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나에서 찾은 '느림의 미학'…오래 기억될 비올라의 영상時
12일 숙환으로 타계
슬로모션 기법으로
인간 내면세계 탐구
종교적 전통서 영감
故 백남준의 제자
11월 국제갤러리 展
“내 작품이 존재하는 가장 결정적인 곳은 미술관도, 상영관도, TV도, 스크린도 아니다. 바로 그것을 보는 관객의 마음이다.”
‘비디오아트의 렘브란트’로 불린 미국 영상예술 거장 빌 비올라(1951~2024)가 지난 12일 숙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73세. 작가의 배우자이자 오랜 동업자인 키라 페로프 등 유족은 “사인은 알츠하이머와 관련한 합병증”이라며 “캘리포니아 롱비치 자택에서 평안히 눈을 감았다”고 전했다.
비올라는 비디오 설치 작업과 전자음악 퍼포먼스를 오가며 탄생과 죽음이라는 인간의 보편적 경험을 탐구했다. 가장 물질적인 도구로, 인간의 정신세계를 깊이 있게 다루며 40년 넘게 동시대 미디어아트의 살아있는 전설로 군림한 인물. 백남준의 제자로서 비디오아트를 순수예술 반열에 올린 예술가 중 한 명이다.
거장들을 흠모하던 비올라는 과거의 표현 양식과 현대 기술을 융합한 작업을 선보였다. 1995년 베네치아비엔날레에 미국 대표작가로서 전시한 ‘인사(The Greeting)’가 그중 하나다.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 자코포 다 폰토르모의 그림을 모티브로 한 영상이다. 2010년 피렌체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과 나란히 그의 ‘Emergence’를 설치하기도 했다.
호수 밑바닥에서 마주한 ‘느림의 미학’
동서고금의 미술뿐 아니라 불교 선종과 이슬람 수피교, 기독교의 신비주의 등 종교적 전통에서도 영감을 얻었다. 고속 촬영을 통한 슬로모션 기법으로 유명한데, 정지된 듯 느린 속도로 흐르는 시간을 시각화한 그의 작품은 관객이 내면세계에 빠져들게끔 유도한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비, 타오르는 불과 천천히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작은 보는 이들이 숭고함의 의미를 되새기게 했다.
1951년 뉴욕 퀸스에서 태어난 그의 어릴 적 기억은 깊은 물 속에서 시작한다. 여섯 살 때 사촌과 놀러 간 호수에 빠져 익사할 뻔했다. 삼촌의 손길 덕분에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무거운 돌처럼 호수 밑바닥에 가라앉던 그는 “다른 차원의 포털에 들어갔다 온 것 같은 기분이었다”고 회상했다.
“거기서 본 것은 어쩌면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경이었습니다. 푸른 세상, 작은 사물들의 움직임, 한 줄기 빛…. 계속 그곳에 머물고 싶어서 삼촌의 손을 뿌리치기도 했죠.”
비디오 기술이 발전하던 1970년대에 카메라를 집어 들었다. 시러큐스대에서 백남준, 피터 캠퍼스 등 미디어아트 선구자들의 조수로 일하며 매체의 무한한 표현 가능성에 눈을 떴다. 시각적 왜곡으로 가득 채운 영상이나 CCTV 설치작업 등 실험적인 기교가 돋보이는 초기작업들을 선보였다.
연인이자 동업자 페로프와의 만남
작품에 철학적인 깊이가 더해진 건 평생의 동반자인 페로프를 만나고부터다. 1977년 예술감독으로 일하던 페로프의 초청으로 호주를 방문하며 처음 만난 이들은 2년 뒤 뉴욕에서 결혼했다. 배우자와 함께 캐나다의 평원과 튀니지의 사막, 히말라야의 티베트 사원, 일본의 불교 사찰 등을 취재하며 관찰한 이미지는 이후 작업에서 꾸준히 등장하는 소재다.
내성적인 비올라가 벽에 부딪힐 때면 페로프의 차례였다. “보통 빌은 서재에 틀어박혀서 아이디어를 찾아 헤맸어요. 그럴 때면 어느 순간 제가 찾아가서 이렇게 말했죠. ‘시간이 다 됐어. 앉아서 글을 쓰고 읽는 건 그만하고, 이제 뭘 할까?’”
내조에 그치지 않았다. 페로프는 빌비올라스튜디오의 총괄디렉터로서 작가의 전시 기획과 출판을 도맡았다. LA 필하모닉이 2022년 바그너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연주한 ‘트리스탄 프로젝트’의 총괄프로듀서로서 비올라의 영상이 연주와 한 몸처럼 어우러지도록 조율했다.
45초 촬영해 15분의 걸작으로
대표작은 2000년 전후로 쏟아져 나왔다. 1991년 모친, 1999년 부친을 여의고 생로병사와 사후세계를 한층 깊이 탐구하기 시작하면서다. ‘놀라움의 5중주’(2000)의 포커스는 오로지 다섯 명의 남녀. 45초간 촬영한 연기자들의 표정과 몸짓을 15분으로 확장했다. 실제 속도에선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순간적인 눈빛 변화와 움직임, 빛의 변화와 공기의 흐름까지 잡아낸 걸작이다.
2001년 작 ‘천년을 위한 다섯 천사들’은 옷을 입은 한 남성이 물속에 뛰어들면서 시작한다. 무중력 상태와 같은 우주적 공간으로 빨려 들어가는 인간의 형상을 연출했다. 다섯 개의 비디오 프로젝터에서 나오는 ‘느림의 미학’은 성스러운 종교화와 같은 감상도 전한다. 누구나 내면 깊숙이 간직하고 있을 법한 비극적인 기억을 반추하게 하기 때문이다.
비올라는 아주 먼 여행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비디오아트는 오는 11월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만날 수 있다. 2020년 부산시립미술관 전시 이후 4년 만에 한국에서 열리는 개인전이다. 국제갤러리는 “평생 삶과 죽음, 그 여정에서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주제를 탐구해온 비디오아트 작품을 다시 고찰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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