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석재의 돌발史전] 무덤 두 곳에 묻힌 사나이

유석재 기자 2024. 7. 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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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척 궁촌리에 있는 공양왕릉. 경기도 고양에도 공양왕릉이 있다. /조선일보 DB

―내 이름은 왕요(王瑤)올시다. 1345년에 태어나 1394년까지 살았지요. 신종(神宗)의 7세손이며, 정원부원군(定原府院君) 균(鈞)의 아들이지요. 비(妃)는 창성군(昌城君)의 딸 순비(順妃) 노씨(盧氏)이고요. 이런! 그저 그렇다 이겁니다. 이건 그저 ‘이름’들일 뿐이지요. 허허한 세월의 흐름속에서 이리저리 부는 부질없는 바람에 다 씻겨버려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낡아빠진 비석에나 몇 자 끄적거려 있을 껍데기일 뿐이라오. 정원부원군이고, 창성군이고, 순비고, 그런 것이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역사책을 쓰는 사람들은 나를 공양왕(恭讓王)이라고 적습니다. 한 40년 전쯤이던가요, 한 방송 퀴즈프로그램에 이 이름을 물어보는 문제가 나왔어요. “고려의 마지막 임금은 누구일까요?” 거참 놀랐습니다. 만약 고려가 아니고 백제쯤 됐더라면 금방 답이 나왔을텐데 말이죠. 왜 거 있잖습니까. 옆 사람이 의자를 가리키며 답을 가르쳐주니까 “걸상왕이요!”했다는 얘기. 난다하는 배우 가수들이 아무도 나를 맞추지 못하는 거였어요. 그런데 사회자가 힌트를 준답시고 이런 말을 했어요.(아마도 당신들이 ‘뽀빠이’인가 ‘파파이스’인가 하고 부르는 사회자였던 것 같은데) “심청전하고 관련 있는 이름입니다!” 아니, 세상에, 내가 눈이 멀었나 인당수에 뛰어들기라도 했나, 웬 심청전? 난 황당해서 어리둥절했어요. 그래도 아무도 맞추지 못하자 결국 이런 말을 합디다. “거 왜 있잖아요. 공양미 삼백석!”

―퀴즈 문제에나 나올 이름으로 내 이름을 기억하고 있을 뿐, 정작 나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도 별 관심이 없더군요. 참 이상하죠. ‘개국’이나 ‘추동궁마마’나 ‘용의 눈물’ ‘정도전’ ‘태종 이방원’ 같은 드라마에선 내가 등장하지 않고선 분명히 얘기가 안 될텐데, 내 역할을 맡은 배우가 과연 누구였는지 혹시 기억나시는 분 있습니까? 그 포은(정몽주)이 지은 “이 몸이 죽고 죽어…”하는 시조는 누구나 알고 계시죠? 그럼 거기서 말하는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에서 ‘임’이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지 심각하게 생각해보신 적 있습니까? 몇 백년동안 무덤 속에서 곰곰이 생각해 봐도 논리적으로 그건 나 말고 절대로 다른 누구를 생각할 수 없었거든요. 무슨 조국과 사직에 대한 의인화 따위 국어교과서식 생각을 하지 않는 다음에야.

―내가 그래도 헛된 자리일망정 옥좌에 앉아있을 때는 아무도 날 이런 욕되기 짝이 없는 이름으로 부른 사람들은 없었습니다. 날 강제로 끌어내린 자들이 날 공양군(恭讓君)이라고 강등시켜 불러서 그게 내 시호가 되겠거니 짐작하게 됐던 거지요. 왜 ‘공양’이라는 이름을 붙였는지 아시겠습니까? 글자를 찬찬히 살펴보시지요. ‘공손하게[恭] 양위했다[讓]’라는 얘깁니다. 양위! 창칼 들이밀고 쫓아내놓고는, 양위라고? 선양(禪讓)을 했다는 거예요 글쎄. 자기가 순(舜) 임금이라는 겁니다. 덕이 높은 사람한테 내가 자진해서 자리를 내놨다는 뜻이지요. 평화적 정권교체를 표방한 겁니다. 이미 쿠데타는 위화도회군때 다 끝나 있었어요. ‘개경의 봄’이라 해야 할까요.

―그래놓고 신하들이 옥새를 가지고 찾아가니까 “이 사람 덕이 없으니 다른 분을 추대하시오”라면서 역대 창업자들의 에프엠 시나리오 대사를 그대로 읊었더랩니다. 한두번 그러고 말겠지 생각했는데 뜻밖에 이게 좀 ‘쎘어요’. 그러기를 나흘 동안 했다는 겁니다. 그 나흘 동안 무슨 박충훈 같은 사람도 없이 그냥 자리가 비워져 있는 상태였어요. 그 나흘 동안이 고려시대에 속하는지 조선시대에 속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러고 있는 동안 난 가슴이 마냥 찢어집디다.

