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순규의 창] 한국 축구의 '팀 킬', 도를 넘었다

박순규 2024. 7. 19. 0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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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홍명보 감독이 15일 오전 외국인 코칭스태프 선임 관련 업무차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유럽으로 출국 전 입장을 밝히고 있다. 한국 축구는 홍명보 감독 선임 후에도 갈등이 계속돼 우려를 낳고 있다. /인천국제공항=박헌우 기자

[더팩트 | 박순규 기자] 창 밖엔 장대비, 내 마음 속에도 탄식의 비가 내린다. 날이 갈수록 기운을 잃게 만드는 정치권 소식에는 무뎌진 지 오래다. 진창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한국 축구의 모습으로 마음이 더 무겁다. 삶의 활력을 제공하고 위안이 되어야할 한국 축구가 어쩌다 이 모양 이 꼴이 됐을까. 저마다 한국 축구를 위한다고는 하지만 결과적으로 아군이 아군을 해치는 '팀 킬(Team Kill)'에 다름 아닌 것으로 보인다.

이제 정부까지 나서서 대한축구협회 행정을 조사한다고 한다. 집안 망신이 나라 망신, 국제적 망신으로 번지는 모양새다. 자칫하면 한국 축구는 2026 북중미 월드컵 출전권을 따고도 제재를 받아 나서지 못할 수도 있다. 극단적인 경우이긴 하지만 전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대표팀 감독을 뽑는 일로 갈등을 빚더니 정작 월드컵에 출전하지 못 한다면 이 무슨 아이러니인가.

실제로 국제축구연맹(FIFA)은 정치로부터의 중립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한다. 회원국들이 정치 목적으로 축구를 이용하지 못하도록 정관에 규정을 마련해 놓고 있다. 만약 회원국이 이 규정을 위반한다면, FIFA는 경고, 벌금, 국제 경기 출전 금지 등의 제재를 내릴 수 있다.

2010년 쿠웨이트 정부가 쿠웨이트 축구 협회를 해산하고 임시 위원회를 구성했다. FIFA는 이 조치가 정치적 간섭이라고 판단하여 쿠웨이트 국가대표팀과 모든 클럽 팀의 국제 경기 출전을 금지했다. 쿠웨이트 정부는 결국 쿠웨이트 축구 협회를 복구했고, FIFA는 제재를 해제했다.

2014년 나이지리아 스포츠부 장관이 나이지리아 축구 협회에 간섭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FIFA가 조사를 진행한 결과, 스포츠부 장관의 간섭 사실을 확인하고 나이지리아 축구 협회에 벌금을 부과했다. 결과적으로 나이지리아 스포츠부 장관은 사퇴했고, 나이지리아 축구 협회는 FIFA로부터 부과된 벌금을 납부했다.

2019년 케냐 정부는 케냐 축구 협회를 해산하고 임시 위원회를 구성했다. FIFA는 이 조치가 정치적 간섭이라고 판단하여 케냐 국가대표팀과 모든 클럽 팀의 국제 경기 출전을 금지했다. 이 제재는 2023년 아프리카 네이션스컵 예선까지 적용됐다.

지난해 3월 이슬람국인 인도네시아에서 개최될 예정이던 20세 이하(U-20) 월드컵이 이스라엘 대표팀의 입국 문제로 정치·종교적 갈등을 빚자 아예 개최권을 박탈하기도 했다. 이밖에도 FIFA는 과거 모로코, 엘살바도르, 과테말라 등 여러 국가에 정치 간섭으로 제재를 내린 바 있다.

민주 사회에서 다양한 의견 표출은 반드시 필요하다. 감독을 뽑는 과정에서 국내파를 선호할 수도 있고, 외국인 지도자를 더 선호할 수도 있다. 국내파 지도자는 2023 카타르 아시안컵에서 불거진 선수단 내부의 갈등을 해소하고 '원 팀'을 만드는 데 더 유리할 수 있다. '자유 방임'을 실천한 클린스만 감독 하차 후 대두됐던 논리다.

유명 외국인 지도자는 선진 축구 트렌드를 접목함으로써 국제 무대에서 한국 축구를 한 단계 더 레벨업 시킬 수 있다. 또한 대표팀의 많은 선수들이 해외에서 활약하면서 이들과 교감할 수 있는 검증된 외국인 지도자가 필요하다는 주장이 힘을 얻었다. 국내 지도자들은 프로축구 시즌 개막과 맞물려 여론의 반발에 부딪히면서 외국인 지도자 필요성이 부상했다.

둘 다 장단점이 있다. 국내파 해외파가 중요한 게 아니라 누가 지금 한국 축구 발전에 더 필요한지가 중요한 잣대로 작용했어야 한다. 감독 영입 예산이 확보된 가운데 치열한 논의 과정도 필요했다. 또한 과정이 투명하고 공정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를 못 했다. 전력강화위원들조차 의견을 제대로 모으지 못했다. 그래서 오해를 빚고, 일부 의견이나 생각이 마치 전부인 것처럼 비쳤다. 논란이 비등점을 넘었고, 이처럼 외부의 조사까지 발표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한국 축구의 근간이 흔들린다는 말까지 나오게 됐다.

