수를 종합하면 이 드라마에 대한 평가는 수작과 범작 사이에 걸쳐 있다. 대중문화 평점 집계 웹사이트인 〈메타크리틱〉에 따르면 비평가 32명은 평균 67점을 줬다. ‘대체로 호의적’이라고 분류되는 점수다. 〈워싱턴포스트〉 〈할리우드 리포터〉 등은 80점대 점수를 줘 호평했다. 〈인디펜던트〉 〈가디언〉 〈뉴욕타임스〉는 50~60점대 점수를 매겼다.
하지만 일반 관객의 평가는 그보다 훨씬 낮다. 평균 점수는 4.0(10점 만점)이고, 전체의 61%가 ‘부정적’이라고 평했다. 리뷰 게시판에는 “내가 본 드라마 중에 최악이다” “〈스타워즈〉의 명복을 빈다” “디즈니가 시리즈를 파괴하고 있다” 등 험한 비난이 적혀 있다. IMDb, 로튼토마토 등 여타 평점 사이트나 디즈니의 시리즈 홍보 영상도 마찬가지다. 드라마에 대한 누리꾼의 격렬한 비판이 수천, 수만 개씩 달렸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다인종 캐스팅에 대한 백인 관객의 불만으로 볼 여지가 있다. 대중의 온라인 악성 댓글은 첫 화 공개 전부터 달렸다. 이정재씨 출연에 주목하는 한국 관객으로서는 ‘동양인 제다이(〈스타워즈〉 세계관 속 기사)에 대한 서구 관객의 비토’ 때문이라고 넘겨짚기 쉽다. 지난 47년간 이 시리즈에는 한국 배우가 등장한 적이 없다. 6월5일 서울 CGV 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이정재씨는 ‘해외 누리꾼의 인종차별’에 대해 질문받았다. 그는 “외국에 〈스타워즈〉를 오랫동안 열정적으로 응원하는 분들이 많더라. 다양한 관객분들의 반응이라고 생각한다”라고 답했다. 다만 “제다이는 복장이나 무술, 철학까지도 동양의 영향이 많이 보인다. 동양인의 모습을 한 제다이가 출연하는 게 자연스러워서 (내가) 캐스팅되지 않았을까?”라고 덧붙였다. 질문자와 답변자 모두 ‘한국(동양)인 배우 출연’을 뇌관으로 본 셈이다.
그런데 서구 온라인 커뮤니티의 악성 댓글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면 아귀가 안 맞는다. 이정재의 연기력이나 그가 연기한 캐릭터 ‘솔’에 대한 평가는 높은 편이다. 드라마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사람들조차 그렇게 본다. 6월12일 온라인 커뮤니티 ‘레딧’에는 “〈애콜라이트〉에 대해선 뭐라고 말하든, 적어도 ‘솔’ 역할의 이정재는 정말 훌륭하다”라는 게시물이 ‘추천’ 6000여 개를 받았다. ‘다양성을 추구하는 데 이롭다’가 아니라 그저 ‘연기를 잘하고 캐릭터가 좋다’는 내용이다. “(영어) 억양이 그를 현명하고, 절제된 것처럼 보이게 만든다. 캐릭터에 어울린다” “작품 방향이 정말 마음에 안 들지만 이정재만은 훌륭하다” 같은 댓글이 달렸다. 레딧보다 표현 수위가 높고 혐오 표현이 많은 커뮤니티 4chan에서도 아시아인 혐오는 찾기 어렵다. 4chan 이용자들의 〈애콜라이트〉 비난 댓글 틈에는 이런 댓글이 있다. “주인공 어맨들라 스텐버그와 감독 레슬리 헤드랜드는 둘 다 또라이라서 온라인에서 욕먹어도 된다. 이 멍청한 드라마에 당치 않은 이정재에 대해선 아무도 불만 없다.”
