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피부는 파랗고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나는 ‘당신’이다 [책&생각]

임인택 기자 2024. 7. 19. 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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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회 한겨레문학상 ‘멜라닌’ 출간

멜라닌
하승민 지음 l 한겨레출판 l 1만6800원

이 소설에서 가장 상징적인 장면을 꼽으라면, 이민 간 지 1년 된 재일이 마리 앤더슨의 목숨을 구하는 대목이다. 앤더슨은 재일의 고등학교 동급생 루크의 엄마다.

미국 버지니아의 3만명 소도시 셰인빌. 한파로 셰인빌 호수가 얼자 당선 1년차 시장이 축제를 기획한다. 최근 셰인빌에서 일어난 사건 사고들에 대한 시민들의 불만 불안을 달래기 위함이었다.

배우 니콜 키드먼을 닮은 앤더슨은 친절(?)하고 “도도하고 우아한” 백인 여성이다. 뜻밖으로 축제 중 호수 빙판 위를 걷더니 빠진다. 달빛 아래 호수에서 혼자 수영하며 위로를 얻곤 했던 재일은 앤더슨을 구하지만, 상대가 허우적이는 통에 수중으로 떠밀리고 만다.

가라앉고, 방향을 잃고, 겨우 정신 차려 수면을 향했을 땐 얼음장이 가로막았다. 폐가 수축됐다. 냉기, 희박한 산소, 무엇보다 폐쇄의 공포. 눈을 감았다 뜨면 어둠이고 수중이었으며 “단단한 얼음 천장” 아래였다. 문득 재일은 발버둥을 멈추고 “마침내 모두에게 공평한 순간을 맞이했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손 닿을 듯 위로 ‘이웃’이 가물거렸을 테지만 제아무리 재간을 부릴지언정 출구 없어 닿을 수 없고 진입할 수 없는 세계, 저들과 함께 공존할 수 없는 세계를 재일이 인식 넘어 체득하는 대목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재일은 죽지 않았다. 차가운 얼음물 속에서 의식을 잃고서도 13분을 기적처럼 버틴 덕이었으니, 마치 재일과 같은 부류에 요구되는 생존의 조건 같다.

이제 독자들은 빗대건대 지독한 13분이 저 호수에서의 사고 이전은 물론 이후로도 무한 변주되는 현실을 보게 된다. 신간 장편 ‘멜라닌’의 정체다. 제2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하승민 작가)으로 막 단행본 출간됐다.

실상 앤더슨이 아들을 보낸 셰인빌고등학교는 저소득 가정 출신이 대부분이다. 부모 따라 미국 온 한국 아이들은 죄다 인근 사립학교로 간다. 재일은 비숙련직 노동자로 취업이민 온 가족답게 이 학교 유일한 한인 학생. 그럼에도 재일에겐 차별과 배제를 ‘학습’시키는 장소로 손색 없다. 말하자면 차갑고 숨막히는 수중. “내 피부는 파랗고 엄마는 베트남 사람이다”는 소설의 첫 문장으로 숙명처럼 예견되는 바다.

엄마 닮은 재일의 고향은 구미다. 공장노동자 아버지(한국인) 사이에서 둘째가 태어나자 인천으로 이사한다. 재일의 타고난 피부색에 일단 놀라고 기피하는 주변 시선은, 이내 ‘파란 피부 때문에 동네 집값이…’와 같은 우려와 혐오로 나아간다.

지구촌 ‘멜팅 포트’라 불리는 미국도 다를 바 없다. 재일네는 2015년 이민을 감행한다. 13살 재일을 위한 건 아니되, 한국보단 나으리란 기대가 없진 않았다. 이미 인종, 국적 관계없이 드물게 파란 피부-이후 그들은 ‘블루멜라닌’으로 명명된다-가 각지에서 태어나는 중이다. 하지만 미국에서야말로 재일은 피부, 인종, 부모, 언어, 국적, 체격, 성격 등 온갖 소수자성을 ‘열성’으로 접목한 신인류가 된다. “칭챙총” 멸칭에, ‘개고기 먹는 나라’ 따위 멸시는 차라리 진부하다. 스쿨버스 한 좌석에 ‘Blued’(청색인)라는 종이가 붙거나, ‘멍이 들면 무슨 색이냐’ 조롱이 보태진다. 섬세한 성장기, 아이들은 언어와 소속감이 약해 상처가 덜한 재일을 ‘위해’ “멸시의 언어를 발명하”는 지경이다. 영화 ‘엑스맨’의 캐릭터 미스틱에 빗대자 재일이란 ‘존재’는 ‘밈’으로 전락하고, 흥미 없던 아이들까지 웃게 함으로써 차별은 비로소 바이러스처럼 강해진다.

