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생각] 제헌의원들 숨소리까지 살려낸 헌법의 탄생 순간
초안 나온 뒤 20일 걸쳐 논쟁
어떤 사회 구성할 것인가 격론
오늘날 다시 보며 참고할 만
헌법의 순간
대한민국을 설계한 20일의 역사
박혁 지음 l 페이퍼로드 l 1만9000원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
2016년 겨울, 전국 곳곳 광장에서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대한민국 헌법 제1조’를 외쳤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선 실세였던 최서원(최순실)의 국정 개입 전모가 밝혀지면서 국민은 분노했고, 그 분노는 대통령 탄핵으로까지 이어졌다. ‘헌법 제1조’가 단지 종이 위에 적힌 글씨가 아니라 우리 삶 속에 빛나고 있음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76주년을 맞은 제헌절, 최근 정치 상황을 보며 다시금 ‘헌법 제1조’를 떠올린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정치는 실종되고 국민의 삶은 방치되고 있는 가운데 ‘헌법’의 정신과 가치를 되새기며 현 정치체제의 문제점과 대안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는 책이 나왔다. 박혁 민주연구원 연구위원(정치학 박사)이 제헌절에 맞춰 출간한 ‘헌법의 순간’이다.
이 책은 타임머신을 타고 헌법이 최초로 만들어진 그 시기로 독자를 데려간다. 1948년 5월10일, 헌정 사상 최초로 국민들은 직접 투표를 통해 국민을 대표할 198인의 국회의원을 뽑았다. 임기 2년의 제헌의원들은 나라 기틀이 될 헌법을 제정하고, 그 헌법을 토대로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는 임무를 부여받는다. 제헌의원은 헌법기초위원회를 꾸려 6월3일부터 22일까지 17번 회의를 통해 헌법안을 완성한다. 전문과 10장, 102개 조항으로 구성된 최초 헌법안을 두고 제헌의원들은 20일 동안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책은 ‘제헌국회 회의록’을 토대로 당시 상황을 재구성한다.
책은 제헌의원들의 숨소리까지 살려냈다 할 정도로 그들의 논쟁을 현재의 무대로 옮겨놓았다. 마치 한 편의 연극이 무대 위에서 펼쳐지고, 바깥에서 저자가 해설사가 되어 저들이 왜 저런 논쟁을 하는지, 현재 시점에서 보면 그때 그 결정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의원들의 발언 가운데 틀린 부분은 없는지 설명해준다. 법이라고 하면 어렵고 딱딱하게 여겨지기 마련인데, 이 책을 읽고 나면 헌법이 친숙하게 다가오고 현재 국가 권력 체제의 기원을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책은 총 14개의 논쟁을 다룬다. 나라 이름을 대한민국으로 결정하게 된 이유부터 대한민국의 영토를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규정하게 되는 과정, 기본권의 주체를 ‘국민’으로 할지 ‘인민’으로 할지의 논쟁, ‘3·1혁명’이 ‘3·1운동’으로 바뀌게 된 사연, 성평등 관련 조항의 변천 과정, 내각책임제가 아니라 대통령제를 선택하게 된 이유, 어떤 헌법에도 없던 ‘노동자 이익균점권’을 도입한 이유, 양원제가 아닌 단원제를 선택한 과정 등을 다룬다.
책에 따르면 ‘국호’ 정할 때부터 논쟁은 치열했다. ‘대한, 고려, 새한, 조선’ 등이 후보로 올라왔고 불꽃 튀는 경쟁 끝에 대한민국이 승자가 됐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결과가 아닌 과정에 주목한다는 점이다. “대한이 망한 나라 이름이어서 수치스럽다”라는 반대 의견에 “빼앗긴 이름을 되찾아 쓰는 게 뭐가 부끄러운 일이냐. 대한민국 국호를 씀으로써 거룩한 3·1운동의 의미를 세계에 알리고 대한임정의 정통을 계승할 수 있다”고 쏘아붙이는 의원이 나타난다. 또 ‘대’(大)자가 제국주의적 지향을 담고 있다는 지적에 “고대 마한은 곧 대한이라는 뜻”이라는 설명이 따라온다. 격한 토론과 논쟁은 근거가 있고 상대를 설득하려는 의지가 가득하다.