포용성과 다양성 공격하는 팬덤
〈애콜라이트〉 감독과 주연배우는 모두 성소수자다. 기획·각본·연출을 담당한 레슬리 헤드랜드는 레즈비언이다. 그는 〈애콜라이트〉에 고위 제다이로 출연 중인 레베카 헨더슨과 2016년 결혼했다. 주연배우 어맨들라 스텐버그 역시 2018년 커밍아웃했다. 그런데 감독과 주연 두 사람의 인터뷰가 작품 발표 전부터 크고 작은 논란을 일으켰다. 미국 연예 전문 매체 〈더랩〉의 6월5일 인터뷰 영상이 일례다. 진행자가 “〈애콜라이트〉는 역대 시리즈 중 가장 게이 같은(gayest) 〈스타워즈〉 같다”라고 입을 떼자 스텐버그와 헤드랜드는 “〈스타워즈〉는 이미 (이전부터) 게이 같았다” “C3PO(시리즈 전작에 출연했던 로봇)가 레즈비언이라는 게 정설이다” 등 농담을 주고받았다.
맥락상 모두 우스갯소리였지만 유튜브, X(옛 트위터) 등 SNS에서 일부 팬들은 분노를 터트렸다. 한 유튜버는 “디즈니가 사회운동가들을 무더기로 고용하고, ‘가장 게이 같은 〈스타워즈〉’를 만들었다고 한다. 다름 아닌 〈스타워즈〉에!”라며 비판했다. 추후 헤드랜드 감독은 인터뷰가 농담이었음을 강조했다. 6월19일 〈할리우드 리포터〉에서 “그때 인터뷰 질문에 들어간 ‘게이’라는 용어가 정확히 뭘 의미했는지 모르겠다. 내가 퀴어 콘텐츠를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애콜라이트〉 제작진과 배우들은 꾸준히 이번 작품이 ‘이전의 〈스타워즈〉’와 어딘가 다를 것이며, 포용성과 다양성을 더 추구하겠다고 여러 차례 발언해왔다. 〈스타워즈〉의 일부 ‘전통적’ 팬덤은 이 과정을 공격으로 받아들였다. 지난 5월29일 〈뉴욕타임스〉 기사에 따르면 인터뷰에서 헤드랜드 감독은 “편견, 인종차별, 증오 표현에 관여하는 사람은 〈스타워즈〉 팬으로 간주하지 않겠다”라고 말했다. 같은 보도에서 캐슬린 케네디 루카스필름 사장은 “스토리텔링은 모든 사람을 대표해야 한다고 믿는다. (중략) 남성 중심 팬덤이 〈스타워즈〉에 참여하는 여성을 공격하는 일이 잦다”라고 말했다. 주인공 어맨들라 스텐버그는 시리즈에 대한 혹평을 두고 “어리석은 인종주의자”를 비판하는 노래를 직접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배역을 위해 영어를 배웠고 전작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말한 이정재와 달리, 원작과 팬덤을 재구성하려는 듯한 일부 제작진·배우들은 일찌감치 미운털이 박혔다.
최근 할리우드 창작물 다수는 등장인물의 인종·성별·성적 지향을 다양하게 설정한다. 백인, 남성만 등장하는 드라마는 오히려 ‘시대에 뒤떨어진다’고 비판받는다. 원작 캐릭터의 정체성을 바꾸는 일도 늘었다. 대표적으로 〈마블〉 원작 코믹스(만화책)에 ‘닉 퓨리’라는 백인 캐릭터가 나오는데, 영화에서는 흑인 배우 새뮤얼 L. 잭슨이 맡았다. 1984년 작품을 리부트한 영화 〈고스트 버스터즈〉(2016)도 주인공 전원을 여성으로 변경했다. 〈왕좌의 게임〉 후속 드라마 〈하우스 오브 드래곤〉은 한 가문(벨라리온) 전체의 인종을 백인에서 흑인으로 바꿨다. 소수자 캐릭터의 서사 비중을 원작보다 늘리거나, 특별히 강한 힘을 가진 인물로 그리는 경우도 있다. ‘비율만 맞추고 구색만 갖췄다’는 비판을 피하기 위해서다.