―내가 엉겁결에 왕으로 추대된 건 내 나이 마흔 다섯 살 때였지요. 자식들도 이미 장성해 있었고, 왕족으로서 전답 재산 다 물려받고 음풍농월하면서 살았을 거라고 생각들 하시겠지만, 사실 그랬다고 해서 안될 건 뭐 있소? 그게 그 당시 왕족들의 라이프스타일이었는데. 자꾸 역사상의 인물한테 시대를 초월해서 살 걸 요구하지 마시오. 아무튼 왕위를 이어받을 거라든가, 그런건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죠. 맘 다 비우고 야심없이 살았는데, 그렇다고 특별히 나쁜짓 한 것도 없어요. 이건 왕이 돼서도 마찬가지였지만.

―그 한 해 전에 이성계 장군이 위화도에서 회군했어요. 비오는데 강을 건너갈 수 없어서 왕명을 거역했답니다. 비 오면 빨리 도강해서 넓은 요동벌로 진군해야지 왜 그 작은 섬에 대군을 몰아넣고 시간을 보내며 잠자코 있었는지, 강을 건너 갈 수 없었다면서 어떻게 강을 건너 올 수 있었는지 그 깊은 뜻이야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마는, 아무튼 전방부대 다 끌고 들어오는데 최영 장군인들 어쩌겠습니까? 우왕(禑王)을 폐위시키고 그 어린 아들 창(昌)을 잠시 옥좌로 밀어넣더니, 아무래도 안되겠다는 듯이 누구 먼 친척중에 말 잘 들을만한 인물 없을까, 이리저리 찾다가 찾은 게 바로 나였습니다.

―글쎄 나는 7대조 할아버지께서 임금이셨을 뿐이니까 언감생심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런데 모든 왕족들의 공통점은 책 읽을 시간이 엄청나게 많다는 겁니다. 내가 ‘삼국사기’ 정도는 읽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보셨습니까? 연개소문이 영류왕을 죽이고 보장왕을 찾아 세우고, 견훤이 경애왕을 죽이고 경순왕을 찾아 세운 케이스가 머리에 그냥 싹 스치는거예요. 옳구나! 내가 여기에 걸려들었구나! 그걸 알았으면 사양했어야지 왜 그 자리에 덜컥 앉았냐구요? 첫째, 그 두 사람은 다 명대로 살았고, 둘째, 당신이었대도 그거… 쉽게 사양 못합니다. 아무리 실권이 없대도, 그렇게 돌아서서 포기할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어요. 내가 안 했더라도 누군가 했을 거 아닙니까? 그럼 내가 얼마나 불편하겠어요? 글쎄, 즉위하자마자 우·창 두 전왕이 몰래 살해당했다는 얘기를 듣고선 좀 겁나긴 했지만. 아 날 누가 세웠는데? 기록엔 내가 울면서 즉위를 거절했다고 돼 있는데, 그거 다 일종의 절차로 볼 수도 있죠 뭐. 중요한 건 이성계가 날 찜한 이상 내가 아무리 싫다고 발버둥쳐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는 겁니다.

―내가 제일 열 받는 건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내 항목에 ‘과단성이 없다’는 둥 운운하면서 마치 내가 과단성이 없었기 때문에 이성계 일파한테 실권을 뺏긴 것처럼 나와 있는 겁니다. 아니 참, 기가 막혀서. 내 말좀 들어 보세요. 우선, 난 실권을 ‘뺏긴’ 적이 없어요. 나한테는 처음부터 그런 건 있지도 않았으니까. 그리고, 내가 과단성이 있었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습니까? 과단성이 없게 처신한 건 나의 가장 확실한 생존의 수단이었어요. ‘삼국지연의’ 보시면 촉 황제 유선이 망국 뒤에 어떻게 멍청하게 처신했는지 잘 나와있습니다. 그게 나름대로의 지혜에서 우러나왔다는 건 이문열 정도 되는 작가나 눈치채더군요.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은 줄로 아는 사람도 있는데, 과전법 실시도, 의창 설치도, 무과 신설도, 주자가례 시행도 다 최종결재자는 나였어요. 물론 내가 마지막 거부권을 행사하거나, 그런건 없었지만서도.

