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업 100년’ 왕년의 기업 부활...日 경제 ‘근력’은 고고기업

도쿄/성호철 특파원 2024. 7. 18. 17: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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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EKLY BIZ] 고고기업, 지난 10년 동안 시총 2.6배로 급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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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100년을 훌쩍 넘기는 일본 ‘고고기업(古豪企業)’들의 지난 10년간 시가총액이 2.6배로 급증하며 일본 경제를 주도하고 있다. 한물간 줄 알았던 왕년의 기업들이 일본 경제 전면에 재등장하고 있는 것이다. 고고(古豪)는 경험이 풍부한 베테랑을 의미하는 일본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일본 주식 시장의 주요 100사(토픽스 100사) 가운데 창업 100년 이상 기업의 10년간 시가총액 변화를 집계한 결과, 무려 2.6배나 늘어난 157조엔(약 1387조원)에 달했다. 같은 기간 시총이 2.9배 증가한 미국 주요 100사(S&P100)에 버금가는 수준이다. ‘고고기업’의 10년간 매출은 1.5배, 순이익은 2.5배 증가했다.

그래픽=김의균

◇필기구 소멸? 역발상 전략으로

고고기업 중 하나인 미쓰비시연필은 1901년 일본의 첫 번째 연필을 양산했고, 1958년엔 고급 연필 브랜드 ‘유니(uni, 당시 4H~4B)’를 내놨다. 이후 볼펜·색연필·샤프펜·사인펜과 같은 필기류 시장에 전념했다. 그러나 2010년대 아이패드나 갤럭시노트 같은 디지털 기기가 등장했고 “연필은 10년 후 세상에서 사라진다”는 전망이 나왔다. 미쓰비시연필의 매출은 2017년 672억엔(약 5935억원)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20년엔 552억엔(약 4875억원)으로 3년 연속 감소했다. 당시 41세의 젊은 스하라 시게히코 신임 사장(CEO)이 갓 취임해 “매출이 ‘제로’가 되면 얼마나 버틸 수 있는가” 묻자, 재무 부문에서 돌아온 답변은 “2년”이었다. 1887년 마사키연필제조소라는 이름으로 설립된 미쓰비시연필은 창업 130년 만에 소멸 위기에 처한 것이다.

필기구 소멸이란 최악의 시나리오를 구성원과 공유한 미쓰비시연필은 ‘그래도 끝까지 간다’는 역발상 전략을 세웠다. 단순한 제품으로 여겨지는 연필·볼펜 문구 회사지만 연구·개발에 매출의 5%를 투입했다. 필기감이 좋은 수성볼펜을 내세워 경쟁사보다 50% 비싸게 팔았다. 기압이 낮아져도 잉크가 안 새는 첨단 기술도 채택했다. 디지털 펜슬 시장에도 뛰어들었다. 작년에 미쓰비시연필은 창업 이래 최고 매출인 748억엔(약 6606억원)을 기록했다. 영업이익률은 17%(영업이익 129억엔)다. 매출의 절반 이상(53.5%)은 해외에서 나온다. 내친 김에 올 3월, 독일의 필기구 명가(名家)인 라미(Lamy)를 인수했다. 137년 된 일본 필기구 회사가 94년 역사의 독일 만년필 회사를 인수한 것이다. 1887년 창업해 150주년을 맞는 해, 매출 1500억엔(약 1조3248억원)이 목표다. 미쓰비시연필의 시총은 작년 1월보다 2배 많은 1680억엔(약 1조4700억원)으로 치솟았다.

◇‘끝장 보자’는 베테랑의 집념

인공지능(AI)과 디지털의 시대에 고고기업 부활의 힘은 포기하지 않고 끝장을 보는 집념이다. 반도체 장비 기업 코쿠사이는 2018년 일본 대기업 히타치에서 버려졌다. 1940년 설립된 국제전기통신이 모태인 이 회사는 줄곧 ‘히타치’라는 그늘 밑에서 살았는데 돌연 사모펀드 KKR에 팔렸다. 사명에서 히타치가 사라졌고 거래선은 동요했다. 2019년엔 실적도 적자로 돌아섰다. 그해 KKR은 이 회사를 세계 최대 반도체 장비 회사인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즈에 판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중국 정부가 독점 우려를 이유로 인수를 허가하지 않았고 2021년 매각은 무산됐다. 두 번 버려진 것이다. 매각 실패로 회사가 망가지는 전형적인 시나리오였다.