근근이 히스패닉 여학생 셀마, 백인 가정의 또 다른 블루멜라닌인 클로이, 인종주의를 공부한 흑인 교장 리타 해먼이 재일에게 숨구멍이 되어준다. 하지만 재일이 클로이를 선망할 때 클로이는 “파란 아시아인”은 차라리 낫다며 “파란 백인”으로 불리는 자신의 처지를 더 비관하므로, 차별은 강제되어 ‘자기낙인’으로 완성되는 꼴이다. 그나마 자기 권리를 주장하던 클로이는 증오범죄의 희생자가 되고, 셀마는 죽을 뻔했으며, 리타 해먼 같은 ‘어른’은 학교 밖에서 만나기 어렵다. 재일은 베트남 엄마조차 왜 ‘멀쩡한’ 동생만 데리고 고향으로 갔는지 곱씹는다.

당사자 소설은 물론이거니와, 차별을 재현하고 탐구한 문학 작품은 차고 넘친다. 이 소설의 차별성은 평이하고 유약한 인물로서 그닥 ‘소설적’이지 않은 재일에게 있다. 그와 가장 대비되는 극적 인물이 재일네를 미국으로 부른 오촌 당숙 강우다. 차별에 완력으로 맞서고, 살고자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 서길 주저하지 않는다. 그조차 죽임을 당하니, 거듭 출구 없는 재일의 처지이고 신화 없는 이 세계의 본색이다.

지난 18일 서울 정동의 한 카페에서 열린 ‘멜라닌’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하승민(43) 작가는 “다른 이를 핍박해도 되는 사회, 실용의 이름으로 지켜야 할 가치들이 무너지는 사회다. 과거엔 부끄러워하기라도 했는데 이젠 부끄럽지도 않은 시대”라며 “글로 조금이나마 제동 걸 수 있으면, 동조하는 독자들이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겨레출판 제공

스무살 직전까지의 재일의 성장담은, 실상 차별의 메커니즘과 가공할 생명력을 보여주는, 혐오의 성장사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소설은 2020년대 전후 한국, 미국 등지에서 요동치는 파시즘, 당대 증오범죄, 근현대 차별의 역사가 쉴새 없이 교직하며 차별의 불멸성·확장성을 설파한다. 가령 수영장에서 쫓겨나는 재일에 1950~60년대 흑인이 들어간 수영장 물을 통째 갈거나 염산을 뿌린 실제 사건이 맞물리는 식이다. 때때로 소설이 지나치게 설명체가 되는 위험을 감수한 까닭이 있겠다. 하 작가는 당선 원고에서 50매(1만자) 이상을 덜고 퇴고해 단행본을 냈다.

이민 온 지 5년 된 재일에게 가능한 선택지는 무엇인가. 그가 연모한 셀마는 말했다. “차별은 강물처럼 흘러야지만 차별인 줄 안단 말이야. 사실 차별은 곳곳에 놓인 지뢰밭 같은 거야. 딱 한 번의 폭발에도 우린 불구가 된다고.” 그러나 셀마는 노래로 또 전했다. “내가 부서질 것 같아? 누워서 죽기를 기다릴 것 같아? 아니, 난 살아남을 거야.”(미국 가수 글로리아 게이너의 ‘I Will Survive’)

재일은 신통한 ‘완득이’(김려령의 소설, 베트남 국적 엄마와 난쟁이 아버지를 가진 17살 청소년)가 아니다. 불굴의 투사인 ‘자미’(인종주의·성차별과 싸운 흑인 페미니스트 시인 오드리 로드의 자전신화)처럼 되지도 않을 것 같다. 거듭 이 소설이 여타 소설과 구별되는 점이다. 재일은 정주한 채 배제하려는 이들에 맞서 유랑하고 부유함으로써 존재하겠다는, 살아남겠다는 꿈을 바야흐로 꾼다. 프랑스 작가 파스칼 키냐르는 소설 ‘눈물들’에서 썼다. “누구에게나 망막에 최초로 형성되는, 즉 신생아의 눈에 비치는 첫 색깔은 푸른색이다.”

유구한 ‘차별 서사’에서, 가장 유약한 자의 가장 유연한 꿈을 그렇게 만난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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