앞선 작품들 모두 캐스팅 직후 크고 작은 반발을 불렀다. 상대적으로 〈하우스 오브 드래곤〉과 같은 작품은 탄탄한 시나리오나 빼어난 연기 덕에 비판이 잦아든 사례에 속한다. 논란이 더 커진 작품도 있다. 대표적으로 〈인어공주〉(2023)다. 흑인 래퍼이자 배우인 핼리 베일리가 인어공주를 연기했다. 백인에 빨간 머리인 인어공주가 등장하는 전통적 애니메이션에 익숙한 이들은 SNS에서 비판을 가했다. 영화의 만듦새가 떨어진다는 비판도 나왔다. 제작진과 일부 팬들은 ‘인어공주는 창작물일 뿐 어떤 외양도 가질 수 있다’며 반박했다.
“사람들은 즐기려고 영화를 본다”
〈인어공주〉 〈애콜라이트〉 등의 제작사 디즈니는 가장 적극적으로 다양성을 도입하려는 영상미디어 기업 중 하나다. 이 회사는 매해 자사 직원들의 성별·인종 비율을 조사해 공고하는 ‘다양성 보고서’를 내놓는다. 지난해 기준 디즈니 영상표현물 감독 41.8%는 여성, 45.2%는 유색인종이었다. 드라마 고정 출연자는 46%가 여성, 유색인종 출연자는 52%였다. 한때 ‘아동용’이라는 뜻으로 쓰인 ‘디즈니 같다’는 표현은 서구권에서 점점 ‘정치적 올바름을 추구한다’는 의미로 바뀌고 있다. 몇몇 배우나 감독이 아니라 밥 아이거 디즈니 CEO가 추구해온 사업 방향이다. 아이거는 2005년 디즈니 CEO가 된 후 2020년 물러날 때까지 루카스필름·마블 인수, 디즈니플러스 론칭 등 굵직굵직한 사업을 진두지휘한 인물이다. 2000년대 초반 디즈니를 침체에서 건져냈다고 평가받는다. 2022년 디즈니 경영이 위기에 빠지자 ‘구원투수’ 격으로 다시 CEO 자리에 복귀했다.
다양성은 경영전략이다. 책 〈디즈니만이 하는 것〉에서 밥 아이거는 자신이 기업 인수뿐만 아니라 영화 창작 과정에도 깊이 참여했다고 적었다. 책에 따르면 마블 영화의 다양성 캐스팅은 사실상 그가 밀어붙여 시작됐다. “(과거) 마블의 영화는 대부분 백인 남성 캐릭터를 중심으로 스토리가 전개됐다. (중략) 선입견을 버리고 〈블랙 팬서〉와 〈캡틴 마블〉 제작에 착수하라고 지시했다.” 밥 아이거 CEO는 루카스필름 인수 후 처음 내놓은 ‘디즈니 〈스타워즈〉’ 영화의 줄거리를 구상하는 데에도 참여했다. 원작자 조지 루커스는 이 영화를 혹평했다. 일찍이 그는 자신이 구상한 스토리를 디즈니에 전달했으나 아이거와 디즈니는 이 안을 폐기하고 별도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한 인터뷰에서 루커스는 회사 매각을 후회한다며, “노예상에게 자식을 팔아넘긴 기분”이라고 말했다. 디즈니의 〈스타워즈〉 속편인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는 ‘정치적 올바름’ 논쟁을 본격적으로 촉발했다.
