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 도·감청 들킨 미국, 왜 한국 첩보활동만 찍어 기소했나
대선 4달 앞두고 외국대리인등록법 위반 혐의 기소
“각국에 ‘로비 말라’ 사전 경고 시범케이스” 분석
지난해 대통령실 도감청 노출 ‘보복성 대응’ 가능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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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앙정보국(CIA) 출신 한국계 미국인 북한 전문가 수미 테리 미국외교협회(CFR) 선임연구원이 외국대리인등록법(FARA)에 따라 신고하지 않은 채 한국 정부로부터 금품을 받고 한국 정부를 위해 활동을 한 혐의로 미국 연방검찰에 의해 기소됐다.
수미 테리 선임연구원이 미국인이고 미국 실정법 위반 혐의에 대해 미국 사법 절차가 진행되고 있어, 한국과 미국 정부는 이 사건에 대해 공식 언급을 꺼리고 있다. 매슈 밀러 미 국무부 대변인은 17일(현지시각) 브리핑에서 ‘한국 정부와 논의했느냐’는 질문을 받고 “이 문제에 대해 언급하지 않겠다”고만 답했다. 조현동 주미대사도 이날 기자들 질문에 “딱히 뭐라고 할 말이 없다”고 대답했다. 국가정보원은 사안이 공개된 직후 “외국대리인등록법 기소 보도와 관련해 한-미 정보 당국은 긴밀히 소통 중”이라고만 밝혔다.
이 사건을 둘러싼 궁금증은 △미 검찰 기소 내용대로 국가정보원(국정원)이 한번에 수백원만원어치 선물과 불법적 경로의 연구기금을 제공한 것이 맞다면 국정원 해외 정보활동 방식이 적절했는지 △은밀성이 생명인 국정원의 해외정보활동이 미국 연방수사국(FBI)에 노출된 점을 어떻게 봐야할지 △미국이 왜 지금 한국의 정보활동을 문제삼았고 한·미관계에 미칠 영향은 무엇인지 등이다.
미국 검찰은 전날 공개된 공소장에서 수미 테리가 2013년부터 최근까지 한국 정부로부터 금품을 제공받고 한국 정부에 정보 등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각 나라의 정보기관들은 해외에서 국가안보를 위한 불법활동을 비밀리에 수행하고 있다. 국정원 해외파견요원들은 세계 50여개 거점 도시에서 공사, 참사관 같은 외교관 신분이나 상사원으로 위장해 활동하고 있다. 이들이 하는 일이 정보 수집과 공작이다. 각국 정보기관이 외교로 해결할 수 없는 악역을 해외에서 비밀리에 수행하는 현실을 감안하면, 국정원이 수미 테리 선임연구원에게 정보를 얻은 행위를 미국 실정법을 어긴 불법이라고만 비난하기 어렵다.
문제는 드러나지 않았어야 할 국정원의 활동이 드러난 점이다. 미국 검찰의 기소장에는 미국 연방수사국(FBI)이 파악한 수미 테리와 국정원 요원의 대화 내용과 사진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대통령실 고위관계자는 18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기자들과 만나 ‘국정원 요원이 노출된 것에 대해 정부 차원의 감찰이나 문책이 진행 중이냐’는 질문에 “감찰이나 문책을 하면 아무래도 문재인 정권을 감찰하거나 문책해야 할 것 같다. 좋은 지적이고, 검토해보겠다”고 답했다. 이 관계자는 “(국정원 요원이) 사진에 찍히고 한 게 다 문재인 정권에서 일어난 일”이라며 “당시 문재인 정부가 정권을 잡고 국정원에서 전문적인 외부 활동을 할 수 있는 요원들을 다 쳐내고, 아마추어 같은 사람들로 채우니까 그런 이야기가 나왔던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이 주장과 달리 수미 테리 선임연구원의 활동은 박근혜 정부 때 시작했고, 지난해 3월에는 윤석열 대통령을 칭송하는 워싱턴포스트 칼럼을 외교부의 요청을 받고 작성했다. 대통령실 고위 관계자 주장처럼 이번 일을 문재인 정부 일·탓으로만 돌리기 어렵다.
미국 내 외국 정보기관의 불법과 합법을 넘나드는 정보수집 활동이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데, 미국은 왜 지금 문제를 삼았을까. 미국 검찰의 수미 테리 선임연구원 기소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각국 정부의 민주·공화당 대선 후보 진영을 상대로 한 정보활동과 로비를 제어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정보 기관 출신의 전직 정부 핵심 관계자는 한겨레에 “11월 대선을 앞두고 각국 정부의 미국 내 정보 활동과 로비를 견제하려는 사전 경고 발신용 시범 케이스로 보인다”라고 말했다.
수미 테리 사건을 맡은 데이미언 윌리엄스 미국 뉴욕 남부지검장은 자료를 통해 “공공 정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자신의 전문 지식을 외국 정부에 팔고자 할 때 두 번 생각하고 법을 준수해야 한다는 분명한 메시지를 전달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혔다.
문제는 숱한 외국 정보기관 활동 가운데 하필이면 동맹국인 한국을 표적으로 삼았냐는 것이다. 전직 정보기관 고위 인사는 “일본과 중국에 비하면 한국의 정보활동은 미미한 수준인 현실을 고려할 때 ‘표적 감시’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4월 미국 정보기관의 서울 용산 대통령실 도·감청 등 정보 활동이 노출된 데 대한 ‘보복성’ 대응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한-미간 ‘정보 갈등’을 둘러싼 보복 대응(추정)은 선례가 있다. 지난 1996년 9월24일 미 해군정보국에 근무하던 한국계 미국인 로버트 김이 북한 잠수정 강릉 침투경로를 주미 한국대사관 해군 무관에게 알려줬다 체포됐다. 한국은 1997년 4월 무기 구매를 맡은 공군 중령이 미국인 무기 중개상과 동업을 조건으로 군사기밀을 유출한 혐의로 적발해, 미국인 등 5명을 처벌했다. 로버트 김 사건과 7개월 간격을 두고 벌어진 미국인 무기중개상 사건을 두고 당시 야당에선 미국에 대한 보복대응이란 주장이 나왔다.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미국 정부는 물론 한반도 전문가 등과 긴밀한 소통이 절실한 상황에서, 수미 테리 사건으로 한국의 대미 정보 활동의 대폭 축소가 불가피해졌다. 정보 기관 출신의 전직 정부 핵심 관계자는 “미국 정부 관계자나 전문가들이 한국 쪽과 접촉을 피하려 할 것”이라며 “수미 테리 사건의 악영향이 심각할 듯하다”고 말했다.
권혁철 기자 nura@hani.co.kr 이제훈 선임기자 nomad@hani.co.kr 이승준 기자 gamj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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