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진 “조직폭력배에 피습, 2~3㎜ 차로 기적적 생존”(지금 이순간)[어제TV]

이하나 2024. 7. 19. 05: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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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tvN STORY ‘지금, 이 순간’ 캡처)
(사진=tvN STORY ‘지금, 이 순간’ 캡처)
(사진=tvN STORY ‘지금, 이 순간’ 캡처)

[뉴스엔 이하나 기자]

남진이 파란만장한 가수 인생사를 공개했다.

7월 18일 방송된 tvN STORY ‘지금, 이 순간’에서는 남진의 데뷔부터 위기까지 결정적인 순간들을 살펴봤다.

남진은 대한민국 최초로 팬클럽과 팬미팅을 개최했던 남이섬에서 팬들을 다시 만났다. 당시 팬미팅에도 참석했던 팬은 당시 7,200명이 팬미팅에 참석했다고 밝히며 당시 추억을 공개했다. 윤종신은 “우리나라 BTS부터 아이돌 팬클럽들이 감사해야 한다. 이 체계를 만드신 분이다”라고 말했다.

남진이 공개한 첫 순간은 군대 시절이었다. 연이은 히트곡 행진, 영화배우로 성공하면서 인기 정상에 오른 남진은 해병대 입대 후 베트남 전쟁까지 참전해 3년 공백을 겪었다. 가장 위험한 곳으로 배치된 남진은 참전 일주일 만에 눈앞에 폭탄이었으나, 불발탄이어서 목숨을 구했던 행운을 공개했다.

남진이 자리를 비운 사이 나훈아가 떠올랐고, 극명하게 다른 매력으로 소녀팬을 사로잡은 두 사람은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두 사람은 선의의 경쟁을 펼쳤지만, 팬들 사이에는 점점 경쟁이 과열됐다. 남진의 대학교 친구인 조영남은 남진, 나훈아가 겪은 피습 사건을 언급했다.

일명 사이다병 피습 사건으로 부상을 당한 나훈아는 얼굴에 큰 상처가 남았다. 남진은 매“스컴에서 라이벌이어서 사주를 한 것 아니냐는 말이 만들어졌다. 그래서 제가 특수부대 가서 조사를 받았다”라고 누명을 썼던 때를 떠올렸다.

사건 일주일 전 범인이 자신에게 먼저 찾아왔다는 남진은 “아침에 눈을 떴더니 모르는 사람이 집에 들어와서 금품을 요구하더라. 웃으면서 ‘제가 라이벌을 해치우면 돈을 주시겠습니까’라고 했다. 이게 무슨 마피아도 아니고 그런 소리하는 거 아니라고 좋게 타이르고 돌려보냈는데 일주일 후에 신문에 그 사건이 난 거다. 당혹스럽더라. 풍문이 그렇게 나니까 특수실에서 연락이 왔다”라며 “범인이 (감옥에서) 몇 년 살고 나와서 목포 본가에 불을 질렀다”라고 전했다.

남진은 어린 시절 집안의 재력을 공개했다. 목표에서 세금을 제일 많이 내는 집이었다는 배경에 대해 남진은 “아버님이 사업을 하셨다. 신문 사업을 오래하시고, 국회의원도 하셨다. 52년도에 차도 요트도 다 있었다”라고 말했다. 윤종신은 “그때 목포에 승용차가 두 대 있었다고 한다. 한 집이 도지사, 한 집이 형님 집”이라고 설명했다. 남진은 1945년 목포의 소문난 부잣집에서 2남 7녀 중 장남이자 여섯째 늦둥이로 태어났으며, 남진의 가정 교사만 무려 3명이었다.

