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 명품백과 스파이
한·미관계 역사에서 이례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미국 검찰이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을 외국대리인등록법(FARA)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테리는 1972년 한국에서 태어나 10대 초반 미국으로 이민했다. 국제관계학 박사학위를 받고 2001~2008년 중앙정보국(CIA) 정보분석관, 2008~2009년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과장을 지냈다. 이후 전문가로서 강경한 대북 정책을 옹호해왔다.
미국 언론이 전한 공소장에 따르면 테리는 2013~2023년 한국 국가정보원 직원들로부터 고가의 식사 대접과 명품백 선물 등을 받고 국무장관이 참여한 비공개 회의 내용을 전해주는 등 한국 정부를 위해 일한 혐의를 받는다. 기고·강연을 통해 한국 정부 정책을 옹호했다고도 한다. 테리는 지난 16일 기소와 함께 체포됐지만 보석금을 내고 풀려났다. 그는 변호인을 통해 혐의를 강하게 부인했다.
외국대리인등록법은 미국인이 외국 정부 등의 이익을 위해 일할 경우 법무부에 신고하도록 한 법이다. 테리는 의회 청문회에 전문가로 증언할 때 외국 대리인이 아니라고 서약할 기회가 있었지만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법은 나치의 선전·간첩 활동에 대응하려는 목적으로 1938년 만들어졌다. 현실에서 모호한 측면이 있어 늘 엄격하게 적용됐다고 볼 순 없다. 외국 대리인으로 등록하면 합법 로비스트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불법 스파이로 간주된다. 이 법은 방첩법보다 형량은 낮지만 유죄 입증이 용이하다.
관심은 검찰이 왜 이 시점에 테리를 기소하고 공개했느냐이다. 외국 정부 이익을 위해 일하는 다른 미국 시민, 미국에서 활동하는 외국 정보기관에 경고를 보낼 필요가 있었던 걸로 해석된다. 극우 성향 국가주의를 강하게 표방하는 트럼프 현상과 떼어놓고 보기 어렵다. 이번 기소로 국정원은 정보 활동 방식이 소상하게 공개돼 망신을 당했고, 그것은 한·미관계에도 부담을 줄 수 있다.
흥미롭게도 한국계 미국인 최재영 목사가 김건희 여사에게 접근할 때 활용한 명품백이 이번 일에도 등장했다. 영어 표현 ‘wine and dine’은 ‘술과 음식 물량 공세로 로비하다’라는 의미로 쓰인다. 이제 이 표현에 ‘buy bags(가방을 사주다)’가 추가돼야 할 것 같다.
손제민 논설위원 jeje17@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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