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현대연극 거장 “예술이 즐거운 이유? 늘 변방서 혁신하기 때문”
“제 연극이 한국의 젊은 연극인들에게 조금이라도 좋은 영향을 미친 부분이 있다면, 한국에서 유학하며 입은 은혜를 갚는 일인 듯해 기쁘게 생각합니다.”
지금 한국의 젊은 연극인들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을 묻는다면 아마도 맨 앞줄에 셰익스피어나 체호프와 함께 당신의 이름이 있을 것이라고 했더니, 백발의 남자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인자한 미소. 일본 극단 ‘청년단’ 히라타 오리자(62) 대표는 세계 무대에서 일본 현대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다. “한일 연극인들은 유럽에서 들여온 근대 연극을 어떻게 우리의 것으로 만들 것인가라는 공통의 과제를 안고 있죠. 그런 공통점이 제 연극과 사고방식이 한국 연극인들에게도 울림이 있었던 이유 아닐까요.” 서울예대와 안산문화재단이 함께 여는 ‘극작가 아고라’에서 강연하고 서울예대 학생들과 집중 극작 워크숍을 위해 최근 한국을 방문한 그를 안산 문화예술의전당에서 만났다. 한국의 같은 이름 극단 ‘청년단’의 대표인 민새롬(41) 연출이 질문하고, 히라타 대표의 책을 번역하고 연극을 연출해온 서울예대 극작과 성기웅 교수가 통역을 맡았다.
스스로 ‘현대 구어(口語) 연극’이라 이름 붙인 히라타 대표의 연극 무대 위 배우들은 과장된 발성 없이 일상의 감각으로 대화한다. 현실 속에서 그렇듯 말은 가끔 서로 겹치고, 말할 때 고개를 숙이거나 객석에 등을 돌리기도 한다. 그에게 연극은 무엇을 전달하는 수단이 아니며, 인간과 세계를 직접적으로 그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런 그의 연극이 탄생한 배경은 역설적으로 연극도 화려하고 격렬한 표현이 유행했던 1980년대 일본의 버블 경제기였다. 히라타 대표는 “대학 시절 1983년 연세대 교환 학생으로 서울에 와 1년간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모국어인 일본어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됐다”고 했다. “한국어와 일본어는 모두 단어의 어순으로 표현의 강약을 조절하죠. 악센트나 발음의 높낮이로 의미를 구분하는 서구 언어와는 출발점이 다릅니다. 근대 연극은 대화로서 성립하는데, 제대로 대화(dialogue)하는 데 서툰 일본어로 어떻게 무대 위에서 대화의 순간을 만들어 갈 수 있을까. 그런 고민에서 나온 것이 제 연극이었습니다.”
활발히 새로운 연극을 무대에 올리고 도쿄예술대, 오사카대 등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의 새로운 연극적 접근 방식은 근대 연극의 ‘원조’인 유럽에서도 주목받았다. 2000년대 초반부터 프랑스 리옹 고등사범학교 등에서 가르치면서 대표작 ‘도쿄 노트’가 15개 언어로 번역·공연되며 큰 반향을 일으켰다. 히라타 대표는 “늘 중심이 아닌 주변부로부터 혁신이 시작되는 것이 예술의 재미있는 점”이라고도 했다. “프랑스 관객은 제 작품을 일본의 전통시 하이쿠처럼 단편적인 말을 던져 전체의 이미지를 구성하는 방식인 것으로 이해했어요. 서구에서 태어난 근대 연극에 일본적인 것이 접목된 데 주목한 거죠. 저보다 약간 앞서 프랑스에서 주목을 받았던 노르웨이 극작가 욘 포세(지난해 노벨상 수상자)도 변방에서 시작된 혁신으로 중심부에서 인정받은 마찬가지 경우라 할 수 있겠네요.”
그는 오사카대에서 가르치는 동안 세계 최고 중 하나로 꼽히는 이 대학 로봇공학연구실과 협력해 ‘로봇 연극 시리즈’도 시도했다. 2010년 만든 연극 ‘사요나라’는 10개 언어로 번역, 공연되기도 했다. 죽음을 앞둔 호스피스 병동의 환자들에게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詩)를 읽어주는 로봇의 이야기다. 그는 안톤 체호프의 ‘세 자매’는 자매 중 한 명을 로봇으로,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은 주인공이 괴물 벌레가 아니라 로봇으로 변하는 것으로 각색해 무대에 올리기도 했다. “로봇공학과 연극의 협업으로 더 자연스럽게 인간 일상에 스밀 수 있게 됐죠. 연극이 세상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아직도 무궁무진합니다.”
☞히라타 오리자(62)
일본 현대 연극을 대표하는 극작·연출가. 대학 시절인 1983년 극단 ‘청년단’을 결성해 활동 중이다. 과장 없는 현대 구어 그대로의 일상 대화와 인간 내면을 강조하는 ‘조용한 연극’으로 한국 연극에도 폭넓은 영향을 끼쳤다. 15개 언어로 번역·공연된 대표작 ‘도쿄 노트’ 등으로 뉴욕타임스·르몽드에 특집 기사가 실리는 등 세계적 주목을 받았다. 일본 예술문화관광전문직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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