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장 남자 조종사가 된 ‘웃수저’… 황당무계한 설정도 유쾌하네
배우 조정석(44)에겐 ‘웃수저(웃음+금수저)’란 별명이 따라다닌다. 주변 사람을 웃기는 데 타고난 사람을 뜻하는 말. 이번엔 주특기인 코미디 영화 ‘파일럿’(31일 개봉)에서 여장 남자로 변신했다. “예쁘다”는 칭찬에 조정석이 “난리 났습니다”라며 수줍게 웃자 인터뷰 현장에 웃음이 터졌다. 유달리 동그랗고 윤이 나는 광대가 씩 올라가면 저항 없이 따라 웃게 된다.
942만 관객을 동원한 ‘엑시트’ 이후 5년 만의 스크린 복귀작이다. 잘나가던 스타 파일럿 한정우(조정석)는 성희롱 사건에 휘말려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고 집에선 이혼까지 당한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이 어렵게 되자, 그는 여장을 하고 여동생 이름을 빌려 ‘한정미’로 경쟁 항공사에 면접을 보러 간다. 이 황당무계한 설정을 눈감아주게 되는 건 조정석의 힘 때문이다.
18일 만난 조정석은 “‘웃픈’ 대본에 끌렸다”고 했다. “한정우라는 인물이 여장까지 해가면서 너무 열심히 사니까 웃기면서 슬프기도 하더라고요.” ‘한정미’가 된 그는 과하게 여성성을 강조하거나 억지로 웃기려 하지 않는다. 치마를 입은 걸 잊고 다리를 쩍 벌리고 앉는 장면이나, 밤새 술을 마시다 수염이 거뭇하게 올라온 장면에선 대사 한마디 없는데도 객석에서 웃음이 터졌다. 그가 긴 머리를 휘날리며 고군분투할 때마다 자연스레 웃음이 따라온다. 조정석은 “제가 가장 편한 상태일 때 좋은 연기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2004년부터 무대에 많이 섰던 경험이 평정심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는 것 같다”고 했다.
뮤지컬 ‘헤드윅’에 이어 또 한 번 여장에 도전한 그는 7㎏을 감량하고, 100벌 이상 옷을 입어가며 캐릭터를 만들었다. 영화는 회식 자리에서 여성 승무원들을 ‘꽃다발’에 빗대거나, 여성 채용 쿼터로 역차별을 당하는 등 한국 사회의 젠더 문제를 자연스럽게 녹여냈다. 신체를 소재로 한 농담이 한물간 코미디처럼 느껴지기도 하지만, 결국엔 여장 남자의 몸으로 남녀 화합을 이뤄낸다. 여성으로 살며 성희롱과 차별을 경험한 정우는 ‘역지사지’로 타인의 삶을 이해하게 된다.
동시에 쉴 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중년 남자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2004년 뮤지컬 ‘호두까기 인형’으로 데뷔해 뮤지컬·연극·영화·드라마를 넘나들며 소처럼 일해온 조정석은 “한정우 역할에 깊이 공감했다”고 했다. “과거를 돌이켜보면, 20대 때부터 제가 정말 열심히 살았거든요. 이번 영화를 찍으면서 ‘나는 왜 이렇게 열심히 살았을까’ 되돌아보게 됐어요. 공연이라는 게 하루하루 다르니까 어제보다 더 좋은 공연을 만들어보고 싶고, 더 나은 작품을 만들고 싶고. 그런 욕심이 제 원동력이 됐던 것 같아요.”
대중에게 얼굴을 알린 건 스크린 데뷔작인 ‘건축학개론’(2012)의 납득이. 친구 삼고 싶은 친근한 이미지는 그의 또 다른 무기다. ‘슬기로운 의사생활’을 함께한 신원호 PD는 조정석을 보고 “연예인으로 태어났지만 일반인을 지향하는 친구”라고 하기도 했다. ‘파일럿’에서도 자연스러운 생활 연기로 관객을 무장해제한다. “수염이 거뭇해져서 우는 장면은, 낮부터 새벽 2시까지 촬영을 하다가 실제로 제 수염이 분장을 뚫고 올라온 거예요. 감독님이 오히려 재밌다고 하셔서 그대로 영화에 담겼죠.”
‘웃수저’라는 별명엔 고개를 저었다. “생각보다 말도 느리고 조용해서, 삼삼오오 모여 있으면 잘 끼어들지도 못해요.” 하지만 그는 한 발짝 물러나는 여유로 오히려 존재감을 드러낸다. 최근엔 정체를 숨기고 ‘AI 조정석’ 영상으로 유튜브를 시작해 화제가 됐다. AI 커버 영상인 척하면서 자신이 직접 부른 노래들을 올려서 웃음을 준 것. “살다 살다 AI 호소인을 다 보네” ”죄송한데 어떤 AI가 애드리브를 넣나요” 등등의 유쾌한 댓글이 달렸다. 유튜브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시치미를 뚝 뗐다. “저도 너무 비슷해서 놀랐어요. 기술이 많이 발전했구나.... 그 채널에 출연해보고 싶은데 아직 허락을 못 받았어요.” 어떤 AI도 조정석의 타고난 감각을 대체하긴 어려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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