유복한 환경에도 공부보다 음악에만 관심을 둔 남진은 친구들을 이끌고 서울 강북에 놀러 갔ᄃᆞᆨ 한 라이브 클럽에서 노래를 불렀고, 밴드 마스터의 눈에 띄어 첫 스승인 한동훈 작곡가를 만나 본격적으로 가요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시 지병으로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버지는 격렬하게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몰래 ‘서울 플레이보이’라는 앨범을 낼 수 있도록 금전적 지원을 해줬다. 20살 때 앨범을 낸 남진은 “망해도 망해도 완전 폭삭 망했다. 한 장도 안 나갔고, 방송에 나오지도 않았다”라며 당시 실패로 세상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첫 앨범 실패 후 한동훈 작곡가의 추천으로 한 레코드사의 전속 가수로 계약한 남진은 운명처럼 자신에게 다시 돌아온 ‘울려고 내가 왔나’라는 곡으로 유명 가수가 됐다. 그러나 30대 후반 인기가 차츰 식으면서 슬럼프가 왔고, 넘어진 김에 잠시 쉬어보자는 마음으로 미국행에 올랐다.

남진은 “마침 미국 공연을 갈 일이 있었다. 겸사겸사해서 미국 공연도 있고 쉬어 갈 겸 갔는데 거기서 우연히 뉴욕에서 아내를 만났다”라며 3년 동안 연년생으로 딸 셋을 낳았다고 말했다. 남진은 “한국에 가고 싶었는데, 아이 낳고 산후조리도 몇 개월 해야 하지 않나. 한국을 가야지 하면 배가 볼록해졌다”라며 “마지막 넷째는 아들이더라.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아들이 생겼다’라고 했더니 ‘음, 너도 이제 성공했다’라고 하시더라. 그래서 임신 된 상태여서 한국으로 나왔다. 아들이 아니었으면 계속 거기서 낳았다”라고 전했다.

1982년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한국에 돌아온 남진은 박춘석 작곡가에게 받은 곡으로 복귀를 시도했지만, 1980년대 정권 교체로 연예계에 불어닥친 비공식적 외압으로 인해 방송 출연은 물론 홍보조차 쉽지 않아 목포로 낙향했다. 남진은 “가수, 연예인은 문화부에서 통보한다. 원래는 ‘이런 이유’로 방송 금지한다 통보했는데 저는 그런 게 없었다. 아무 문제가 없는데 방송이 안 되는 거다. 화가 나서 고향으로 낙향했다”라고 설명했다.

남진은 “마침 고향에 제 건물이 있었다. 지인이 와서 임대를 하고 싶다고 하다. 그래서 업소를 만들었다. 다 지었더니 사정이 생겨서 못 들어오겠다고 하더라. 업소를 다 준비해 놨는데 그냥 놔둘 수 없고 할 수 없이 직접 직영을 하게 됐다”라고 뜻하지 않게 목포에서 유흥업소를 운영하게 됐다고 밝혔다.

남진은 당시 전국적으로 유흥업소에 조직폭력배가 많았으며, 자신이 없는 사이에 행패를 부리고 위협하는 조직폭력배들의 행동에 분노해 관할 경찰서에 폭력배 근절, 단속을 요구했다고 밝혔다. 남진으로 인해 대가를 치르게 된 조직폭력배들은 남산 타워 호텔 앞에서 공연하고 서 있던 남진을 피습했다.

남진은 “이 자리에 있는 것도 행운이다. 심장 대동맥이 두 개 있다. 거기에 닿으면 3분이면 죽는다. 대동맥과 2~3mm 차이였다. 그래서 제가 산 거다. 살아서 이 방송할 수 있는 것도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라고 회상했다.

병원에서 회복 후 목포로 낙향한 남진은 어느 날 지역 행사에 참석해달라는 섭외가 들어왔다고 밝혔다. 암묵적 제재에서 해방된 이후 홍보도 제대로 못한 노래가 입소문을 탔고, 10년 만에 ‘빈잔’이라는 곡이 역주행했다. 남진은 “오랫동안 공백이 있으면 마음이 허전하고 비어있다. 아쉬움, 섭섭함이 가득할 때 이 노래가 제 마음을 채워줬다. 지금도 이 노래를 부르면 그때 생각이 난다”라고 곡에 대한 애정을 드러냈다.

뉴스엔 이하나 bliss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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