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재야` 장기표의 말기암고백... "소식 전해 죄송하다"
'영원한 재야'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 대표(78)가 소셜미디어에 말기암 소식을 전했다. 장 대표는 18일 본인의 페이스북에 '담낭암 말기'로 투병 중이라고 밝혔다. 장 대표는 "오늘 저는 말씀드리기 대단히 어려운 일을 말씀드리려 한다"며 "며칠 전에 건강상태가 안 좋아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담낭암이 다른 장기에까지 전이되어 치료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다"고 적었다.
장 대표는 이어 "당혹스럽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한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한다"고 했다. 이어 "자연의 순환질서 곧 자연의 이법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해온 사람이기에 자연의 이법에 따른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고 했다.
장 대표는 그러면서 나라 걱정도 잊지 않았다. "요즘 대한민국이 돌아가는 꼴을 보노라면 이런 나라 만들려고 그토록 열심히 노력해왔나 싶어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다"며 "무지의 광란이라 불러 마땅할 팬덤정치가 횡행하여 이러다가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마저 든다"고 했다.
마지막으로 장 대표는 "저의 뜻을 존중해서 여러 어려운 사정에서도 물심양면의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갑자기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 정말 죄송하다"고 마무리했다.
장 대표는 남은 시간 부대끼고 정들었던 지인들을 만나려 한다고 했다. 장 대표는 "당분간은 매주 수요일 오전 여의도에 있는 사무실에 나가서 저를 만날 일이 있는 분만 만나려고 한다"며 "양해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국내 재야 인사 가운데 '영원한 재야'라는 말이 장 대표처럼 딱 들어맞는 이는 없다. 장 대표는 신념과 철학을 굽히지 않고 가시밭길을 걸어온 대표적 재야인사다. 서울대 법대 재학 때부터 민주화운동에 투신한 이래 60년 가까운 세월 동안 그는 한 번도 양지녘에 서지 않았다. 타협만 하면 얼마든지 그렇게 할 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회의원과 장관할 기회도 많았다. 다만 장 대표가 제도권 정치를 도외시한 건 아니다. 2000년대 들어 제도권 진입을 위한 행보에서 보수와 중도 등과도 연대를 꾀한 적 있다. 그러나 한 번도 기성 정치에 진입하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영원한 재야'로 불린다.
대한민국 민주화운동과 사회 노동 운동의 한 가운데서 장기표 이름 석자는 늘 핵심이면서도 아웃사이더였다. 전태일 열사의 뜻을 기리기 위해 전태일재단을 만드는데 주도적 역할을 했고 현 민주노총의 전신인 전노협의 이론적 정신적 지주였다.
말년의 장 대표는 산업화와 정보화가 이뤄지고 물질적 풍요가 달성되어가면서 관심을 어떻게 하면 현대인이 자아실현과 행복에 이를 수 있을까 고민하는 '신문명 정책' 연구에 매달려왔다. 그가 내세우는 철학과 정치구조는 녹색사회민주주의다. 그 정신을 전파하기 위해 신문명정책연구원을 설립했고 유튜브 방송도 시작했다.
장 대표는 19대 총선에 원내진입을 시도했으나 기성 제도권은 그의 '순진한 힘'에 대비될까 두려웠던지 모두 벽을 쳤다. 제21대에서는 보수정당 후보로 진영을 옮기면서까지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 연장선에서 2022년 윤석열 대통령의 당선에 힘을 보태기도 했다.
장 대표는 민주화운동, 노동운동으로 9년을 감옥에서 지냈고 12년의 수배생활을 겪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들 다 하는 민주화 유공자 신청을 하지 않았으며, 일절의 배상금도 받지 않았다. 그는 그 이유를 "국민된 도리, 지식인의 도리로서 할 일을 한 것일 뿐이고 대가를 바라고 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래는 장기표 선생의 글 전문이다
저와 함께 해온 동지 여러분!
부족하기 짝이 없는 저를 오랜 기간 성원해주신 지인 여러분!
그리고 저희가 하는 일에 동참해주신 많은 국민 여러분!
오늘 저는 말씀드리기 대단히 어려운 일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며칠 전에 건강상태가 아주 안 좋아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은 결과 담낭암 말기에 암이 다른 장기에까지 전이되어 치료가 어렵다는 판정을 받았습니다.
당혹스럽긴 했지만 살 만큼 살았고, 할 만큼 했으며, 또 이룰 만큼 이루었으니 아무 미련 없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더욱이 자연의 순환질서 곧 자연의 이법에 따른 삶을 살아야 한다고 강조해온 사람이기에 자연의 이법에 따른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찌 회한과 아쉬움, 그리고 못다 한 일에 대한 안타까움이 없겠습니까?
무엇보다 60여 년간 모든 사람이 행복하게 사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노력해온 사람으로서, 특히 자연과학의 첨단적 발달로 모든 사람이 인생 최고의 행복인 자아실현의 보람과 기쁨을 누릴 수 있는 신문명세상(정보문명시대)을 맞아 이를 이룰 수 있는 정치이념과 정책대안을 정립해두고서도 이를 구현할 정치적 토대를 구축하지 못한 채 죽음을 맞게 된 것이 무척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신문명세상에 맞는 사상과 이념, 그리고 정책을 구현하지 못함으로써 나타나는 기후위기와 이에 따른 폭염과 질병, 그리고 사회갈등과 인간성 상실 등으로 온갖 고통을 겪는 것도 문제지만, 인간의 통제를 벗어난 초인공지능에 의한 현존 인류의 소멸까지 우려되는 상황을 생각하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행복한지를 알고서 이에 맞는 정치가 이루어지면 능히 해결될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세상일이란 때가 되면 거기에 맞는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나타나리라 봅니다.
그런데 더 가슴 아픈 것은 평생 나라의 민주화와 민족통일, 그리고 국민의 행복한 삶을 위해 노력해왔건만 요즘 대한민국이 돌아가는 꼴을 보노라면 이런 나라 만들려고 그토록 열심히 노력해왔나 싶어 자괴감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과도한 양극화와 이에서 오는 위화감과 패배의식, 그리고 높은 물가와 과다한 부채, 여기에다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는 온갖 사건 사고로 고통을 겪는 사람이 너무 많은 것도 문제지만, 앞으로 더 살기 어려운 나라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이 엄습해 있는 터에 이를 극복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해야 할 정치는 그야말로 무지의 광란이라 불러 마땅할 팬덤정치가 횡행하여, 이러다가 나라가 망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마저 듭니다.
더욱이 이를 극복할 방안을 찾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점에서 걱정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단지 물극즉반 곧 사물이 극단에 치우치면 반드시 대반전이 일어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거늘 이를 극복할 대반전이 일어나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그런데 정작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은 저의 뜻을 존중해서 여러 어려운 사 정에서도 물심양면의 많은 도움을 주신 분들에게 기대에 부응하기는커녕 갑자기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전하게 되어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리고 저와 특별한 관계를 맺어온 많은 분들에게 더이상 연락드리지 못하게 되었음을 양해해 주십사 하는 말씀도 꼭 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체력으로 보아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 하더라도 개별적으로 만나 뵙는 일은 어려울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당분간은 매주 수요일 오전 여의도에 있는 사무실(02-2277-5253)에 나가서 꼭 저를 만날 일이 있는 분만 만나려고 합니다.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아무쪼록 오늘의 이 어려움이 다 극복되고 모든 사람이 행복한 날이 하루 속히 오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들 건강 챙기셔서 건강한 가운데 하시는 일들이 다 잘 되기를 바랍니다.
그간의 모든 성원에 거듭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이규화기자 david@d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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