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가 만난 사람]K무비에 빠진 中영화학자 “韓 여성 감독 4대천후 누군지 아시나요”

베이징=김철중 특파원 2024. 7. 18.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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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영화 100년’ 책 펴낸 판샤오칭 中 촨메이대 교수
한국영화 매료돼 한국 유학길… “다양성이 한국 영화 원동력
여성감독의 천만영화도 나오길”… 中서도 큰 관심, 책 초판 거의 매진
16일 중국 베이징 한국문화원에서 판샤오칭 중국촨메이(미디어)대 연극영화TV예술학원 교수가 저서인 ‘한국 영화 100년’을 들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베이징=김철중 특파원 tnf@donga.com
《2003년 직장을 다니던 29세 판샤오칭(范小青)이 갑작스러운 ‘한국 유학’을 선언했을 때, 주변에선 모두 당황스러워했다. 영화를 공부하겠다면서 한국을 가겠다니…. 부모님도 “할리우드나 프랑스를 가야지, 너무 멀어서 걱정된다면 차라리 아시아에서는 일본이 낫지 않으냐”며 만류했다. 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당시 그에게 절실한 건 그저 영화가 아니라 ‘한국 영화’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무턱대고 한국 유학길에 올랐던 한국 영화광은 지금 중국촨메이(傳媒·미디어)대 연극영화TV예술학원의 교수가 됐다. 한국을 찾은 지 20여 년 만인 올해 ‘한국 영화 100년’이란 책도 펴냈다. 이창동 영화 감독은 추천사에 “한국 영화 100년을 체계적으로 다룬 책이 한국이 아니라 중국에서 먼저 나왔다는 게 놀랍고 뜻깊다”고 썼다.》

중국 내 언론·방송·예술 분야 인재의 산실인 촨메이대는 그의 모교다. 판 교수의 학부 시절 꿈은 예능PD였다. 졸업 뒤에는 베이징의 대표 라디오 방송국인 베이징 런민방송국 교통방송에 아나운서로 취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그에게 영화는 ‘재미있는 취미’였을 뿐이다.

“1990년대 중국 대학의 영화 수업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였어요. 유명 시나리오 작가 출신 교수님이 손가락에 낀 담배를 휘저어가며 홍콩 누아르나 예술 영화를 설명해주시는데 마냥 재밌고 신기했어요.”

그러다 우연히 접한 한국 영화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졸업 직후인 2000년 주중 한국대사관과 삼성전자의 후원으로 마련된 ‘베이징 영화 아카데미―한국영화주간’ 행사였다. 1992년 한중 수교가 이뤄지긴 했지만, 당시만 해도 중국에 한국 영화가 제대로 소개된 적이 없었다. 아시아권 영화라고 해봐야 사실상 일본 영화가 대부분이던 시절이다.

행사에서는 전도연과 한석규 주연의 ‘접속’,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등 한국 영화 6편이 상영됐다. 판 교수는 “참석자 중에 한국 영화를 처음 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는데 다들 깜짝 놀랐다”며 “‘한국 영화는 홍콩을 넘어 할리우드 수준도 머지않았구나’라고 생각했다”고 떠올렸다.

‘진짜 그 정도였을까’ 하는 의구심에 당시 중국 언론 보도를 찾아봤다. 판 교수의 기억은 정확했다. 시나닷컴은 2000년 5월 29일 “행사에 참석한 장이머우(張藝謀) 감독과 중국 영화 관계자들은 한국 영화 제작 수준과 예술적 성취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 됐다”고 보도했다.

우연한 계기는 연달아 찾아왔다. 아나운서로 일하던 시절, 베이징을 방문한 영화 ‘화산고’의 김태균 감독을 인터뷰한 것. 김 감독은 한국 영화에 대한 그의 관심과 열정에 선뜻 한국 유학을 제의했다. 김 감독으로부터 당시 부산국제영화제 부집행위원장이던 이용관 교수를 소개받았고,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의 ‘1호’ 외국인 학생이 됐다.