―그런데, 3년 후에 포은이 갑자기 살해당했어요. 이제와서야 말이지만 난 처음엔 포은 그 사람 좀 사꾸란줄 알았어요. 이성계하고 같이 날 추대한 게 그 사람이었거든요. 이른바 ‘9공신’ 중의 한 명이었는데, 말이 날 추대한 거지 사실 이성계하고 한 패라고 생각했던 거죠. 그런데 죽었어요. 성리학적 이상국가를 꿈꿨던 건 포은이나 그 과거시험 동기인 삼봉(정도전)이나 마찬가지였는데, 포은은 결국 역성(易姓) 혁명엔 반대하고 사라져가는 왕조에 마지막 충절의 피를 뿌렸던 거죠. 그가 죽고 난 그제서야 깨달았어요. 결국 포은이 내 마지막 바람막이였다는 걸.

―그래서 졸지에 원주로 유배 가는 신세가 됐어요. 귀양길을 가면서 곰곰히 생각하고 또 생각했어요. 도대체 내가 무슨 나쁜 짓을 했다고? 아하, 역사의 간계(奸計)에 걸려들면 개인의 도덕적인 잘잘못 여부같은 건 거대한 파도에 휩쓸려버려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수도 있구나. 그렇게 결론이 나더군요. 여기서 간계란 나중에 헤겔인가 하는 덕국사람이 말한 개념하곤 좀 다르겠지만서도… 참 그건 쓸쓸한 길이었어요. 난 경순왕처럼 지방 호족의 지위를 평생토록 유지한 것도 아니고, 내 아들은 용문사에 은행나무 심고 금강산을 떠돌아다니던 마의태자도 아니었으니까요.

―이태 후에 내가 다시 유배간 곳은 간성을 거쳐 삼척이었어요. 동해안 바다 끝, 허어 참 개경에서 멀리도 왔다. 그저 바다 해돋이나 구경하면서 여생을 욕심없이 살아야겠다,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 그게 쉽게 됩니까? 일단 생활방식이 바뀌니까 영 불편하고 괴롭더군요. 허울뿐인 권력이었을지언정 훌훌 털어버리기는 여전히 어렵더군요. 그런데 동래현령 김가행(金可行)이란 사람과 동해안 소금감독관 박중질(朴仲質)이란 사람이 울진·삼척 지역의 인사들을 모아 내 복위운동을 하려고 했습니다. 난 그저 모르는 척 했죠.

―그런데 고려의 구신들과 군사들이 이곳으로 모여 거사를 일으키려고 했지만, 결국 진압당하고 난 삼척으로 온 지 달포만에 저들이 보낸 중추원부사와 형조의랑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처형방법은 교살(絞殺)! 아무리 망국의 폐주이지만 너무 참혹했습니다. 돌이켜보건대 고조선의 준왕, 백제의 의자왕, 가야의 구해왕, 신라의 경순왕… 역대의 폐주들은 모두 명대로 살다 갔습니다. 이성계의 후손들인 순종이나 영친왕도 다 마찬가지였고요. 나같은 사람, 정말 드물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내 시신을 매장하러 가다가 갑자기 발이 붙어 그 자리에 매장했다는 것이 지금 삼척에 있는 내 무덤입니다. 그래도 폐주인지라 “무덤 앞에 집을 지으면 그날 밤 태풍이 불어 반드시 무너진다” “무덤 앞에 암장하면 시체가 사라진다”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철도 개설한답시고 비석과 석물들을 연못에 넣고 산을 깎아 메운 뒤 부근에서 멸치를 말리다 피부병에 걸려 모두 죽었다”는 정도의 전설들은 삼척에 전해 내려온다고 합니다. 어찌 철도 개설하려는 사람들과 멸치 말린 사람들이 동일인물이겠습니까마는. 절절히 서린 한(恨)이 그만큼 컸단 얘깁니다. 지금도 차 타고 동해안을 여행하는 사람들 중에는 가끔 국도변에 서 있는 ‘공양왕릉’ 표지를 보고는 “웬 왕릉이 이곳에?”하고 의아해하는 사람도 있답니다. 참 쓸쓸하죠.

―그런데 지금 내 공식무덤은 고양에 있어요. 지금 일산 근처인 원당동이지요. 분명히 삼척에서 죽었는데 왜 고양에 무덤이?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종 16년에 고양에 내 무덤을 마련한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공양군에서 공양왕으로 복위되고, 제사도 지내줬죠. 세종 19년과 중종 13년에도 내 무덤이 고양에 있는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1662년 삼척부사 허목이 편찬한 ‘척추지’란 책엔 여전히 내 무덤은 삼척에 있다고 나와 있고, 대대로 민간에서 제사를 지낸 곳도 삼척입니다. 조선 초에 민심을 다독이려 개경과 가까운 고양에 내 가릉(假陵)을 하나 만든 것이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어느 쪽이 진짜냐고요? 그걸 가르쳐 드리면 내 마지막 남은 비밀을 공개하는 게 되게요.

