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후 46년 만에 등단한 문학청년 남정국 [고두현의 아침 시편]
독백체 7 -불새를 꿈꾸며
남정국
아니다, 순아
그게 아니라 나는 불새가 되고 싶은 거다
활활 타며 날아가는 새, 아니면 불같이 붉은 새
온몸으로 허물어지는 새
허물어져서 자신을 이루는 새
그리하여 어떤 코뮤니스트의 깃발보다도 더욱더욱 붉게
나는 괴로워하고 싶은 것이다
피를 흘리고 싶은 것이다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아니다, 순아
정말 그것이 아니라
나는 불새가 되고 싶은 것이다
빠알갛게 달아오른 아침 해 속에서
푸더덕거리며 잠을 깨는 새, 꿈틀대는 힘을
그침 없는 울음으로 뱉아내는 새
아주아주 뜨거운 새.
춥구나, 도와다오
아름다운 불새를 꿈꾸며
하루를 버리고 이틀을 버려도
비켜 가는 것뿐인데
도와다오
나는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순아
내가 너의 볼을 만지면
그 볼의 온기만큼만, 그만큼만 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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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청년 남정국(南正國)이 고려대학교 1학년 때인 1978년 9월에 쓴 시입니다. 1958년 12월 21일생이니 만 19세 때였지요. 두 달 뒤인 11월 4일, 그는 경기도 대성리 북한강에서 배가 뒤집히는 바람에 만 20년의 삶을 채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물에 빠진 벗들을 모두 구하고 차가운 강 밑으로 사라진 그를 1주일간의 수색 끝에 발견했다고 합니다.
그가 남긴 시편들은 이듬해 친구들에 의해 소박한 문집으로 묶였습니다. 그러나 어수선한 시국 속에 제대로 평가를 받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반세기 가까이 잊혔던 그의 작품들이 최근 유고 시집 『불을 느낀다』(엠엔북스)로 되살아났습니다.
이 시집에는 새로 발견한 시 한 편을 포함한 27편의 시와 생전의 일기, 초고, 작품 메모가 실려 있습니다. 문학회 선배와 동료, 누이의 추모글도 함께 실렸지요. 문단에서는 ‘박제된 문학 천재’의 요절을 애석해하며, 사후 46년 만에 시인으로 등단한 그의 작품을 재평가하고 있습니다.
이번 시집 출간을 제안한 이재욱 문학뉴스 대표는 고대문학회에서 함께 보낸 마지막 여덟 달의 시간을 되새기면서 “우리 가슴 속에 응어리로 간직하고 있던 남정국이라는 인물과 시편을 비롯한 기록들이 그동안 박제가 되어있었는데 유고 시집 출간으로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의 작품들이 새 생명을 얻게 되길 바란다”고 말했습니다.
기형도 시인을 발굴했던 임우기 문학평론가도 “기 시인보다 젊은 나이에 좀 더 치명적인 면모를 보여준 남정국의 시에 대해 문학적 관심과 평가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습니다.
해설을 쓴 백학기 시인은 “갓 스무 살이 채 안 된 시인이 이러한 시어와 울림을 빚어내고 구사할 수 있을까 찬탄이 나온다”며 “무릇 천재란 어느 시대에나 어느 역사에나 존재했음을 상기하면 지나친 일도 아니다”라고 평했습니다.
남정국의 시는 서정적인 주제를 비롯해 시대적인 아픔과 존재론적 고뇌를 탁월한 은유로 보여줍니다. 깊이 있는 사유와 간결한 묘사, ‘우물 속에 내려온 별’과 같은 아포리즘까지 담고 있지요.
시집을 넘기다 보면 ‘불’의 이미지를 자주 만날 수 있습니다. 이 시 ‘독백체 7-불새를 꿈꾸며’에서도 그는 사랑하는 ‘순’이에게 ‘불새’가 되고 싶다고 고백합니다. 그가 꿈꾸는 새는 “활활 타며 날아가는 새, 아니면 불같이 붉은 새/ 온몸으로 허물어지는 새/ 허물어져서 자신을 이루는 새”입니다. 나아가 “빠알갛게 달아오른 아침 해 속에서/ 푸더덕거리며 잠을 깨는 새, 꿈틀대는 힘을/ 그침 없는 울음으로 뱉아내는 새/ 아주아주 뜨거운 새”이기도 하지요.