책을 읽다 새삼스럽게 놀라는 부분도 있다. 제헌헌법 20조는 ‘혼인은 남녀동권을 기본으로 하며 혼인의 순결과 가족의 건강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는다’고 명시하고 있다. 이 조항을 넣기 위해 동료 의원들을 설득하는 권태희 의원의 발언은 감동적이며 위트가 넘친다. “이 초안이야말로 바람이 없는 타이어와 마찬가지요, 마개 빠진 사이다와 마찬가지라는 말씀입니다. 국민의 반이 여자입니다. 민이라는 단어가 서른한 번 언급되는 이 헌법에서 1500만명이나 되는 여자가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려 여자문제에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건 이 헌법의 기초적인 착오라 생각합니다. (…) 한 남자가 아내 둘, 셋도 소유한다고 하는데, 명문으로 제한하지 않는 것은 너무나 현실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악마화하고 타협과 양보는 눈꼽만치도 없는 현 여야 의원들의 모습에 질려버린 독자들은 제헌의원들이 토론하고 논쟁하고 타협하고 양보하는 과정을 보면서 논쟁의 질이 천양지차라고 느낄 것이다. 당시 5·10총선거에서는 여성단체를 중심으로 축첩 정치인 낙선 운동이 전개될 정도로 축첩 문제는 사회적 이슈였다. 그런데 남성 중심 의회에서 이를 헌법에 담지 않은 것을 권태희 의원은 꼬집었고 20조 조항을 신설하자는 수정안을 낸다. 권태희 의원에 이어 장면 의원 등 다른 의원들도 나선다. 그런데 막상 표결 결과는 재석의원 162인 중 찬성 66명, 반대 61명으로 미결됐다. 재차 설득 과정이 있고, 그 과정에서 ‘혼인의 순결’이냐 ‘가족의 순결’이냐 논란이 벌어지고 결국 ‘혼인의 순결’로 결정된다. 드라마틱한 전개가 흥미진진할 뿐만 아니라, 헌법에 담긴 성평등 정신을 다시 되새겨보게 만든다.
대통령의 거부권으로 개혁 입법들이 좌초되고 있는 현 시점에서 더 눈이 가는 대목도 있다. 헌법 제정 당시 헌법기초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의원내각제를 헌법초안에 담았다는 사실이다. 의원내각제를 설계한 유진오 전문위원은 “대통령제를 채택해서 국회와 정부가 대립하여 저물도록 옥신각신하면 나라를 망칠수 있다”는 우려를 했다. 당시 의원들의 문제의식은 현재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렇다면 언제 어떻게 내각책임제에서 대통령제로 바뀌었을까. 헌법기초위원들의 안을 호떡 뒤집듯 엎어버린 인물은 당시 임시의장이었던 이승만이었다. 대통령감으로 지지를 받던 그는 의원내각제 헌법 아래서는 어떠한 지위에도 취임하지 않겠다며 헌법기초위원들을 압박했다. 이처럼 제헌헌법은 당시 정치 상황과 특정인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 결정된 부분도 있다고 책은 알려준다.
저자는 머리말에서 “지금까지 남한에서만 치러진 총선거로 뽑힌 제헌의원들을 무시했다”고 고백한다. 남북 영구 분단을 초래한 선거가 못마땅했고, 졸속 헌법이라고 생각했단다. 그랬던 그가 당시 국회 회의록을 보고 제헌의원들의 ‘정치의 향연’에 절절한 감동을 느꼈고, 그 감동이 독자에게 그대로 전달된다. 제헌의원들의 치열한 논쟁은 단순한 과거가 아니라 앞으로 있을 개헌 논의 때 충분히 참고할 만하다고 독자들 역시 느낄 것이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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