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난장] 꿈이 사라지는 나라

유일선 한국해양대 명예교수 2024. 7. 18. 20:09
음성재생 설정
번역beta Translated by kaka i
글자크기 설정 파란원을 좌우로 움직이시면 글자크기가 변경 됩니다.

이 글자크기로 변경됩니다.

(예시) 가장 빠른 뉴스가 있고 다양한 정보, 쌍방향 소통이 숨쉬는 다음뉴스를 만나보세요. 다음뉴스는 국내외 주요이슈와 실시간 속보, 문화생활 및 다양한 분야의 뉴스를 입체적으로 전달하고 있습니다.

끊이지 않는 재해 현장의 죽음들…인간을 수단으로 삼는 것에 기인
채 해병의 순직에 쏟아지는 막말, 국민 생명·안전 보호를 잊은 공복
유일선 한국해양대 명예교수

지난달 16일 19세의 젊은 노동자가 전주 제지공장에서 쓰러져 숨을 거두었다. 특성화고를 졸업하고 취업한 지 6개월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의 메모장에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 고민하면서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목표를 세우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는 실행 계획이 꼼꼼히 기록되어 있었다. 가난하지만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지식을 높이고 타인과 교감하면서 자신의 꿈을 실현하려는 청년의 못다핀 열정에 가슴이 아린다.

1970년에 22세의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이 있었다. 인간다운 삶을 꿈꾸다 ‘근로기준법’ 책 한권을 가슴에 안고 자신의 몸을 불살랐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를 외쳤다. 그리고 쓰러져 의식을 잃기 전에 마지막 작은 외침,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의 수기에는 비인간적인 노동환경 속에서 고통받는 어린 봉제공에 대한 연민, 가난으로 포기한 초등학교 중퇴의 학업을 이어 대학 진학을 위한 미래계획, 근로기준법을 독학으로 공부하고 노동환경개선을 위한 힘겨운 분투, 그 과정에서 겪는 무시 냉대 모욕에 대한 고뇌 등이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가난하지만 인간 사랑에 대한 갈망, 지식에 대한 탐구와 타인의 고통에 대한 연민이 이끄는 청년 전태일의 꿈과 열정에 숙연해진다.

아직도 이러한 죽음의 행렬은 이어지고 있다. 이태원 참사와 오송 참사, 채 해병 순직과 이어지는 군인사망 사건, 아리셀 화재사건처럼 수많은 산업현장에서 재해로 쓰러진 사람의 수는 줄어들 줄 모른다. 2024년 1분기에도 재해조사 대상 사고사망자는 138명(136건)으로 전년동기 128명(124건) 대비 10명(7.8%), 12건(9.7%)이 늘어났다. 그들도 저마다의 꿈을 가지고 미래를 설계했을 것이다. 왜 이 땅은 생명과 꿈을 앗아가면서 희망이 절망이 되는 비극의 나라가 되어갈까?

꿈은 한 인간의 주체적인 삶의 방향을 제시한다. 따라서 꿈을 갖는다는 것은 단독자로서 고독하고 의연한 결단이며 자신의 진정한 삶의 시작이다. 한나 아렌트(H. Arendt)가 말하는 “하나의 시작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스스로 시작하는 자”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꿈은 자기 일생 동안 실현된다는 보장이 없다. 자신 내면의 불안정성, 미래의 불확실성, 자신의 인식능력의 한계와 사회구조적 억압 등으로 끊임없이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꿈이 비추는 희망의 등불을 보면서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꿈의 방향으로 걷기 위해 무엇을 배우고 준비하며, 타인과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등을 포함한 구체적인 삶의 단계적 목표와 실행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실천하고 성찰하면서 자신의 꿈에 한 발자국씩 나아가는 것, 그 자체에 자신의 존재와 삶의 의미를 부여한다. 따라서 인간을 존재로 대하지 결코 수단으로 삼지 않는다. 꿈이 없는 사람은 삶의 방향이 없으니 자신의 미래계획을 세울 필요가 없다. 그러니 자아실현을 위해 탐구하고 타인과 공존을 위해 노력하고 좀더 나은 미래를 위해 성찰할 필요가 없다. 오직 현재를 살아내기 위한 이해득실에 대한 고뇌만 있을 뿐이다. 이것을 위해 얼마든지 자신의 말과 행동을 수시로 바꿀 수 있으며, 인간뿐만 아니라 사상 법 제도 등 모든 것을 수단화하는데 거리낌이 없다.

이런 사람들이 국민의 공복(公僕)이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임성근 사단장의 탄원서가 이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군인은 국가가 필요할 때 군말 없이 죽어주도록 훈련되는 존재”라고 썼다. 국가의 권위 뒤에 숨어 ‘자신이 필요할 때’ 인간 목숨은 ‘조그마한 사건’ 정도로 가볍게 처리해야 한다는 일제 군국주의의 섬뜩함이 느껴진다. 그러니 주진우 의원처럼 한 인간의 죽음 정도는 “군장비 파손”으로 말해도 “정당한 내용”인데 웬 시비냐는 강변은 자신에겐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들은 마지막에 가수 김흥국처럼 진부한 “가짜 해병 있고 좌파 해병 있는 거 이번에 알았다”고 이념의 잣대를 들이댄다.


이들의 정점에 윤석열 대통령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검찰권의 남용으로 공정과 상식이 붕괴되고, ‘도이치모터스 주가조작’과 ‘디올백’으로 법치주의가 무너지고, 야당 무시와 거부권 남발로 정치가 실종되고, ‘합리적 대파’로 민생경제와 부자감세로 국가재정은 멍들고, ‘입틀막’으로 자유는 추락하고, R&D예산 삭감으로 인재들의 꿈은 사라지고, 재생에너지와 탄소중립의 경시로 미래산업은 포기되고, 잼버리·엑스포 실패, 푸틴의 방북으로 외교가 무너지고, 대북전단 살포와 ‘오물풍선’으로 남북 관계가 악화되고, 이해 득실의 범람 속에 언어가 혼탁해지니 소통이 마비되고. 이런 혼란 속에 헌법의 명령인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지키는 것’, 국가의 꿈이 사라지고 있다. 이 꿈을 되찾는 것, 결국 주권자인 우리의 몫이 아니겠는가?

Copyright © 국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