그가 이토록 뜨거운 새를 꿈꾸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피’보다 더 소중한 ‘자유’입니다. “그리하여 어떤 코뮤니스트의 깃발보다도 더욱더욱 붉게/ 나는 괴로워하고 싶은 것이다/ 피를 흘리고 싶은 것이다/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춥고 어둡기만 하지요. 그래서 “도와다오/ 나는 자유롭고 싶은 것이다. 순아/ 내가 너의 볼을 만지면/ 그 볼의 온기만큼만, 그만큼만 순아”라는 안타까운 ‘독백’이 더욱 애틋하고 슬프게 다가옵니다.
시집 제목이 된 시 역시 ‘불’이지요. “불을 느낀다/ 발끝에서 머리끝까지/ 마침내 가슴으로 쳐들어가는/ 결심하는 자의 망설임/ 그의 광기(狂氣)를 듣는다.” 전문 5행의 짧은 분량이지만 ‘광기’에 가까운 ‘불’의 강렬한 힘을 뿜어내는 시입니다. 온몸을 관통한 불이 “마침내 가슴으로 쳐들어가는” 그 순간에 “결심하는 자의 망설임”이라는 반전을 통해 서늘한 역설의 의미까지 전달합니다.
그의 ‘불’은 단순히 뜨겁기만 한 것이 아니라 ‘차가운 얼음 위의 잉걸불’ 같고 ‘밤하늘에 별로 박혀 타는 불’ 같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이지요.
시집 뒤편에 있는 초고와 메모에는 좀 더 직접적인 표현들이 나옵니다. 시대와 역사에 관한 성찰, 인간과 사회에 대한 고민이 진솔하게 적혀 있군요.
“참여나 순수라는 관사를 나의 문학 앞에다 붙이지 마라. 나는 문학(文學)을 했을 뿐이다. 인간의 진실을 담길 원했을 뿐이다.” “모름지기 현대의 문학은 인간의 소외에 대하여 쓰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각오와 다짐과 함께 짧은 생을 살다 간 그는 시대의 어두움과 차가운 현실을 넘어 “어느 싱그러운 여자의 그리움같이 뽀오얀 가슴에 두루두루 마치 봄인 듯 차서 넘치는 그 순한 햇살들을 만지고 싶다”는 소망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순한 햇살’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생의 뜨거움 때문이었을까요. 열아홉의 젊고 붉은 ‘불새’는 “내가 길 떠날 땐 숟가락, 젓가락, 강아지, 봉선화, 요강, 이불, 마누라, 곡괭이, 모두 모두 남겨놓고 그냥 떠날 겁니다”라는 메모를 남긴 채 끝내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반세기가 지나는 동안 “그래도 천국이 있을까 싶어 저물녘 강둑을 소일”하던 그가 지금 우리에게 다시 묻습니다.
“평화는 없을까. 구름처럼 표표히 흐를 수 있는 내 거칠은 심장을 씻을 강물은 말랐는가.”
오는 23일(화) 오후 6시에는 서울 세종문화회관 지하 1층 서클홀에서 북토크 ‘46년 만에 돌아온 스물의 시인 남정국 불을 느낀다’가 열립니다. 김미옥 문예평론가의 사회로 노혜경⸱백학기 시인의 대화, 바리톤 안희동과 뮤지컬배우 나정윤의 노래, 박주현 시낭송가의 낭송 등이 펼쳐집니다.
■ 고두현 시인 : 199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늦게 온 소포』, 『물미해안에서 보내는 편지』, 『달의 뒷면을 보다』, 『오래된 길이 돌아서서 나를 바라볼 때』 등 출간. 김달진문학상, 유심작품상 등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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