디즈니의 경영전략은 최근 행동주의 투자자의 도전을 받았다. 넬슨 펠츠 트라이언 펀드매니지먼트 CEO는 지난해 디즈니 주식을 다량 확보한 뒤 이사회 진출을 시도했다. 이 과정에서 디즈니의 정치적 올바름을 비판했다. 지난 3월22일 영국 〈파이낸셜타임스〉 인터뷰에서 “흑인 캐스팅이 왜 필요한지 모르겠다” “여성에게 반감은 없지만 왜 여성만 출연하는 〈마블〉을 봐야 하나?” “사람들은 즐기려고 영화를 본다. 메시지를 얻으려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4월4일 주주총회에서 펠츠가 내놓은 새 이사 지명 안건은 표 대결 끝에 부결됐다. 그러나 아이거는 2026년 은퇴를 앞두고 후계자를 물색 중인 상태이고, 향후 펠츠 외에 새로운 도전자가 나타날 가능성이 있다는 관측이 현지 언론에는 많다.
디즈니는 왜 대성공한 전작과 원작의 길을 따르지 않고 논란을 감수할까? 새로운 관객을 유입시키고, 기존 팬덤을 질리지 않게 만들어 장기적으로 이윤을 극대화하기 위해서다. ‘흑인 슈퍼히어로 영화는 성공 가능성이 낮다’는 마블 직원의 말에 밥 아이거 디즈니 CEO는 “뒤집어 보면 우리에게는 훌륭한 영화를 만들어 대표자가 불충분한 소수집단에 자긍심을 심어줄 기회가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디즈니만이 하는 것〉 중).
〈마블〉 시리즈도 기조가 같다. 〈어벤저스: 엔드게임〉 이후 새로 나온 〈마블〉 영화와 드라마는 주연배우 다수에 여성·유색인종을 캐스팅했다. 마블 엔터테인먼트 CCO 케빈 파이기는 지난해 2월 인터뷰에서 각 작품의 분위기가 달라야 마블이 오래 살아남는다고 말했다. “매번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런 작품은 점점 모든 게 비슷해지고 매우 빨리 (작품들이) 지루해질 것이다. (중략) 1년에 8개 작품을 만든다면 8개 작품의 분위기가 모두 달라야 한다.”
이 판단은 완전히 틀리지는 않았다. 흥행 성적이 디즈니의 마케팅 파워나 원작의 이름값에 미치지 못한 작품은 있지만, 논란이 된 작품 중 ‘완전한 실패작’은 찾기 어렵다. 정치적 올바름 관련 논쟁 탓에 팬덤이 양분된 〈스타워즈: 라스트 제다이〉 수익은 2017년 개봉작 중 1위였다. 소수자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캡틴 마블〉 〈블랙 팬서〉도 성공을 거뒀다. 지금까지 디즈니는 픽사, 마블, 루카스필름 인수에 들인 금액 3배 이상을 이들 프랜차이즈 영화로 벌어들였다.
그런데 전 세계 수익이 아니라 국가별 흥행 지표를 보면 다른 추이도 나타난다. 미국 관객들은 정치적으로 올바른 디즈니 문화상품에 여전히 (혹은 이전보다 더) 열광한다. 하지만 다른 나라 관객들의 반응은 그만하지 않거나, 부정적이다. 흑인 히어로가 주인공인 영화 〈블랙 팬서〉를 보자. 전 세계에서 약 13억5000만 달러를 벌었는데 그 절반 이상(약 7억 달러)은 북미 수익이다. 흑인 여성이 주연인 속편 〈블랙 팬서: 와칸다 포에버〉도 전체 수익(8억6000만 달러) 53%를 북미에서 올렸다. 〈인어공주〉도 그렇다. 전 세계 수익은 약 5억7000만 달러, 그중 북미 수익이 약 53%(3억 달러)를 차지한다. 반면 백인·남성 히어로 중심인 〈아이언맨 3〉(2013)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은 각각 수익 약 66%, 69%를 해외에서 올렸다.