고양시 원당동 공양왕릉의 모습. 공양왕의 후손인 개성 왕씨들이 매년 이 곳에서 제를 지낸다. /고양시

―그렇게 궁벽하게 역사의 한 구석에 스러져버린 나같은 사람이 신문에 날 만한 일이라곤 오직 하나, 내 무덤이 도굴당하는 일밖엔 없죠. 그런데 것참…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날줄은 저도 몰랐어요! 2001년의 일이었어요. 고양에 있는 무덤 서쪽 봉분에서 가로 세로 1m씩의 정방형 구멍이 뚫린 겁니다. 어느 신문들은 “공양왕릉 도굴!”이라고 호들갑을 떨었고, 어느 신문은 “훼손되긴 했지만, 무덤의 잔디가 내려앉은 것일 수도 있어 경찰이 도굴 여부를 수사중이다”라고 신중하게 실었더군요. 아아, 내 이름이 이렇게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날이 올 줄이야.

―그런데 정말 창피한 일이죠. 그렇게 해서 신문에 다시 나게 된 내 무덤의 사진 말입니다. 웬만한 고관대작들 무덤도 그것보단 낫다는 말 들을 정도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내 무덤이 다시금 공개됐단 말입니다. 잔디가 무너져내릴 수도 있다는 추정을 할 정도로 정말 황폐하기 그지없는데다가, 아래 사진을 좀 보세요. 무덤 앞에 그게 원래는 석호(石虎)입니다. 호랑이죠. 그런데 원당동에는 어떤 전설이 전해내려오는지 아십니까?

공양왕릉을 지키는 석호. /조선일보 DB

―내가 쫓겨난 뒤에 이곳 고양 땅으로 빠져나와 떠돌고 있었는데, 어느 누각에 숨어서 근처 스님들이 지어주는 밥을 먹고 연명하고 있다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 일가친족들이 날 찾아다니다가 내가 평소 귀여워하던 삽살개를 데리고 날 찾으려 했다는 겁니다. 그런데 그 삽살개가 어느 연못가에 이르더니 마구 짖어댔다는 겁니다. 사람들이 아무리 다른 곳으로 끌고 가려 해도 한사코 버티며 짖더니 결국 연못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들이 연못물을 다 퍼보니… 나와 왕비, 그리고 시종들의 시체가 모두 거기 있더라는 겁니다. 내가 자살했다는 얘기죠. 물론 난 삼척에서 목졸려 죽었으니, 이 얘기는 역사적 사실이 아니고 나중에 지어낸 얘기임이 분명합니다만, 도대체 그 삽살개 전설이 어디서 나왔는지 아십니까? 그 삽살개를 기리기 위해 무덤 앞에 저 ‘강아지 석상’을 세웠다는 겁니다! 강아지라니요, 저건 석홉니다, 석호!

―아무튼, 정말 도굴을 한 것이었다면 참으로 부질없는 짓을 한 겁니다. 호랑이가 강아지 모양으로 서 있는 이 초라한 무덤에서 무엇을 가져가기 위해서 그런 일을 저지른 걸까요? 하지만 그는 영악한 인물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쫓겨나 죽은 덕분에, 저 몽고전란기 망명정부였던 강화도를 제외하고는, 지금 휴전선 이남에 남은 고려왕릉이라곤 제 무덤 두 개밖에 없거든요. 아무리 변변찮은 유물이라 해도 15세기 초의 유물들입니다. 만약 지금까지 남아 있었다면 말이죠. 그것 참!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하겠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허울뿐인 임금’이니 ‘우유부단한 인물’이니 깎아내리는 건 조금도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말이죠. 만일 그런 말을 하는 당신이 그때 내가 있던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당신은 과연 얼마나 당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한 길을 걸어갈 수 있었을까요? 도대체 어느 정도의 빛좋은 ‘자기결정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역사상의 모든 중요한 국면의 인물들이 모두 영웅이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21세기에 사는 당신과 당신 친구들처럼 평범한 인물이어선 안 되는 겁니까? 나를 제물로 삼아 딛고 일어선 그 숱한 영웅과 인걸들… 이성계, 이방원, 정도전, 권근, 조준, 남은, 하륜, 그리고 조선 초의 그 도도하게 흐른 역사. 결과적으로 나는 꼭 있어야 할 자리에 있음으로써 그들을 도와줬던 겁니다. 역사의 숱한 경계선과 모퉁이들에서 마치 아무런 의미 없이 이슬처럼 사라져간 것처럼 보이는 그 숱한 이름들, 난 그 이름들 중 챔피언, 아, 아니지 참, 왕(王)이었던 것입니다.

▶'유석재의 돌발史전’은

역사는 과거의 일이 아니라 현재진행형입니다. 뉴스의 홍수 속에서 한 줄기 역사의 단면이 드러나는 지점을 잡아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매주 금요일 새벽 여러분을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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