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m 태극기 게양대 논란… 광화문 광장은 왜 필요한가 [전상인 조선 칼럼]

전상인 서울대 명예교수·사회학 2024. 7. 19. 0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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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러 목소리 내지 않아도
유서깊은 도시, 보여줄 게 많은 법
비움의 미학 추구한다면서
김장 축제·야외 도서관
어느 날은 헬스장으로
‘태극기’ 여론 수렴한다지만
모름지기 비어야 광장인데
왜 채우지 못해 안달인가
오세훈 서울시장이 지난 11일 서울 중구 서울시청에서 열린 국가상징 공간 조성 관련 기자설명회에서 발언하고 있다. /뉴스1

얼마 전 오세훈 서울시장은 광화문광장에 국내 최고 높이의 태극기 게양대를 설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6·25 참전용사 간담회 자리에서 그는 광화문광장에 ‘국가 상징 공간’을 조성할 것이라고 발표했는데, 그 첫 번째 내용물이 태극기 게양대이며, 둘째는 그 앞쪽 ‘꺼지지 않는 불꽃’이 될 것이라 말했다. 지름 최대 3미터, 높이 100미터의 이 게양대에는 가로 21미터, 세로 14미터짜리 초대형 태극기가 걸릴 예정이다.

아직 최종 확정된 것은 아니다. 오 시장 자신도 “합리적인 비판에 귀를 열겠다”는 입장이고 서울시의회 또한 시민 여론조사에 나선 상태다. 광화문광장 태극기 게양대 설치안은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0년 전쯤 정부가 추진했다가 서울시 반대로 무산된 적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과 박원순 시장의 재임이 겹쳤던 시절이었는데, 그때처럼 이번에도 보수·진보 사이의 ‘국가주의’ 논쟁은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게다가 오세훈표(標) 태극기 게양대라면 2027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또 다른 차원의 정치적 공방을 촉발할 개연성도 없지 않다.

하지만 이는 이념적 접근이나 정치적 해석을 넘어 광장의 존재 이유에 대한 보다 본질적 질문이 필요한 사안이다. 광장의 역사가 유구한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는 2002년 월드컵 개최 이후 급조된 관제(官製) 광장이 대부분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광화문광장이다. 애당초 광화문광장은 ‘비움’(void)의 미학을 추구했다. 시민들이 제각각, 조금씩, 조용히 일상의 여유를 즐기도록 하겠다는 약속이었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그곳은 ‘채움’의 공간으로 변했다. 분수대, 동상, 인공 화단, 무대 세트, 부스와 천막, 정자, 대형 화분, 이동형 펜스 등 각종 시설물이 시멘트 광장 바닥에 가득 들어찬 것이다.

시나브로 광화문광장은 ‘광화문랜드’처럼 되어버렸다. 광장이 가끔은 집회나 시위 용도로 사용될 수 있다. 문화예술 공연 또한 광장에서 만날 때 즐거움이 색다르다. 하지만 광화문광장은 이 정도가 아니다. 먹을거리와 볼거리, 놀거리를 매일매일 경쟁적으로 기획하고 소비하는 국가대표 ‘핫플’로 자리 잡은 것이다. 어느 날 김장축제나 바둑축제, 태권도축제가 열리는가 했더니 다음 날에는 정부 정책박람회가 개최되고 그 뒤를 백일장대회가 잇는다. 며칠은 야외 도서관이었다가 금방 푸드 페스티벌 행사장으로 바뀐다. 스키 점프장이나 요가 수행장, 트레드밀을 밟는 헬스장 등으로 변신할 때도 있다. 아마도 광화문광장은 전 세계에서 가장 버라이어티(variety)하고 다이내믹한 광장이 아닐까 싶다.

이런 마당에 서울시가 태극기 게양대까지 넣겠다고 한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 현재 광화문광장 주변에 태극기가 없는 것도 아니다.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담장 위에는 태극기 수십 개가 도열 중이고,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앞에도 태극기 게양대가 높이 설치되어 있다. 서울시는 이번에 새로 만들 태극기 게양대의 압도적 스케일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가장 큰, 가장 긴, 가장 높은’ 하는 식의 추상적, 기하학적 우수성을 자랑하는 장소 마케팅은 신생국이나 신도시가 주로 쓰는 수법이다. 인문지리학자 이푸 투안(Yi-Fu Tuan)의 말처럼 유서 깊은 도시는 일부러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아도 보여줄 게 많기 때문이다.

100년 넘게 담장에 둘러싸여 방치된 서울 종로구 '송현동 부지'가 새 단장을 마치고 지난 2022년 시민의 품으로 돌아왔다. /뉴시스

서울 시내 광장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곳은 광화문 인근 ‘열린송현녹지광장’이다. 조선시대 세도가들의 거주지였던 이곳은 해방 후 주한 미국대사관이 사용하는 동안 거대한 담장으로 둘러싸였다. 한국으로 반환된 이후 몇몇 민간 기업이 ‘개발’에 나섰지만 우여곡절 끝에 지금은 서울시가 주인이다. 텔레토비 동산처럼 생긴 송현광장에는 그늘막이나 벤치 등 최소한의 시설물만 배치되어 도심 한복판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맨살’ 여백이다.

듬성듬성한 잔디밭이나 여기저기 패인 웅덩이가 자연스러운 송현광장에는 무언가 광장 본연의 아우라가 있다. 적당한 위요감(圍繞感, enclosure)과 약간의 쓸쓸함은 물론이거니와 ‘뜻밖의 재미’(serendipity)까지 선사한다. 아이들의 즉흥 장난, 야생화와 들고양이, 낯선 이의 말 걸기 같은 것 말이다. 하지만 시민들의 송현광장 사랑은 시한부다. 임시 개방 2년이 지나면 현재 녹지광장은 이건희기증관을 품은 문화공원으로 재탄생한다. 이승만기념관 부지로도 거론 중이다. 하긴 지금 당장에도 송현광장은 각종 문화예술 행사에 야금야금 자리를 내주고 있다. 모름지기 비어야 광장일진대, 왜 우리나라 도시 행정은 늘 채우지 못해 안달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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