2018년 7월 이창동 감독을 찾아가 인터뷰할 때 모습. 판샤오칭 교수 제공
“당시만 해도 중국에서 한국 영화 DVD는 흔치 않았어요. 어렵게 구한 이창동 감독의 ‘오아시스’와 허진호 감독의 ‘봄날은 간다’를 너무 감명 깊게 봤어요. 결국 ‘한국 영화를 좀 더 알고 싶다’는 욕구가 샘솟더라고요.”

한국에선 총 7년(석사 4년, 박사 3년)을 보냈다. 베이징으로 돌아와서는 중국 예술 분야 최고 대학의 영화학자이자 한국 영화의 선구자가 됐다. 이른바 ‘성덕(성공한 덕후)’인 셈이다. 2시간 넘는 인터뷰도 한국말로 하고, 아리랑을 구성지게 부를 만큼 능숙하다. 한국 영화에 대한 지식과 애정은 웬만한 한국 사람은 비교할 수 없을 수준이었다.

“한국 영화를 공부한 이래 제일 의아했던 게 2가지였어요. 첫째는 ‘봉준호 감독이 왜 아카데미 시상식에 오르지 못할까’였고, 두 번째는 ‘왜 한국은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없을까’였어요. 이제 첫 번째 궁금증은 풀렸고,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 제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이창동 홍상수 같은 분들이 소설이 아닌 영화를 만들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어요.”

2016년 한국의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 이후 지금까지 한한령(限韓令)으로 중국 내 극장가에선 한국 영화를 찾아볼 수 없다. 한국 영화에 대한 중국인들의 관심은 여전한데, 교류가 막혀 있다 보니 소셜미디어에는 잘못된 정보도 많아졌다.

이에 판 교수는 한국 영화를 제대로 소개할 책을 써보자고 결심했다. 2014년부터 2018년까지 한국을 오가며 총 26명의 한국 영화 관계자를 직접 인터뷰하고 자료도 수집했다. 책에 소개된 그의 ‘인터뷰이 리스트’에는 강우석 강제규 김기덕 이창동 이준익 등 감독들부터 심재명 차승재 등 영화 제작자들까지 충무로의 내로라하는 영화인들이 총망라돼 있다.

판 교수의 책은 한국 영화 100년을 서술했지만, 시간순으로 늘어놓지 않고 세대별 특징적인 감독을 구분해 정리했다. 그는 책에서 2000년대 이후 한국 영화 중흥기를 이끈 4대 천왕으로 ‘이창동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를 꼽았다. 4명 중에 ‘최애’ 감독을 꼽아달라는 요청엔 손사래를 치며 “도저히 고를 수 없다”고 했다. 그 대신 몇몇 감독에 대한 평가로 답을 대신했다. “홍상수 감독은 사오첸(燒錢·돈을 많이 투자하다)이 아닌 사오나오(燒腦·머리를 쓰다)가 중요하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죠. 돈을 들이지 않아도 홍 감독에 의해 시간과 공간이 자유롭게 열리잖아요. 박찬욱 감독은 매번 새로운 이야기를 발굴해 우리를 놀라게 하는 재주가 있고요.”

대신 최고의 영화는 주저 없이 봉 감독의 영화 ‘살인의 추억’이라고 외쳤다. “단순한 장르물처럼 보이지만, 한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훌륭하게 담아냈어요. 특히 영화적 재미를 놓치지 않은 채 그런 요소를 숨겨놓았다는 게 정말 고급스러워요.”

중국인 영화학자가 본 한국 영화의 성공 비결이 무엇일까. 판 교수는 한국의 사회학 용어인 ‘86세대’(1980년대에 대학을 다닌 1960년대생)의 개념을 차용했다.

“홍상수 박찬욱 봉준호 감독 모두 ‘86세대’예요. 이들은 오락성이 강한 대중문화와 할리우드 장르물을 보며 사춘기를 보냈고, 대학생이라는 엘리트층에 머물면서 사회와 인간에 대한 통찰력을 키웠죠. 삶의 경험이 예술성과 상업성을 조화시킬 수 있는 배경이 됐고, 그게 전 세계를 사로잡는 무기가 됐다고 봐요.”