〈인어공주〉 흥행이 실패하자 미국 언론과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의 화살은 동아시아, 특히 중국과 한국으로 향했다. 지난해 6월6일 미국 CNN은 ‘일부 시청자의 인종차별적 반발에 둘러싸인 〈인어공주〉가 한국·중국에서 실패하다’라는 기사를 보도했다. 한국과 중국 일부 누리꾼들이 ‘리뷰 폭격’을 가했고 인종차별이 원인이라고 썼다. (백인 남성이 주인공인) 〈스파이더맨〉은 비슷한 시기 중국에서 훨씬 관객이 많이 들었다고 부연했다. 한·중 양국에서와 달리 〈인어공주〉는 필리핀·인도네시아 등 다른 아시아 시장에서는 흥행 성적이 좋았고, 그 외에도 “전 세계에서 엄청난 팬들을 불렀다”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CNN 보도와 달리 〈인어공주〉의 전체 흥행 성적(5억7000만 달러)은 다른 작품들과 비교했을 때 높은 편이 아니다. 비슷한 시기 개봉한 〈라이온킹〉(2019, 16억5000만 달러), 〈알라딘〉(2019, 10억5000만 달러), 〈미녀와 야수〉(2017, 12억7000만 달러)보다 훨씬 낮다.
특수한 곳은 오히려 미국이다. 오늘날 미국에서 디즈니는 일개 미디어 기업이 아니다. 특정 정파, 가치관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지난해 2월15일 미국 온라인 매체 〈퍽〉은 13개 미디어 회사를 포함한 29개 다국적 대기업의 호불호를 물었는데, 디즈니가 불호 응답 1위였다. 미국 공화당 지지자는 30%가 디즈니를 ‘불호’라고 답했다(1위). 2위 기업부터 불호 응답은 20% 아래다. 민주당 지지자는 8%만 디즈니가 불호라고 답변했다(3위). 2020년 대선을 앞두고 밥 아이거 디즈니 CEO는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다. 실제로 출마하지는 않았지만, 〈디즈니만이 하는 것〉에서 그는 꽤 구체적으로 출마를 고려했다고 밝힌다.
공화당 정치인들과 직접 갈등이 불거진 때도 있다. 2022년 론 디샌티스 플로리다 주지사가 ‘교육에서 부모의 권리법’에 서명한 게 계기다. 일명 ‘게이 언급 금지(Don’t Say Gay)법’이라고 불리는 이 법안은, 초등학교 3학년까지 교내에서 성정체성이나 성적 지향에 대해 수업하는 걸 금한다. 플로리다에서 디즈니월드를 운영하는 디즈니는 이 법을 규탄하는 성명을 냈다. 디샌티스 주지사는 그 보복으로 디즈니월드에 부여한 자치권을 취소하려 들었다. 이 문제는 양자 간 행정소송으로 번졌다. 디샌티스에게는 보수 지지자들의 후원금이 몰렸으나, 디즈니는 평판에 금이 갔다.
진보와 보편성 사이
공화당·민주당의 대립이나 노예제 역사 등 미국의 특수한 배경을 공유하지 않는 국가 관객들 대다수는, 정치적 올바름을 반영했다는 이유로 문화상품에 가산점을 주지 않는다. 동아시아 국가의 일부 차별주의자들만 그런 게 아니다. 중도 좌파에 속하는 서유럽 정치인과 학자들은 잇달아 정치적 올바름에 반대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인종차별 전력이 있는 인물의 동상을 철거하라는 요구를 여러 차례 거부했다. 2020년 마크롱 대통령은 “어떤 동상도 철거하지 않겠다. 우리가 누구인지 부정하는 대신 역사를 함께 살펴야 한다”라고 말했다. 지난 4월2일 〈폴리티코〉 유럽판은 미셸 블랑케 전 프랑스 교육장관의 말을 인용했다. “(정치적 올바름 운동은) 사람들을 여성·흑인·무슬림·동성애자 등 고정된 정체성을 가진 집단의 대표자로 축소한다. 사회에 더 많은 갈등을 야기할 뿐이다.” 이 기사는 정치적 올바름이 “프랑스가 공유하지 않는 인종 관계의 역사가 낳은 ‘미국의 현상’”이며, 프랑스에서는 좌파도 다수 반대하는 생각이라고 주장했다.