한국 축구 행정의 총 본산인 대한축구협회는 욕받이가 됐다. 후배 축구인들은 선배 축구인들의 잘잘못을 지적하며 거친 언사로 저격하고 나섰다. 일부 팬들은 침묵하는 유명 축구인에게 왜 가만히 있느냐고 항의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 원로 축구인은 보다 못해 축구인들이 서로 싸우거나 헐뜯지 말고 축구계 안정을 위해 힘을 합할 때라고 입장을 밝혔다.

한마디로 축구계가 어지럽다. 위안을 주기는커녕 스트레스, 그 자체다. 차기 감독을 선임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논란이 확산될 일이었을까. 단순히 축구 문제를 떠나 요즘 우리 사회를 뒤흔드는 디지털 미디어의 발달과도 관계가 있다고 본다. 너도나도 소셜미디어를 통해 여과 없이 자신의 주장을 펼치다 보니 점점 더 과격해지는 양상을 보이면서 논란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물론 이 모든 사태의 중심에는 대한축구협회가 있다. 문제 해결보다는 갈등 이슈를 막는데 급급하면서 신뢰를 잃었다. 어찌됐든 64년 만의 아시안컵 우승 목표 달성에 실패했고, 인도네시아에 패하면서 40년 만에 올림픽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좌절을 겪었다. 지난 2월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의 중도 하차 이후 5개월 동안 국가대표 전력강화위원회를 운영했지만 결국 최종 결정을 앞두고 정해성 위원장이 사퇴하는 난맥상도 보였다.

긴급 소방수로 투입된 이임생 기술이사는 두 명의 외국인 후보자와 미팅 후 귀국하자마자 처음부터 거론됐던 홍명보 감독을 낙점하면서 문제를 더 키웠다. 절차의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고 온갖 추측이 난무할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또 우승을 다투는 프로축구 팀의 현역 감독을 시즌 도중 대표팀 감독으로 차출함으로써 한국 축구의 근간인 K리그를 무시하고 활성화를 짓밟았다는 비난을 사기에 충분했다.

가장 큰 문제는 땅에 추락한 대한축구협회의 신뢰회복 노력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미 비위 축구인 사면과 철회, 클린스만 감독 영입 과정 의혹 등으로 신뢰에 치명타를 입은 탓일까. 정몽규 회장은 논란의 전면에 나서서 책임있게 난국을 돌파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음으로써 의혹과 불신을 더 확산하며 축구협회 자체의 권위와 신뢰를 떨어뜨리고 있다.

정몽규 회장은 일주일의 절반을 축구 관련 업무에 할애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열의가 높다고 한다. 대기업 총수로서는 이례적일 정도로 축구를 사랑하고 축구 발전에 대한 고민도 많이 한다. 하지만 고민을 많이 하면 뭘 하나. 팬들과 소통 없는 청사진은 무용지물에 불과할 뿐이다. 소통의 단절에서 오는 왜곡과 오해는 아무리 좋은 계획이라도 빛을 보기 어렵게 만든다.

정 회장이 정말 축구를 사랑한다면 팬들 앞에 직접 나서야 한다. 설사 온갖 비난의 화살이 쏟아지더라도 맨몸으로 받아낼 수 있는 용기와 실상을 정확히 설명할 수 있는 의지를 보여야 비로소 신뢰의 씨앗을 심을 수 있다. 지금처럼 축구인을 앞세워 방패막이를 한다는 인상은 한국 축구를 후퇴시키는 지름길이요 한국 축구의 망신인 '팀 킬'일 뿐이다.

축구인들도 좀 진정할 필요가 있다. 홍명보 감독은 다른 누구도 아닌 축구인들이 선정했다. 비록 과정은 거칠었지만 충분한 역량을 가진 지도자임은 분명하다. 더 이상의 분열은 누구에게도 좋지 않다는 것을 다 안다. 그래서 입은 있으나 열지 않는 사람들이 더 많다.

특히 2002년 월드컵 멤버들의 '쓴 소리'는 일견 타당하면서도 과연 그렇게 말할 자격이 있느냐는 반발에 부딪히고 있다는 점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일선에서 묵묵히 고생하며 어린 선수들을 육성하는 지도자들과 달리 선배들이 쌓아온 한국 축구 토양의 과실만 챙기고, 축구 발전을 위한 기여는 하고 있지 않다는 비난의 목소리도 들린다. 이 또한 한국 축구를 해치는 '팀 킬'일 수 있다.

스포츠의 절대 가치는 '존중과 배려'다. 단순히 승리에만 집중하는 것이 아니라, 경쟁자를 존중하고 규칙을 준수하며, 패배를 겸손하게 받아들일 때 스포츠는 아름답고 팬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 룰이 마음에 안 든다고 선수가 경기 중 규칙을 바꿀 수는 없지 않겠는가. 축구 문제는 축구계 안에서 해결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다. 그것이 넘지 말아야할 선이다.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 한다면 지난 100여년 동안 쌓아온 한국 축구의 문화와 유산이 너무 초라하지 않겠는가.

역대 대표팀 가운데 최강의 전력이라는 평가를 받는 선수들을 보유하고도 한국 축구 최대의 위기란 말이 나오고 있는 작금의 현실이 그저 황당할 뿐이다.

skp2002@tf.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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