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아의 할매 열전]복이와 복이 어매
어느 여름밤이었다. 등나무 덩굴 우거진 교정에 우뚝 버티고 선 복이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두어 해 전만 해도 덩치가 비슷했는데 복이는 그새 훌쩍 자라 소년이 되어 있었다. 어두웠지만 나를 노려보는 날 선 눈빛의 기운은 고스란히 느껴졌다.
“깡패들하고나 어울리고, 자알하는 짓이다! 엄마를 생각해서라도 네가 그러면 안 되지!”
복이 엄마는 삐뚤이 할매가 녹동을 떠도는 사이 할매의 자리를 차지한 첩이었다. 첩이라 그랬는지 복이 엄마는 택호도 없어 복이 어매라 불렸다. 본처 자식들처럼 복이라는 돌림자로 이름을 지었지만 복이 첩의 자식이라는 것을 온 동네가 다 알았다. 복이는 제 엄마를 닮아 순하고 얌전한 아이였다. 짓궂은 남자애들이 여자애들의 고무줄을 끊고 도망갈 때도 복이는 우는 여자애를 다독이던 순하고 다정한 아이였다. 그랬던 아이가 중학생이 되면서 깡패들과 어울린다는 소문을 듣고 방학 때 고향에 다니러 온 내가 오지랖 넓게 복이를 불러낸 것이었다. 네가 그러면 너희 엄마가 무슨 낙으로 살겠냐는 말에 복이는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소리쳤다.
“니가 먼디? 니 까짓것이 먼디?”
“너 생각해 하는 말이니까 정신 차려! 조금 전에도 너네 엄마, 골목길에서 너 기다리고 계시더라.”
지금 생각하면 되지도 않는 오지랖이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이상하게 복이와 복이 엄마만 보면 가슴이 저렸다. 아마 동질감을 느꼈던 모양이다. 빨갱이의 딸인 나나 첩의 자식인 복이나 세상에서 받아들여지지 않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
복이 성적표를 받는 날은 삐뚤이 할매의 자식들도 성적표를 받는 날이었다. 그 집 자식들은 두드러지게 공부를 잘했다. 고등학교 연대장을 하는 언니도 있었고, 최소한 다들 부반장쯤은 했다. 성적표 받는 날, 그러니까 방학하는 날, 삐뚤이 할매는 그 어느 때보다 기세가 등등했다.
“아이, 복아. 니는 이참에 성을 아조 양씨로 바꽈부러라야.”
복의 성적표에 주로 ‘양’이 많았던 모양이다. 모르긴 몰라도 삐뚤이 할매 자식들은 ‘수’ 천지였겠지.
“새끼덜은 지 어매 머리 닮는다는디…. 고런 머리로 워치케 사내는 후렸능가 모리겄어. 허기사 굼벵이도 굴르는 재주는 있응게잉.”
복이 엄마는 무릎 꿇은 복이 옆에서 자기 성적표라도 되는 양 머리를 조아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삐뚤이 할매는 의기양양하게 암만 멍충이라도 밥은 묵어야 됭게 기왕지사 걸음한 거 밥이나 묵고 가라고 배알 꼴리는 소리를 늘어놓았고, 어느 순간 복이 엄마는 고개를 반짝 들고 복이 아버지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복이 모자가 돌아간 뒤 복이 아버지는 곧 밥상이 나올 판인데 헛기침을 하며 집을 나섰다. 당연히 복이네 가는 거였다. 그런 날, 복이 아버지는 며칠씩 삐뚤이 할매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복이 엄마는 남편을 쥐 잡듯 잡았다. 큰집 자식들이 남편을 데리러 오기라도 하면 방문을 부여잡은 채 눈에서 시퍼런 불꽃을 튕겨냈다.
“한 발짝만 움직에보씨요. 나가 농약을 묵든가 쎗바닥을 칵 깨물든가 이 자리서 뒤져불랑게.”
드세기 짝이 없는 삐뚤이 할매를 쥐 잡듯 잡던 복이 아버지는 첩의 패악 앞에서는 꼼짝도 하지 못했다. 복이 엄마는 유일하게 복이 아버지에게만 드셌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봄바람처럼 나긋나긋했다. 복이 아버지와 복이 엄마, 삐뚤이 할매, 셋의 복잡한 속사정을 나는 지금도 다 알지 못한다. 다만 남편을 붙잡아두는 것 외에 복이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으리라 짐작한다. 첩에게는 남자의 마음을 차지하는 것 외에 어떤 권리도 없었으니까. 첩이 되고 싶어서 되던 시절도 아니었다. 남자에게 겁간을 당하면 본처로든 첩으로든 살아야만 하던 시절이었다. 지금도 남편이 집만 나가려 하면 야누스처럼 순식간에 앙칼져지던 복이 엄마의 모습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나의 오지랖 앞에서 부르르 떨던 중학생 복이도. 그날 이후 복이를 본 적이 없다. 첩의 자식이었던 복이는 구례를 떠난 뒤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다. 빨갱이의 딸이었던 나는 돌아왔는데….
정지아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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