정치적 올바름 요소를 둘러싼 논란이 정치·사회 갈등의 대리전 양상으로 번지면서, 작품에 대한 진지한 비평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한쪽에서는 영화나 드라마가 개봉되기 전부터 댓글로 저주를 퍼붓고, 다른 쪽에서는 반대파를 차별주의자로 몰아가며 작품 자체의 문제는 짚지 않는다. 선동가들과 소셜미디어 이용자들은 ‘정치적 올바름 요소가 들어간 작품들 탓에 디즈니가 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반대로 영미권 언론들은 〈인어공주〉와 같은 영화의 실패 원인을 해외 관객들의 인종주의에서만 찾는다.
〈스타워즈〉를 비롯한 옛 프랜차이즈를 바꾸는 것은 진보일까. 과거 〈스타워즈〉 시리즈가 대체로 다수자의 이야기였던 데에는 공감하는 이가 많다. 1977년부터 2005년까지 나온 이 영화 시리즈의 주인공 대부분은 백인·남성·이성애자였다. 게다가 부자(父子) 관계에 초점을 맞춰, 주로 남성 관객에게 소구했다. 이들은 은하계 배경 공상과학영화를 보면서 부자간의 어색함과 거리감, 서로의 잘잘못, 애증을 떠올린다. 장일 한국방송통신대학교(미디어영상학과) 교수는 2021년 논문 ‘고전적 내러티브의 현대적 변형: 〈스타워즈〉 시리즈를 중심으로’에서, 〈스타워즈〉가 그리스 신화의 오이디푸스 이야기와 맞닿아 있다고 적는다. 절대적 존재인 아버지가 부재하고, 아들이 모험을 떠난 뒤 새로운 질서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다만 “‘내가 네 아버지다’라는 대사로, 부재한 아버지가 ‘적’이었다는 반전이 일어나면서 이 이야기는 현대적으로 변주됐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전의 〈스타워즈〉는 동시에 미국을 한데 묶고 전 세계를 매혹한 보편적 이야기이기도 했다. 〈넛지〉 공저자인 캐스 R. 선스타인 하버드대 로스쿨 교수는, 과거의 〈스타워즈〉가 동서양 철학을 계승하면서도 독창적 발상을 가미했다고 믿는다. 책 〈스타워즈로 본 세상〉에서 그는 이 작품이 불교와 스토아학파의 영향을 받았다고 썼다. 초탈과 평온함, 거리감을 강조하는 제다이 집단을 예시로 들었다. 그러면서도 선스타인 교수는 〈스타워즈〉의 진정한 주제 의식은 ‘초탈’의 정서와 정반대인 애착과 가족애라고 썼다. “주인공을 구원하는 것은 상실의 두려움과 사랑이지 초탈이 아니다. (중략) 아이들은 부모를 구원하고 부모에게서 최고의 모습을 끄집어낸다. 부모는 자식을 살리기 위해서라면 어떤 위험도 마다하지 않는다. 이렇게 보편적인 주제도 찾기 어렵다.” 이를 연기한 건 백인 남성들이지만, 그 주제의식 때문에 전 세계의 공감을 받고 어디서든 통용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4월4일 펠츠에 맞서 경영권을 지켜낸 주주총회 후 밥 아이거 디즈니 CEO는 “디즈니의 최우선 목표는 교훈이 아니라 재미를 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에도 그는 “관객을 즐겁게 만드는 게 먼저다. 교훈을 주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정치적 올바름을 밀어붙여온 경영방침을 바꾸겠다는 의미로 받아들이는 이도 있다. 반면 일부 주주들의 비판을 잠재우고 자사 경영을 방어하기 위한 논리라고 여기는 의견도 나온다. ‘온라인 악플러’ 외에도 〈애콜라이트〉 논쟁의 향방을 지켜보는 이가 많다. 논란은 디즈니만의 것도 아니고, 아마 이 작품 하나로 끝나지도 않을 것이다.
이상원 기자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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