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해원의 말글 탐험] [226] 작작 씹읍시다
대학 다닐 때 라면 파는 구내식당에서 으레 망설였다. ‘보통’ 150원, 달걀 넣은 ‘특(特)’ 200원. 계란이야 늘 당겨도 형편이 어디 그런가. ‘특’도 이따금 먹었지만 대개 ‘라보때’였다. ‘라면 보통으로 한 끼 때우기’가 이제 혼자 즐기는 의식으로 바뀌었다. 물론 파 숭숭 계란 탁 곁들이기가 보통이 됐고. 그 시절과 다른 한 가지 더 꼽자면 바로 라보때 같은 약어(略語)가 늘어난 점 아닐까.
‘농협, 수능, 육사’ 따위야 예나 지금이나 흔히 쓰는 말. 언제인지 모르게 들리기 시작한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은 사전에 올라도 어색하지 않을 판이다. 음식 즐기는 방송 프로그램 ‘먹방’이 표준어 되다시피 했는데. 거기서는 ‘겉바속촉(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먹을거리가 인기다. 학생들은 ‘언어와 매체’ ‘확률과 통계’를 ‘언매’ ‘확통’이라고만 줄여 쓴다.
세대나 계층 간에 잘만 통하면 줄인 말을 애써 멀리할 까닭이 없다. 안 그래도 바쁜 세상, 언제 ‘특정 범죄 가중 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가법)’이라 읊을 텐가. 문제는 ‘완소(완전히 소중한)’ ‘훈남(훈훈한 남자)’ ‘생축(생일 축하)’ 같은 푸근함보다 혐오, 경멸 그득한 말이 판친다는 점.
듣보잡(듣지도 보지도 못한 잡놈), 기레기(기자+쓰레기), 개저씨(개+아저씨), 맘충(엄마를 뜻하는 영어 ‘mom’에 벌레 ‘충·蟲’을 합친 말), 똥별(능력도 인품도 엉망인 장성). 세상은 높이높이 나아가는데 말과 글은 품위를 팽개치다 못해 시궁창으로 흐른다. 단순 약어도 아니고 그악스러운 비속어(卑俗語)가 우리 마음을 더럽히지 않는가. 악순환이다.
대통령 부인 문자에 답을 안 한 일을 ‘읽씹’이라며 이러쿵저러쿵 시끄럽다. 읽고 씹었다는 말이라나. 누구를 헐뜯는 행위를 속되게 이르는 ‘씹다’를 대꾸하지 않거나 무시한다는 데까지 끌고 갔다. 쓰임새도 말맛도 천박한데, 명색이 정통 언론들이 덩달아 옮겨 쓴다. 볼썽사나운 정치꾼들 작태만큼이나 낯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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