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경의 창] 순간 채집

2024. 7. 18.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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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언덕배기에 있다.

사진을 찍으면서 일상의 소소한 순간이 의미 있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한편 사진으로 찍으려면 그 순간의 감상은 미뤄두고 찍기 바빠진다는 단점도 있는 듯하다.

사진은 순간에 담긴 의미를 채집하여 인생을 풍요롭게 가꾸는 마법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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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했던 꽃·나무에 말걸면
자연은 말없이 사람을 위로
이런 순간 사진에 담으면
인생을 더 풍요롭게 가꿔

집은 언덕배기에 있다. 언덕길에 핀 들풀과 담쟁이, 우뚝 선 나무에 가지를 엄호하는 잎들은 매일 보는데도 어딘가 달라져 있다. 키가 자라고 가지가 늘어나고 잎이 많아진다. 집을 나설 때마다 스마트폰을 손에 챙긴다. 새롭게 생긴 취미 때문이다. 스마트폰으로 전화를 걸고 카톡을 보내고 동영상을 봤다면 사진 찍기가 추가되었다. 사진의 주된 모델은 하늘과 구름, 꽃과 나무들이다. 언제나 내 곁을 지켰지만 무심코 지나쳤던 대상들이다.

출사라는 것도 해봤다. 출사는 사진을 찍기 위해 특정 장소로 가는 것이다. 계속 미루기만 하다 전남 담양에 자리한 소쇄원을 찾았다. 한국 최초의 인공정원이라는 희소성과 정원 건립자가 조광조의 제자라는 점이 호기심을 끌었다. 소쇄원은 최소한의 인공미를 더해 자연미를 살렸다. 최대한의 인공미를 추구하는 서양 인공정원과는 구별된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가 아니라면 사진 찍는 재미가 더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우산을 받치고 소쇄원 입구를 지나 질퍽이는 땅을 걸으니 문화해설사의 설명에 귀 기울이는 단체관람객이 눈에 들어온다. 해설사 입담 덕인지 관람객들의 웃음소리가 사방으로 튀었다. 제월당과 광풍각을 감싼 운무는 신령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빗방울에 흔들리는 분홍빛 꽃은 낯선 방문객을 향해 손을 흔드는 것 같았다.

기묘사화로 능주로 유배간 스승 조광조가 세상을 떠나자 양산보는 세상일에 환멸을 느꼈을 것이다. 어디 하나 마음 둘 데도 없는 세상에 빗장을 걸었다. 그때 양산보의 마음을 붙잡아준 것은 정원을 만드는 일이었다. 아무 일도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에 몰입하는 것을 통해 스승의 죽음을 이겨낼 수 있었다. 양산보는 세상의 소리를 물리고 주변을 자연으로 채웠다. 자연은 말없이 사람들을 위로하고 세상으로 걸어갈 힘을 주는가 보다.

양산보의 호는 소쇄옹으로 맑고 깨끗한 노인이라는 뜻이다. 2021년까지는 소쇄원이 양산보의 호를 땄다는 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문화재청의 역사성 검토 과정에서 면앙정 송순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의 소쇄원이라 명명했음이 밝혀졌다. 소쇄원 건물은 정유재란 때 소실되었고, 복원·중수되어 현재의 2동만 남았다. 영조 31년(1755) 당시 소쇄원을 목판에 새긴 '소쇄원도'가 남아 있어 원형을 추정해볼 수 있다. 소쇄원은 조선 중기 호남 사림문화를 이끈 송순, 김인후, 고경명과 정철이 활발히 교류한 장소로도 유명하다.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주변 풍경을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골목마다 화분을 키우는 이웃들이 많다는 것도 알았다. 자연뿐 아니라 사물도 더 살피게 되었다. 나태주의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너도 그렇다'는 시가 백번 공감된다.

오늘도 바깥을 돌아다니며 발걸음을 여러 번 멈췄다. 주변의 대상에게 다가갈 때 보이는 것과 한 걸음 물러나 보이는 것이 달라진다. 사진을 찍으면서 일상의 소소한 순간이 의미 있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사진을 찍으면서 멈추는 재미를 배운다. 풍경을 눈으로만 보면 나중에 기억이 가물가물해지곤 했다. 사진으로 남겨놓으니 두고두고 감상한다는 장점이 있다. 한편 사진으로 찍으려면 그 순간의 감상은 미뤄두고 찍기 바빠진다는 단점도 있는 듯하다.

사진은 순간에 담긴 의미를 채집하여 인생을 풍요롭게 가꾸는 마법일지 모른다. 일상적으로 만나는 흔한 대상에게 다정하게 말을 거는 일이다.

무심했던 대상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들여다보는 일이다. 관심이 없을 때는 손가락으로 빠져나가는 모래 같은 순간들이 사진 속에 들어와 머문다.

[김정랑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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