한국도 중국 영화에 열광하던 시절이 있었다. 정확히는 1980, 90년대 홍콩 누아르 영화를 이끈 우위썬(吳宇森·오우삼) 왕자웨이(王家衛·왕가위) 감독에 이어 ‘붉은 수수밭’의 장이머우, ‘패왕별희’의 천카이거(陳凱歌) 등에게 열광했다.

판 교수는 현재 한중 영화의 차이를 ‘다양성’으로 꼽았다. 영화 소재 선정에 앞서 감독이 가진 경험의 다양성도 포함한 지적이었다. “이창동 감독은 국어교육과, 허진호 감독은 철학과를 나왔어요. 각자의 배경 지식과 관점이 다를 수밖에 없죠. 반면 중국은 영화 아카데미 출신 등 전문적으로 영화를 배운 감독들이 많은 편이에요.”

최근 한국 영화계에 대한 아쉬움도 털어놨다. 너무도 대단한 성공 모델들이 생겨났고, 대형 배급사의 힘은 더 커졌다. 쇼트폼에 익숙한 젊은층을 겨냥하다 보니 자극적인 상업 영화들이 많아졌다는 것. 다만, 판 교수는 한국 여성 감독들의 활약이 새로운 희망이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이번 책에서도 한국 여성 감독인 임순례 김도영 김보라 윤단비를 ‘사대천후’로 지칭하며 비중 있게 다뤘다. 최근 넷플릭스 같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의 열풍으로 오히려 스크린 공간에서 창의적인 여성 감독들에게 기회가 열리고 있다는 의견도 덧붙였다.

“역대 천만 관객을 넘은 한국 영화 24편 가운데 여성 감독이 만든 작품은 1개도 없어요. 오히려 중국에선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여성 감독이 많아요. 남성 감독들이 그동안 간과해온 삶의 또 다른 면을 섬세하게 그려내는 여성 감독들이 한국 영화의 미래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번에 출간한 ‘한국 영화 100년사’는 2022년 말 탈고했지만, 1년 반 만인 올해 4월 정식 출간됐다. 중국 내 반응도 예상보다 뜨거웠다. 주요 온라인 도서 플랫폼에서 수개월 동안 판매 순위 상위권에 올랐다. 초판으로 전문 학술지치고는 많은 1만 권을 인쇄했는데 이미 거의 다 팔렸다고 한다. 지난달 중국 영화예술센터에서 이 책을 위한 특별 전문가 세미나도 열렸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런민일보는 지난달 6일 “학술적 가치와 가독성을 겸비해 일반 독자와 전문가, 학자들의 공감을 얻고 있다”고 소개했다.

판 교수는 연구와 출판 외에 언론에도 약 300편의 한국 영화 관련 글을 실었다. 2019년 영화 ‘기생충’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았을 때에는 또 다른 기관지 광밍일보의 요청으로 한국 영화에 대한 심층 분석 글을 쓰기도 했다.

그는 한중 문화 교류에 힘써온 공로를 인정받아 9일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한 ‘코리아콘텐츠위크 인 베이징’ 행사에서 공로상도 받았다. 판 교수는 ‘한국 영화 100년’ 한글판을 올해 안에 출판하는 것을 목표로 현재 번역 작업을 한창 진행 중.

“이번 책은 중국 독자들이 한국 영화의 큰 흐름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만드는 게 목표였어요. 이제는 중국과 한국 민족의 정서, 각 장르의 깊이 있는 분석을 담은 ‘교과서’를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판샤오칭(范小青) 교수
△ 1999년 중국촨메이(傳媒)대 졸업
△ 2000∼2002년 베이징런민방송국 아나운서
△ 2007년 중앙대 첨단영상대학원(석사)
△ 2008년∼촨메이대 연극영화TV예술학원 교수
△ 2016년 동서대 임권택영화예술대학 박사

베이징=김철중 특파원 tnf@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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