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도간첩단 피해자 아들 “진화위 망치려 온 황인수...소송할 것”

고경태 기자 2024. 7. 18. 1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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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석권호씨 “처벌 안 받아 자꾸 이런 일 발생”
17일 한겨레신문사 5층 취재방에서 만난 진도간첩단 조작사건 고 석달윤씨의 아들 석권호씨가 한겨레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처벌하지 않으니까 문제가 다시 일어나는 겁니다. 고문으로 간첩사건을 조작한 이들과 이를 합리화하는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민·형사 소송을 검토 중입니다.”

1980년 발생한 진도간첩단 조작사건 피해자 석달윤(1932~2022)씨의 아들인 민주노총 전 조직쟁의국장 석권호(54)씨가 최근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 황인수 조사1국장의 발언과 관련해 입을 열었다. 1기 진실화해위(2005~2010)에서 진실규명되고 재심에서 무죄가 선고된 이 사건에 대해 황인수 국장은 지난해 10월5일 직원교육 자리에서 ‘조작이 아니며 석달윤씨는 간첩이 맞다’라는 취지로 말했다는 사실이 최근 한겨레를 비롯한 언론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에서 김성회 의원(더불어민주당)의 질의로 드러난 바 있다.

17일 오후 한겨레와 만난 석씨는 “진실화해위와 황인수 국장에 대해 모두 명예훼손으로 민·형사소송을 검토 중”이라며 “간첩 혐의로 사형 집행당하고 재심 무죄를 받은 김정인(1939~1985)씨 유가족과 함께 소송을 진행하고 싶다”고 했다. 지난해 3월 이른바 ‘민주노총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국가보안법 위반과 간첩 혐의 등으로 구속됐으나 10월 보석으로 풀려나 8월 결심공판을 앞둔 그는 “제 사건은 재판 중이라 조심스럽고, 오늘은 아버지 이야기를 주로 하겠다”면서 인터뷰에 응했다.

지난해 10월17일 열린 진실화해위 64차 전체위원회에서 황인수 조사1국장이 1소위원회 회의결과를 보고하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진도간첩단 조작 사건은 1980년 5월께부터 중앙정보부(중정)가 남파간첩 오아무개씨 진술에 따라 한국전쟁기 월북한 박양민의 남파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그의 친족에 대한 내사를 벌여 피해자들을 장기간 불법구금하고 강압적 상태에서 자백을 받아 간첩 혐의로 처벌한 일이다. 당시 박양민의 외조카 김정인에 대해선 1985년 사형이 집행됐고, 고종 10촌 석달윤은 무기징역형으로 복역하다 18년 만인 1998년 가석방됐다. 2007년 6월 1기 진실화해위는 ‘석달윤 등 간첩조작의혹사건’이라는 제목으로 이 사건을 진실규명하면서 재심을 권고했는데, 실제 재심이 진행되어 2009년 대법원에서 김정인·석달윤씨 모두 무죄 판결을 받았다.

석권호씨는 황인수 국장의 발언을 접하며 2008년 재심 법정에 나온 중정의 고문 수사관들을 떠올렸다고 했다. “중정 수사관 4~5명이 나와 판사의 질문에 답을 했어요. 모두 고문 안 했다고 부인했는데, 그중 한 명이 벌떡 일어나 아버지에게 삿대질하며 ‘세상이 변했다고 당신 그렇게 얘기하면 안 돼’라고 당당히 이야기했어요. 황인수 국장이 딱 그 중정 수사관처럼 보입니다. 어처구니가 없는 거죠.”

아버지 석달윤씨는 진실화해위 조사와 재심 법정에서 고문당한 사실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옷을 모두 벗기고 양손에 수갑을 채운 다음 책상 두 개 사이의 몽둥이에 통닭구이처럼 나의 손과 발을 매달아 놓고 큰 주전자에 물을 떠 와 얼굴에 수건을 씌운 다음 물을 붓거나, 바닥에 눕히고 나의 손과 발을 밟은 상태에서 얼굴에 수건을 씌운 다음 주전자로 물을 부었다. 200~300촉의 전등불을 쳐다보게 하고 내가 눈을 감거나 전등불을 피하면 사정없이 몽둥이로 어깨를 내리쳤다. 각목을 뒷무릎에 끼우고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게 했다. 볼펜 심지 2개를 성기 속에 밀어 넣어 성기에서 검붉은 피가 솟아 나왔고 소변을 볼 때마다 아팠다.…(중략) 3인조로 3개조가 8시간씩 교대로 계속 때려 잠을 잘 수가 없었다. 하루는 나를 어떤 방으로 데리고 가더니 전기고문을 하려고 하여 여기서 죽는구나 하는 극도의 공포감이 밀려와 자백을 하겠다고 했다.”

