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을 돌보는 ‘자기 인식’…스스로를 포기하는 일이 되기까지 [책&생각]

고명섭 기자 2024. 7. 1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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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말년의 강연록
기독교 수도원 운동의 관행, 그리스-로마의 자기 돌봄 지워버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 위키미디어 코먼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
미셸 푸코 지음, 심세광 ‧전혜리 옮김 l 동녘 l 2만원

미셸 푸코(1926~1984)는 20세기 후반 이래 소수자 운동을 비롯한 수많은 영역에 영향을 끼친 프랑스 철학자다. 푸코의 학문 이력은 지식의 고고학에서 시작해 권력의 계보학을 거쳐 주체의 해석학으로 마무리됐다. ‘자기 자신에 대한 진실 말하기’는 푸코가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캐나다 토론토의 빅토리아대학에서 행한 다섯 차례 강연의 원고와 네 차례 세미나 녹취록을 묶은 책이다. 이 책에는 말년의 탐구 주제였던 주체 해석학의 핵심 개념인 ‘자기 돌봄’(자기 배려)과 파레시아(parresia)에 대한 역사적‧계보학적 탐구가 담겨 있다.

푸코는 이 토론토 강연이 열리기 전 1982년 전반기에 콜레주드프랑스에서 ‘주체의 해석학’이라는 주제로 일반 강의를 했다. 이해 5월31일부터 6월26일까지 토론토에서 열린 강연과 세미나는 이 콜레주드프랑스 강의를 바탕으로 삼아 그 주제를 더 밀고 나간 것이다. 이 시기에 푸코는 관심사를 주체의 ‘자기 수양’이라는 문제로 돌려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헌들을 탐구했다. 이때 핵심 개념으로 떠오른 것이 ‘자기 돌봄’인데, 토론토 강연에서도 이 자기 돌봄의 역사적 변화를 고대 그리스-로마의 문헌을 통해서 추적한다. 푸코가 주목하는 것은 세 시기, 곧 그리스 고전기라고 부르는 소크라테스-플라톤 시기, 로마제국 초기인 기원후 1~2세기, 그리고 초기 기독교 수도원 운동이 번져나가던 5~6세기다. 이 세 시기를 관통하여 ‘자기 돌봄’이라는 관념이 겪은 변화를 따라가는 것이 이 책이다.

푸코가 먼저 주목하는 것은 기원전 4세기 플라톤의 텍스트에 나타난 소크라테스의 언행이다. 소크라테스는 자기 돌봄이라는 관념을 사실상 발명한 사람이다.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제가 돌아다니면서 하는 유일한 일은 여러분이 젊었든 늙었든 자신의 영혼이 최선의 상태가 되도록 영혼을 돌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는 것을) 설득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에게 ‘자기 돌봄’보다 먼저 과제로 다가왔던 것이 ‘너 자신을 알라’라는 금언으로 표현되는 ‘자기 인식’이었다. 눈여겨볼 것은 소크라테스에게 ‘너 자신을 알라’는 명령이 ‘네 영혼을 돌보라’는 명령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자기 자신을 잘 알아야만 자기 자신을 잘 돌볼 수 있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은 자기 자신을 돌보는 데 꼭 필요한 수단이다. 소크라테스가 강조한 이 ‘자기 돌봄’의 윤리는 로마제국 시대에 이르러 교양 있는 사람들의 대중운동으로 널리 퍼졌다. 스토아학파 사람들과 에피쿠로스학파 사람들이 자기 돌봄의 대중화를 이끈 사람들이었다.

이 자기 돌봄 운동을 역전시킨 것이 초기 기독교 운동, 특히 5~6세기의 금욕적인 수도원 운동이었다고 푸코는 말한다. 이 수도원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악으로 물든 이 세계에서 벗어나 모든 관심을 신에게 돌리는 것이었다. 이 세계는 온갖 것으로 수도자들을 유혹함으로써 신을 잊게 만든다. 그러므로 그런 유혹을 차단하는 것, 다시 말해 자기 내면의 욕망을 버리고 자기를 포기하는 것이야말로 수도자들에게는 가장 시급한 과제가 된다. 자기를 포기하려면 자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그리하여 ‘자기 인식’이 수도사들의 중대한 과제로 등장했다. 바로 여기서 역전이 벌어진다. 기독교 이전 철학운동의 자기 인식이 자기 돌봄의 수단이었던 것과 반대로, 기독교의 자기 인식은 자기 포기의 수단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기독교 도덕의 지배와 함께 고대 그리스-로마의 자기 돌봄은 지워지고 자기 인식이라는 과제만 남게 됐으며, 그 영향은 오늘날까지 지속되고 있다고 푸코는 말한다.

이 자기 돌봄의 역사와 함께 푸코가 살피는 것이 ‘파레시아’의 역사다. 그리스어 파레시아는 ‘거리낌 없이 솔직하게 진실 말하기’를 뜻한다. 그러나 진실을 말한다고 해서 모두 파레시아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푸코는 파레시아가 윤리적‧정치적 영역에 속한다고 강조한다. 과학적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파레시아와 무관하다. 거기에는 윤리적‧정치적 부담이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파레시아는 ‘위험’을 동반한다. 진실을 말함으로써 그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 위험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다. 정치적 영역이나 윤리적 영역에서 위험을 감수하고 솔직하게 진실을 말하는 것, 이것이 파레시아다.

이런 특성상 파레시아는 정치체제와 연계될 수밖에 없다. 고전기 아테네 민주정에서 파레시아는 민회라는 정치적 장에서 자신의 생각을 말할 자유, 특히 어리석은 통치자를 비판할 자유를 뜻했다. 그런가 하면 페르시아 같은 군주제 국가에서 파레시아는 신하가 군주에게 처벌의 위험 없이 진실하고 적절한 조언을 하는 것을 가리켰다. 로마제국 시대에 들어와 파레시아는 철학운동을 이끄는 스승과 그 스승을 따르는 제자의 관계로 나타났다. 이때 파레시아는 스승의 의무를 가리킨다. 스승은 자기 수양과 관련해 자신의 진실을 감춤 없이 이야기함으로써 제자에게 모범을 보여야 한다. 그렇게 파레시아를 행하는 자가 진정한 스승이다. 푸코는 2세기 그리스 작가 루키아노스가 견유주의 철학자 데모낙스를 묘사하는 구절을 인용한다. 데모낙스는 아무것도 숨기지 않는 파레시아를 행함으로써 바른 삶을 살았고,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철학적 실천의 모범’이 됐다.

그러나 5세기 수도원 운동에 이르러 이 파레시아의 관계는 역전된다. 이제 진실하게 내면의 모든 것을 고백해야 하는 자는 지도자가 아니라 지도를 받는 자다. 지도받는 수도사들이 지도자에게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솔직하게 털어놓아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파레시아의 역사에 대한 이런 고찰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은 무엇인가? 이 물음에 푸코는 직접적으로 명확하게 답하지 않는다. 그러나 기독교의 파레시아 실천과 그리스-로마의 파레시아 실천의 대비를 통해 분명히 드러나는 것이 있다. 곧 ‘자기 자신에 대해 진실하게 말하기’가 자기를 돌보고 자기를 기르는 일도 하지만, 반대로 자기를 억압하고 자기를 부정하는 일을 하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푸코가 보기에 그리스도교 수도원의 관행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지고 있다. 이 관행을 거슬러 고대 그리스-로마의 실천을 회복함으로써 파레시아를 자기 돌봄과 자기 수련의 중요한 수단으로 삼을 수 있다는 것이 푸코가 이 강연을 통해 이야기하려는 바일 것이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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