코쿠사이는 ‘성막(成膜) 장치’라는 단 하나의 기술에 집착했다. 웨이퍼(반도체 원판)에 얇은 막을 만드는 반도체 장비다. 다른 경쟁사는 웨이퍼 한 장씩 막을 씌웠지만 코쿠사이는 수십 장을 한꺼번에 처리했다. 알고 보니 히타치에서 버려진 이후에도 성막 장치의 기술 진화에 모든 직원이 매달렸던 것이다. 세계 최고 반도체 기업인 TSMC(대만)·삼성전자(한국)·인텔(미국)이 코쿠사이를 찾았다. 반도체 회로의 미세 기술이 한계를 맞는 상황에서 얇은 막을 씌우는 최고 기술이 절실해진 것이다. 코쿠사이는 작년 회계 연도(2023년 4월~2024년 3월)에 매출 1808억엔(약 1조5968억원)에서 223억엔의 흑자를 냈다. 시총은 1조엔을 훌쩍 넘었다. 히타치 자회사 시절의 3배다. 5년 전 어플라이드가 예정한 인수가(35억달러·당시 환율로 3800억엔)의 2배 이상이다.

◇5년 치 순이익 쏟아붓고, 완전히 변신하고

최근 1~2년간 일본에서 최고 주가 상승 기업은 1910년 창업된 선박 엔진 기업 재팬엔진코퍼레이션(창업 당시 사명은 고베원동기제조소)이다. 작년 초만 해도 1200엔 정도 하던 주가는 최근엔 1만7000~2만엔을 오르내린다. 14~17배로 뛴 것이다. 수십 년간 선박 엔진은 기술 혁신이 작은 분야로 전락했고 재팬엔진코퍼레이션도 평범한 회사에 불과했다. 직원 수 300여 명에 매출은 102억엔(약 901억원·2020년 기준), 영업이익은 2억엔이었다. 창업 110년째인 2020년, 이 회사는 세계 최초로 암모니아 선박 엔진을 개발했다. 암모니아는 연소 시 이산화탄소를 전혀 배출하지 않는 친환경 연료지만, 연소할 때 불안정한 탓에 연료로 쓰기 어려웠다. 재팬엔진코퍼레이션은 ‘층상분사기술’이란 독자 방식으로 난관을 넘어섰다. 5년 치 순이익을 한꺼번에 기술 개발에 쏟아붓는 도박이었다. 2026년 암모니아 엔진을 탑재한 첫 수송선이 취항할 예정이다.

변화와 적응도 키워드다. 본래 사진 필름 제조사로 설립된 후지필름홀딩스는 2000년대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면서, 매출 대부분을 차지하던 사진 필름 시장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최악의 순간을 맞았다. 후지필름홀딩스는 본업을 버리고 디스플레이, 의료용 소재 기업으로 변신했고, 현재 약 2조8000억엔의 매출은 대부분 여기서 나온다. 일본의 부품 기업 TDK도 마찬가지다. 1980년대에는 카세트테이프였던 주력 제품을 2000년대 하드디스크(HDD)용 부품, 2010년대 리튬이온전지로 바꿨다. 예컨대 세계 1억대 완성품 시장에서 카세트플레이어가 소멸하고 PC의 시대가 주춤하고 스마트폰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고비마다 TDK는 변신해 시대에 적응한 것이다. 작년엔 영업이익의 80~90%가 리튬이온전지 분야에서 나왔다. 올림푸스는 1919년 현미경 회사로 창업했지만 이 사업 부문을 매각했다. 축적된 광학 기술은 진화해 세계 1위 내시경 제조사로 올라섰고, 10년 만에 시총도 2.4배로 커졌다.

☞고고기업(古豪企業)

‘고고(古豪)’는 일본어로 베테랑을 의미하는 단어다. 신흥 기업과 대비돼 쓰인다. 메이지 유신 이후 공업화 시기와 전후(戰後) 고도성장기에 설립된 유력 기업들을 일컫는다. 1980년대 세계 경제 대국 2위 일본의 전성기를 이끈 주인공이기도 하다. 일본의 주가 대표지수인 토픽스(TOPIX)100의 기업 가운데 절반 정도가 100년 이상 기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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