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은 어머니를 낳고 비로소 이별한다 [책&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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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어머니가 긴 와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다음 부고를 전했다.
"우리의 첫 이웃인 어머니는 조용히 떠나셨습니다. 사랑하는 그 얼굴을 빼앗기고, 우리는 서로를 거의 알아보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나면 사라질 꿈과 씨름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프랑스의 영문학 교수이자 작가, 페미니스트 학자인 엘렌 식수는 어머니 에브가 일백둘의 나이로 죽음의 침상에 누워 "엘렌! 이제 무엇을 하지?"라고 물었을 때 "에브, 우리는 잠을 자고 꿈을 꿀 거야. 에브 삶 꿈."이라는 대답으로 어머니를 문학의 거주자이자 문학 자체로 호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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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딸, 애도의 글쓰기
피에르루이 포르 지음, 유치정 옮김 l 문학과지성사(2024)
미국의 시인 에밀리 디킨슨은 어머니가 긴 와병 끝에 세상을 떠나자 다음 부고를 전했다. “우리의 첫 이웃인 어머니는 조용히 떠나셨습니다. 사랑하는 그 얼굴을 빼앗기고, 우리는 서로를 거의 알아보지 못하고, 잠에서 깨어나면 사라질 꿈과 씨름을 하는 것만 같습니다.” 프랑스의 영문학 교수이자 작가, 페미니스트 학자인 엘렌 식수는 어머니 에브가 일백둘의 나이로 죽음의 침상에 누워 “엘렌! 이제 무엇을 하지?”라고 물었을 때 “에브, 우리는 잠을 자고 꿈을 꿀 거야. 에브 삶 꿈.”이라는 대답으로 어머니를 문학의 거주자이자 문학 자체로 호명한다. 딸의 첫 이웃이자 최초의 타자인 어머니는 죽음으로 딸의 정체성을 뒤흔들기 시작한다. 이렇게 종국의 죽음은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이 된다. 특히 쓰는 딸들은 글쓰기를 통해 상처의 근원으로 돌아간다.
프랑스 문학 연구자 피에르루이 포르는 어머니의 죽음을 마주하고 쓴 세 여성 작가의 작품,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죽은 여인을 위한 일곱 편의 시’ ‘경건한 추억들’, 시몬 드 보부아르의 ‘아주 편안한 죽음’, 아니 에르노의 ‘한 여자’ ‘나는 나의 밤을 떠나지 못했다’를 분석해 딸들의 글쓰기가 어떻게 애도의 과정이 되는지 보여준다. 즉, 글쓰기 자체가 회복의 절차이고 글쓰기의 결과물인 작품은 회복의 증거다. 저자는 우선 프로이트의 애도 이론으로 책의 첫머리를 연다. 프로이트는 애도를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위상에 둘 만한 추상적인 것, 조국, 자유, 이상과 같은 것의 상실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으로 설명하고 “대상에게 집중되어 있던 리비도를 철회함으로써 자신의 일상을 회복하는 과정과 결과”로 요약한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애도에 관해서도 여성 영역의 애도는 무시했거나 무지한 듯 보인다. 이에 저자는 아버지의 죽음이 남성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고통스러운 상실이라는 프로이트의 말을 뒤집어 ‘가장 원초적인 관계’인 어머니와 딸의 관계에서 어머니의 상실이 딸에게 어떤 의미인지 세 여성 작가의 작품을 통해 들여다본다.
유르스나르는 태어난 지 열흘 만에 산욕열로 어머니를 잃었고, 어머니의 부재를 자신의 상실감과 곧바로 연결 짓지 않는다. 그러나 유사 어머니라고 할 수 있는 어머니의 친구 잔이 죽자 비로소 숭고한 애도를 바친다. 보부아르는 말기암 선고와 함께 급격히 무너지는 어머니의 몸을 보면서 고통받는 한 존재를 발견한다. 어머니와 딸은 함께 병에 맞서 투쟁하며 비로소 ‘결합’하고 어머니가 투쟁에서 패배하자 ‘같이’ 패배한다. 그 과정에서 두 사람은 어머니와 딸의 친밀함을 복원하고 내적인 이해로 결합했다. 에르노는 실연과 낙태와 어머니의 죽음을 동일한 체험으로 연결한다. 어머니의 상실이라는 고통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그는 작품 안에서 어머니와 함께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다. 이렇게 어머니를 작품 안에 강렬하게 불러들이는 것은 모순되게도 어머니를 ‘잘 보내드리기’ 위해서다. 망각 속에 묻어버리자는 게 아니라 기억과 함께 이별하자는 것이다. 그러므로 글쓰기를 통한 애도는 어머니를 잊는 일이 아니라 어머니가 지나친 고통이나 결핍이 없는 다른 곳에서 살아가게 하는 일, 즉 어머니를 새롭게 낳는 일이다.
이주혜 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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