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일의 좋은 정부 만들기]퇴직연금에 ‘밑빠진 독상’을
‘밑빠진 독상’이라는 것이 있다. 내가 활동하는 ‘함께하는 시민행동’ 좋은예산센터에서 만든 상으로, 정부 및 공공기관의 예산 낭비 사례에 수여한다. 2000년 8월 ‘하남국제환경박람회’에 처음 수여한 이래, 지금까지 39회 수여하였다. 고등학교 사회 교과서에 실리는 등 나름 명성을 얻었으나, 2010년대 중반부터 다소 주춤했다. 이제 심기일전하여 다시금 활성화하려 한다.
선정 위원회에서는 40회 수상작으로 어떤 사례를 선정할지 논의 중이다. 각자 후보작을 추천했다. 나는 퇴직연금을 추천했다. 이유는 퇴직연금 수익률이 너무 낮아서 가입자들의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작년인 2023년의 퇴직연금 수익률은 5.26%였다. 이것만 보면 제법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착각이다. 2023년에는 증시가 워낙 좋았다. 한 해 동안 코스피는 18.7% 상승했다. 퇴직연금 수익률의 3배가 넘는다. 그 덕에 2023년의 국민연금 수익률도 13.59%로 역대 최고를 기록했다. 최근 5년의 평균 수익률을 보면 퇴직연금은 2.35%이고, 국민연금은 7.63%이다. 국민연금 수익률은 퇴직연금의 3배가 넘는다.
수익률 비교만으로 퇴직연금 운용이 얼마나 엉망인지 실감하기 어렵다면, 구체적인 액수를 따져보자. 2018년 말 퇴직연금 적립금은 190조원이었다. 5년 뒤인 2023년 말의 적립금은 382조4000억원이다. 5년 만에 두 배 이상 커졌으니 엄청난 성장세다. 적립금 증가에는 추가된 보험료 납입금과 쌓아둔 적립금의 운용수익이 모두 작용했다. 그런데 지난 5년의 퇴직연금 운용수익률이 국민연금과 동일했다면 2023년 말의 적립금 규모는 얼마나 더 늘었을까. 계산해보면 2023년 말의 적립금은 453조원 이상이었을 것으로 나온다. 퇴직연금 수익률이 국민연금만큼 되었다면 70조원이 더 불었을 것이라는 얘기다.
작년 수익률 5.26%, 운용 엉망
이 비교로도 감이 잘 안 오면 이번에는 개인 입장에서 퇴직연금과 국민연금 수익률 차이를 따져보자. 갑돌이의 월 급여는 400만원이다. 그가 30년간 근무하고 퇴직한다면, 퇴직 시점에서 그동안 납입한 퇴직연금원리금은 얼마일까. 퇴직연금 보험료율은 8.33%이므로 갑돌이는 매달 33만3000원씩 30년을 부은 셈이다. 퇴직연금과 국민연금 수익률은, 소수점 이하는 버리고 각각 2%와 7%로 가정하자. 수익률 2%로 30년 가입했을 때 원리금 합계는 1억6000만원이다. 그런데 수익률이 7%면 4억원이 넘는다. 어마어마한 차이다. 법원은 퇴직연금을 월급의 일부라고 판정했다. 재직 중 받아야 할 월급 중 일부를 떼어내서 저축한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러니 갑돌이 입장에서는, 국민연금공단에서 운용했다면 4억원이 넘었을 내 돈이, 민간 금융기관이 운용한 탓에 1억6000만원으로 쪼그라든 것이다!
이처럼 개인의 노후자금이 형편없이 쪼그라드는데도 거세게 항의하지 않는 것이 기이하게 느껴진다. 나는 사학연금 가입자라서 퇴직연금은 해당이 없다. 만일 내가 퇴직연금 가입자였다면, 당장 시위대를 조직해서, 이게 고쳐질 때까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팻말 들고 시위를 했을 것 같다. 아직은 확정급여형, 즉 개인은 정해진 급여액을 수령하고 적립금 운용 손익은 다니는 회사가 떠안는 형태가 많다. 하지만 변동급여형, 즉 운용 손익이 온전히 개인 몫이 되는 형태가 꾸준히 늘어서, 조만간 대세가 될 것이다. 그리되면 퇴직연금 운용수익률은 국민 다수의 노후대비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내가 퇴직연금에 밑빠진 독상을 줘야 한다고 열심히 설명하고 나니, 잠시 뒤에 반론이 나왔다. 퇴직연금이 엉망이고 그 때문에 국민의 노후자금이 큰 타격을 입은 것은 분명하지만, 밑빠진 독상을 주기에는 결격사유가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는 퇴직연금의 주체가 정부나 공공기관이 아니라는 점이다. 퇴직연금은 민간 금융기관이 운용한다. 그리고 어느 금융기관의 무슨 연금상품에 가입할지는 개인(혹은 회사)이 결정한다. 그러니 낮은 운용수익은 가입자의 자발적 선택과 금융기관의 무능력 탓이지, 정부 잘못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반박했다. 대략 이런 내용이다. ‘퇴직연금은 의무가입이다, 강제로 급여(인건비)에서 떼어간다는 점에서 국민연금과 마찬가지다, 왜 국민연금은 국민연금공단이 도맡아 운용하면서 퇴직연금은 개인(회사)이 알아서 하라고 하는가, 퇴직연금을 강제하면서(이런 나라는 제법 많다) 운용 책임을 개인에게 떠넘기는 나라는 우리 외엔 찾기 어렵다, 강제 가입이면 수익률 높일 방안도 함께 제공해야 한다(많은 나라가 그렇게 하고 있으며, 덕분에 수익률은 우리보다 3배 이상 높다). 이를 안 한 것은 정부의 직무 유기다.’
국민 노후자금에 큰 타격 입혀
그러자 두 번째 반론이 제기되었다. 5년간 70조원이 덜 쌓이고 개인 퇴직 적립금이 2억원 이상 줄었다지만 실제 그만한 돈을 날린 것은 아니고 단지 기회비용일 뿐이라는 것, 정부 돈은 더더구나 아니라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반박하기 어려웠다. 비록 국민 노후자산을 형편없이 쪼그라뜨렸지만, 그만한 액수의 정부 예산을 실제 낭비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퇴직연금의 밑빠진 독상 수여는 여전히 고민 중이다. 밑빠진 독상 수여 조건을 고쳐야 할까. 어쨌든 정부의 직무유기로 인해 국민의 노후자산이 날아간 것이니, 이것도 낭비의 일종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엉망인 퇴직연금 탓에 국민 노후가 어려워지면 그만큼 기초연금 등 정부 재정지출이 늘어야 하니, 결국 예산을 낭비한 것으로 간주하면 어떨까. 이도 저도 안 된다면 고용노동부나 금융감독원의 담당 공무원 인건비만큼만 예산을 낭비한 것으로 잡아야 할까. 하지만 이것만 셈하면 너무 액수가 작아질 텐데.
내 생각에는, 직접 정부 예산을 낭비한 것이 아니라 해도 정부 잘못(해야 할 규제를 안 하고, 만들어야 할 장치를 안 만든 것)으로 국민에게 손해를 끼친 것 역시 밑빠진 독상 수여 조건에 포함하는 게 맞을 것 같다. 국민의 손해라는 면에서는 예산 낭비와 진배없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는 부지기수이고, 직접적인 예산 낭비보다 피해가 더 큰 경우도 제법 되기에 더욱 그렇다. 이에 대한 독자 여러분의 의견을 구한다.
김태일 고려대 행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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