중정 수사관들이 고문을 가한 것은 석달윤씨에게 한국전쟁 시기에 월북한 고종 10촌 박양민을 만났다는 자백을 받기 위해서였다. 1948년 2월 국민학교(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상경한 석달윤씨는 당시 연희전문 정치학과에 재학 중이던 박양민의 주선으로 서울선린상업학교에 보궐 입학했고, 한국전쟁이 나기 이전에는 박양민과 서울에서 하숙을 함께하기도 했다. 전쟁이 터지자 아버지는 고향에 내려와 진도경찰서 의용경찰대원으로 일했고, 박양민은 월북을 한 것으로 기억한다. 그 뒤 아버지는 고등공민학교 교사를 거쳐 경찰전문학교에 입교해 서울시 경찰국 정보과 청량리분실 대공반 형사로 근무하다가 진도로 돌아와 해태양식을 하며 생업에 종사했다.

“1980년 8월21일을 잊지 못합니다.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저는 마당에서 친구들과 놀고 있었는데 멀리서 검은 지프가 서더니 4~5명의 남성이 집에 들어와 아버지를 데려갔어요. 아버지가 지프에 타던 뒷모습이 선연합니다.” 그랬던 아버지가 나중에 신문에 큼지막하게 간첩사건의 주인공으로 등장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석권호씨는 “대공반 형사였던 아버지가 이런 일을 겪었으니 얼마나 아이러니하냐”며 씁쓸하게 웃었다.

1978년으로 추정되는 석권호씨 가족사진. 4남매 중 막내로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석권호씨는 아버지 석달윤씨 무릎에 앉아있다. 둘째였던 누나만 빠져 있다. 석권호씨 제공

남겨진 4남매를 어머니 하말심(1932~2021)씨가 생선 행상을 하며 키웠다. 집안 형편상 대학진학이 어렵다고 판단한 막내 석권호씨는 나중에 어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아무 연고가 없는 경기 이천의 이천농고에 진학했지만, 졸업 뒤에는 장기수가족협의회 사람들과 인연이 닿아 1989~1990년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민가협) 간사로 일했다. 이후 안산의 동양기공에 입사해 노동자 생활을 하다 노조 위원장을 지내고 2000년 4월부터 민주노총에서 일했다. 조직쟁의실, 대외협력실, 전략조직본부에서 비정규노동자와 이주노동자 권리업무 등을 주로 맡았다.

“민가협 있을 때 5개 교도소 수감자들의 공안사건을 분석한 적이 있어요. 사건이 일어난 해, 보도된 해를 보면 특히 선거 직전 급격히 올라갔다 내려가는 그래프가 그려지더라고요. 특히 남서해안 진도·완도·신안·추자도 등 전라도 쪽 섬 중심으로 먹잇감을 찾는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사상이나 이념과 조직으로 연결된 게 아니라 친척들을 엮어 사건을 만들어요. 고립된 외딴섬 사람들이 항의하기 힘들 거라고 보니까요.”

석권호씨는 1기 진실화해위에 아버지가 직접 진실규명 신청을 하고 증거 수집을 위해 조사관들에게 전주교도소 교도관들을 연결해주었다며, 마지막으로 이렇게 물었다. “김광동 위원장과 황인수 국장은 진실화해위 망치려고 일부러 들어온 거 맞지요?”

그의 말이 맞는지를 보려면, 황인수 국장이 지난해 10월5일 직원 교육 자리에서 했다는 다음 발언을 곰곰이 뜯어볼 필요가 있다.

“실제로 이제 우리가 이제 과거사 관련해가지고는 절차적 문제 때문에 이제 다 무죄가 권고되잖아요. 무죄가 이렇게 성립이 되는데, 조작은 아니거든요. 그 내용이. 내용의 조작은, 예를 들면 그게 간첩이 아니다. 간첩 안 했다. 아닌 걸 했다고 하면은 그 내용이 조작인데요. 절차를 하자라 보면, 과거에 이 간첩사건들이 무죄가 되는 경우는, 구속 영장이 없었고. 그다음에 쉽게 말해서 구속영장 없이 장기간 구금하고 폭력을 가했다. 과거 절차상의 하자다. 그래서 이제 무죄가 되는 건 맞아요. 그건 인정합니다. 근데 지금부터 그렇게 안 하면 되는 절차를 지키면 돼. 근데 간첩을 한 거는 맞거든. 그럼 나는 2007년에 간첩한 거는 맞다고 이야기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여기 오고 싶었고, 그때 당시에. 2007년도에 1기 파견 나오고 싶었거든요. 근데 제가 직급이 너무 높아가지고 그때 당시에 못 왔어요. 여기는 5급 사무관이나 6급 파견이 나오니까. 여기 파견 나오질 못했어요. 그런 상황인데, 제가 4급, 못 왔어요. 그래서 제 뜻을 못 폈죠. 그러다가 이제 2021년, 2년 하고 나라에 이렇게 열심히 기여를 하다 보니까 여기 이제 1국장을 뽑는다고 해서 응시를 한 거예요.”

(취재 도움: 조승우 교육연수생)

고경태 기자 k21@hani.co.kr 조승우 교육연수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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